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

초단편소설

by 현범

“판사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진실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법정의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내 필사적인 절규는 그 끈적한 공기 속으로 힘없이 녹아들었다. 내 옆의 최 변호사를 돌아보았다. 비싼 수임료를 받아 챙긴 그의 입은, 본분을 망각한 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나와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마치 다음 재판 준비라도 하는 듯 서류만 뒤적였다. 판사의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피고인은 반성의 기미가 없고, 죄질이 악하며, 사회적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때 취했었습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발악할수록 양손에 묶인 포승줄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기나긴 공방이 마침내 종착역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X발! 기억 안 난다고! 나 진짜 모르는 일이라고!” “-기억 몰수형에 처한다.” 그 순간, 주위의 모든 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 아득해졌다. 내 시야의 범위는 빠르게 좁혀져 마침내 한 점으로 모였다. 이내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땅. 땅. 이제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땅! 판사봉 소리가 세상을 깨부수듯 울렸다.


거대한 쇳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숙한 내 침실이 아니었다. 차갑고 습한 공기, 회색 벽과 철창. 이곳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132’ 내 가슴팍에는 노란 바탕의 죄수 번호가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손목을 옥죄던 포승줄은 희미한 자국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그때 방 한편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자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나와 비슷한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내 아버지뻘은 되어 보였다. 둘 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넋이 나가 시체처럼 앉아있는 젊은 사람은 제쳐두고,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저씨, 여기가 정확히 어디 교도소인가요?”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쩍 곯아 최소한의 피부만 남은 듯한 그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2017년 7... 7월 22일... 밤 11시... 엄마... 엄마가 온다고 했는데...” 그는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대화할 수 없음을 깨닫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내게, 혹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적어 놔.” “예? 뭘 말입니까?” "그동안 행복했던 것들... 생각날 때마다 종이에 적어 놔. 결국은 저 아저씨처럼 되겠지만..."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뜯어 뒷면에 펜을 휘갈겼다. 마치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영역까지 침범했다. 기억을 추출하여 파일로 저장하는 기술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범죄 수사와 심리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지만, 상용화되면서 기억은 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아름다운 기억을 사고팔았다. 몽골의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알프스의 눈부신 설경, 첫사랑의 달콤한 키스... 모든 것이 거래 가능했다. 하지만 타인의 기억은 한번 이식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이 기술은 새로운 형벌을 탄생시켰다. 죄인의 기억 중 특정한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삭제하는 '기억 몰수형'. 21세기 최악의 형벌이었다. 달력 위로 떨어지는 잉크 방울이 번져갔다.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 처음 자전거를 배웠을 때의 상쾌한 바람, 첫사랑의 웃음소리, 친구들과 나눴던 시시껄렁한 농담들... 그런데 내 손이 언제부터 이렇게 떨리고 있었을까.


일주일이 흘렀다. 어쩌면 일 년, 혹은 하루. 이곳에서 시간은 의미를 잃었다. 내 손에 들린 달력은 백지가 된 지 오래였다. 내 세상엔 오직 단 하나의 장면만이 영원처럼 반복될 뿐이다. 깨진 소주병의 날카로운 감촉,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내 앞에서 공포에 질려가던 그녀와, 그놈의 얼굴. 그 기억의 파편 하나가 내 모든 것이 되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그 기억뿐이다. 마르지 않는 눈물은, 내가 아직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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