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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와동화 Apr 03. 2023

창밖의 아이들

이선주/ 문학동네/ 196쪽/ 2015-03-18

제5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 | 문학동네 청소년 28

          

란이는 열여섯 소녀이다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사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행복구 낙원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란이는 누구나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로 밥을 해 먹는 줄 알았고 누구나 좁은 집에 사는 줄 알았다. 

란이 할머니는 칠십의 굽은 허리로 갈빗집에서 불판을 닦아 생활비를 마련하고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된 뒤 집안에 틀어박혀 텔레비전만 본다엄마는 여섯 살 때 란이를 버리고 갔다.     


더 이상 애들은 사는 형편이 비슷하지 않았다. 비교 대상이 생기자 가난은 이빨을 드러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게 가난이 아니었다. 다들 스마트폰을 쓰는데 자신만 쓰지 못하는 것, 그게 가난이었다.(12쪽)          


란이네 반에 부자에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몽클레어를 입어서 별명이 클레어인 예솔이가 있다클레어 때문에 옆 동네 해원동의 아이들은 란이를 가난하다 무시하면서도 클레어를 동경한다.      

첫 월경으로 그려진 검붉은 지도를 보며 란이는 나팔관 수술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란이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아기를 낳아 무책임한 어른들처럼 되는 게 두렵다. 정아 언니는 남자친구와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다 아기를 남겨두고 자살했다.      


어느 날, 클레어가 도움을 청한다. 클레어의 온 몸에 시커먼 멍 자국이 있다. 클레어의 아빠는 클레어가 무엇을 해야만 보상을 하고 엄마는 오로지 쇼핑에만 관심이 있다. 클레어도 다 가진 듯했지만 고아다. 클레어는 란이에게 산부인과 의사인 자기 아빠의 불법 낙태 행위를 신고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자기를 딸로도,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클레어의 간절한 부탁을 란이는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복수는 실패하고 클레어는 집을 나와 란이네 집으로 온다. 클레어의 아빠가 카드를 끊자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고 유학을 가기 전 란이를 찾아왔다.     


“이런 말 하면 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니네 집은 감옥 같지는 않았어. 정말이야.”

“결국 돌아갔잖아.”

란이의 말에 핀잔이 묻어났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돈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살아서…. 몰랐으면 몰랐지 이제는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실은 그들이 원하는 그대로 된 거지. 그래도 내 결심은 지킬 거야.”

“무슨 결심?”

“내 마음을 시궁창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178~179쪽)     


란이는 수술비 마련을 위해 갔던 전단지 알바에서 민성이를 만나고 가까워지고 키스까지 하게 된다. 민성은 조선족으로 불법체류자다. 엄마는 송환되고 남겨진 아이다.    

  

“엄마는 제가 아무것도 모른대요. 아무것도 모르는 건 엄마예요.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예요. 가족끼리 같이 사는 거. 그거 하나요.”(171쪽)     


민성은 엄마를 모셔올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까지는 열심히 일하겠다 생각하고 가구공장으로 갔다.   

  

란이는 낙원동에 사는 자신이 가장 가난하고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민성이는 가족과 사는 것을 부러워하고 클레어는 란이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 중심에 베푸는 할머니가 있어서 가능하다.     

할머니는 언제나 10인용 밥통에 가득 차게 밥을 했고 김치와 달걀 프라이, 된장찌개만으로도 식탁은 푸짐하다.     

 

누가 이 장면을 본다면 가족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성실한 부부, 키는 작지만 속 깊은 장남에 늘 뾰로통해 있지만 애교 많은 둘째, 그리고 부부의 식지 않은 애정의 증거인 막내까지. 정말 완벽하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현실은 자살한 딸을 대신해 빌딩 청소를 하며 손자를 키우는 아줌마, 엄마와 생이별하고 유령처럼 사는 민성이, 다 큰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몸 성한 곳이 없는 할머니, 나이 마흔에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는 남자, 고작 열여섯에 벌써 삶에 지친 란이가 시어터진 김치와 묵은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다. 미화될 수 없는 삶의 진실이었다.

란이는 지금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클레어를 떠올렸다. 클레어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니까.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할 자격이 있다. 긴긴 겨울을 통과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185쪽)     


집이란 누군가 품는 사람이 있어야 온전해진다.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 정성으로 차려진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인생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미소 같았다.(172쪽)     


란이는 조요한 아이지만 힘이 있고 따뜻하다. 원망만 하고 있지 않고 차분히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나간다. 란이는 서서히 성장해간다.  

   

김밥을 계속 말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무작정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처음 김밥을 마는 순간에 힘을 줘야 한다. 김의 끝부분을 잡는 게 아니라 1센티 정도 앞에서부터 말아 줘야 한다. 그래야 잘 말린다. 이제는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쳐도 청주댁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고 김밥을 말게 되었다. 고작 김밥을 마는 일이라도, 잘하는 일이 생겼다는 게 기분 좋았다.(182쪽)  

   

란이의 눈에 할머니나, 옆집 아줌마나, 청주댁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찬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갈비 찌꺼기를 닦아 내고, 빌딩 청소를 하고, 김밥을 싸는 모습이. 그러나 이제 알았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없다는 걸.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열심히 사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자격 같은 건 없다.(182쪽) 

    

난 커서 뭐가 될까.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지는 게 없었다. 뭐가 되든 무책임한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그것 하나만 지켜도 좋을 것 같았다.(188쪽)     

     

란이만 성장하진 않을 거다. 민성이도 클레어도 성장할 거다. 클레어의 부모도, 민성의 엄마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대로 살 것을 강요한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도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지키고 있다. 무기력한 란이의 아빠도 성장할 수 있을까?     

 

란이가 마음속으로 클레어에게 말한다. ‘저렇게 당당한 척해도 마음 속에는 한없이 여린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안다. 나중에 커서 만나게 된다면, 그 여린 아이 또한 자라 있기를 란이는 바랐다.’     


나도 란이에게 말하고 싶다. 란이는 야무지게 당당하게 클 것을 안다. 그래도 주변에 좀더 란이를 잘 돌봐줄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 무기력한 남자가 빨리 책임 있는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잘 성장해나갈 것이고 어려움이 닥쳐도 극복할 것을 믿지만, 피임하는 법을 몰라서 정아 언니처럼 임신을 하거나 착해서 남을 봐주다가 힘든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이 된다.    

  

스스로 살아낼 수 있을 때까지 꺾이지 않기를, 당당히 자리잡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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