현실

초단편소설

by 현범

여자의 웃음소리는 명품 매장의 쇼윈도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남자의 양손에는 그녀의 행복만큼이나 묵직한 쇼핑백들이 들려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방금 막 세상에 나온 신상 가방이 들려 있었다. 완벽한 오후, 완벽한 거리, 완벽한 연인이었다. 그때, 이 완벽한 세상의 배경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찔렀다.

[딩동]

“딩동? 오빠, 누구 왔나 본데?” 수정처럼 맑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응?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쾅! 쾅쾅쾅!]

전자음은 이내 문을 부술 듯한 격렬한 소음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 잠시만.” 남자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쓰고 있던 VR 헤드셋을 벗자, 화려한 거리는 사라지고 지독한 현실이 그를 덮쳤다. 커튼으로 빛 한 점 허락하지 않은 방. 코를 찌르는 곰팡내와 음식물 쓰레기가 뒤섞인 악취. 땀에 절어 축축한 민소매와 사각 팬티. 그는 좁은 방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닳아빠진 문을 아주 조금만 열자, 조그마한 틈새로 집주인 아주머니의 잔뜩 뿔이 난 얼굴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악취에 반사적으로 코를 막으며, 벼르던 말을 쏟아냈다.

“왜요?” 남자가 먼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요?’ 허, 참. 총각, 내가 한 시까지 월세 보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코를 막은 탓에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맹맹하게 울렸다.

“알았어요, 입금하면 되잖아요.” 남자가 문을 닫으려 하자 아주머니가 문틈에 발을 들이밀었다. 호리호리한 남자보다 덩치가 큰 아주머니의 힘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 꼴이 이게 뭐야! 좀 씻고! 청소도 하고! 젊은 사람이 컴컴한 데 틀어박혀서는.” “아, 알아서 한다고요!” 남자가 음성을 높이자 아주머니는 그제야 발을 뺐다. 남자는 문을 닫기 직전, 그녀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그리고 저, 총각 아닙니다.” 그 한마디는, 그가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 두고 온 또 다른 무언가를 암시하는, 그만의 작은 반항이었다. ‘쾅!’, 남자는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았다.

남자는 현관에서 소파로 뛰어가듯 돌아와, 다시 VR 헤드셋을 착용했다. 지독한 현실을 지우고, 달콤한 가상으로 도피했다. 다시 눈앞에 나타난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빠, 괜찮아? 누구야?” “아, 친구. 돈 빌려달라고 찾아왔네.” “아~ 예전에 말했던 그 귀찮은 친구? 빌려주지 마. 오빠가 자꾸 빌려주니까 버릇처럼 찾아오잖아.” “그래도 친구인데, 어떡하냐. 빌려줘야지.” “어휴, 우리 오빤 너무 착해빠졌다니까.”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무수히 많은 가상의 캐릭터들이 그들의 몸을 통과하며 지나갔다. 이윽고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빠, 근데 우리 이제 ‘테마’ 좀 바꾸면 안 돼? 맨날 똑같은 서울, 지겹잖아. ‘우주’나 ‘미래 도시’ 같은 비현실적인 걸로 바꾸자, 응?” “음, 난 지금이 좋은데.” 그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완벽한 현실이었다. “오빠는 가상현실에서도 현실하고 똑같은 걸 하고 싶어? 이왕이면 비현실적인 게 더 재밌잖아.” “그럼, 우주 테마로-”

[픽-]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약속된 단전이었다. 헤드셋의 미약한 불빛마저 꺼지고, 귀에서는 가상의 바람 소리 대신 제 심장 소리만이 먹먹하게 울렸다. 그는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지만, 딸깍거리는 공허한 소음만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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