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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와동화 Apr 07. 2023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고려의 마지막 활자공이 되어 남길 말_국립중앙박물관

고려를 배울 때 활자를 만들어본다. 


"고려의 뛰어난 문화 유물이 뭐가 있지?"

"청자와 활자요."(이미 앞 부분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이들이 쉽게 대답한다.) 

"우리도 오늘 고려 사람처럼 활자 만들기를 할 거야?"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어떻게요? 활자가 어디 있어요?"

(내 가방 안에 있는 활자 만들기 재료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밖으로 나오고 싶을 테지만, 꾹 참고 있으라고 한다.)

"좀만 기다려 봐. 고려 공부도 좀더 하고 활자도 본 다음 할 거니까. 이따 박물관에서 활자 볼 때 잘 봐야 만들 수 있어."

기대감이 올라가면서 잠깐 집중력이 상승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근세관의 고려1실을 거쳐 고려2실에서 목판 인쇄와 금속 인쇄 영상을 보면서 두 활자의 장단점 등을 이야기하고 금속활자를 자세히 보게 한다. 고려 당시의 금속활자로는 개경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복(㠅)’ 활자 한 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단 하나 있는(남아 있는 금속활자는 2개인데 하나는 북한에 있다고 한다.) 그 금속활자가 우리가 만들 활자의 예가 되시겠다. 

활자 만들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간 쓰기가 좋아, 어디 한구석에 쳐박혀 비밀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고려의 마지막 남은 활자공이니까.


고려를 배울 때는 리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간다. 이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서 활자 공부를 하고 활자를 만들었으나 전시 내용이 바뀌고나서는 가지 않는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설명하면서 도자기와 활자 부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전시실이 있었는데, 전시 내용이 바뀌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상설전시로 3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3전시실 한국인의 일생'은 차이가 뚜렷하지만 '1전시실 한국인의 하루'와 '2전시실 한국인의 일 년'은 중복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데리고 설명해주는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아이들은 심지어 “아까랑 똑같은 곳이잖아요.” 하기도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오는 곳이니 이전의 우리나라 전체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시대사 공부를 할 때 국립민속박물관을 조선을 배울 때 생활사 부분으로 뒤쪽으로 넣었는데, 이때쯤 되면 어디서 많이 본 유물들이 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대체해야겠다는 생각을 슬슬 하고 있다. )


금속활자와 유사한(네모나다는 것만 닮았지만), 내가 밤새 적당하게 말려온 찰흙 활자를 꺼냈다.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은 아이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비장하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는 고려의 마지막 남은 활자공이야. 활자가 얼마나 귀중한지는 아까 배웠지. 몇 개 남은 귀한 활자로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새기는 거야."

아이들도 역시 비장한 나의 말은 아랑곳않고 문장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즐거운 놀이에 참여하듯 열심이다. 밤새, 찰흙을 잘 말려온 보람이 확 느껴진다.

한 명당 2개씩 파는 게 적당해서 글자 수는 인원*2로 한다. (2~3자 정도는 더 해도 된다.) 아이들 숫자에 맞춰 글자수를 정한다. 후보를 받고 투표를 거쳐 문장을 정하고 한 사람당 2개씩, 한 개에 한 글자씩 못으로 판다. 다 판 뒤에는 순서를 정해 차례대로 종이에 찍는다.

글자를 팔 때는 거꾸로 파는 게 핵심이다.


이 팀은 5명, 10~13자 안에서 문장을 만들었다.


1. 생명을 소중히 여겨라!

2. 나는 찰리푸스 러버.(글자 수가 적어서 후보에서 제외))

3. 그 누구보다 나를 아껴라!

4.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이길 수 있다.(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한 번 이긴다, 였으나 글자 수에 맞춰 이렇게 바뀌었다.)

5. 오빠는 절대로 나를 아끼지 않는다.(비슷한 게 있어 후보에서 제외)

6. 오빠와 나는 원수 사이다.

7. 인생은 한순간이다.(마음에 안 든다고 후보에서 제외))

8. 형제 자매는 (내 인생의) 적일 때가 있다.


후보로 선택된 5개로 거수 투표를 거쳐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이길 수 있다."가 선택되었다. "오빠와 나는 원수 사이다."나 "형제 자매는 적일 때가 있다."(오빠를 둔 아이가 말한 문장인데 이상하게 다른 아이들도 동의를 한다. 모두 현실남매인가 보다.) 가 될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아무래도 부모님들이 보시면 속상하실 수도 있으니까...










정성을 다해 활자를 찍었다. 처음 나누어준 공책을 다 갖고 왔다. 

이 팀은 수업하면 기분이 항상 좋다. 진지하고 깊이 있고 정성껏 수업에 임한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이길 수 있다.> 정도면 

"이런 문장으로 활자 만들기를 했어요."라고 기분 좋게 말할 수 있다.


"활자 만들기 해보니까 어땠어?"

"힘들었어요."

내가 원한 답이다.

"찰흙에다 두 자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 많은 글자를 금속에 한자로 그것도 뒤집어지게 만드는 건 얼마나 어렵겠니. 그러니 그들은 그 당시의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들일 거야. 그만큼 활자는 귀하게 쓰였고 덕분에 우리가 기록물을 볼 수 있는 거야."

이렇게 되면 활자 만들기와 같이한 수업이 성공이다. 이 팀과 수업을 하고나면 괜히 신나서 집에 간다.


그런데...

항상 원하는 방향대로 가진 않는다.

다른 팀인데,  "활자 만들기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하고 물으니, 

"이런 걸 왜 해요?" 한다.

"고려는 뛰어난 문화를 가진 나라야. 그 중에 활자술은 놀라울 정도지. 활자 만들기를 해 보면 고려에 대해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상냥하게 반복한다. 원하는 답을 구걸한다. 

"아, 힘들었어요."

"거봐, 힘들었지. 고려 활자공들은 더 힘들었겠지."

흐흐. 나는 답정녀.ㅋ


바로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문장으로 활자 만들기를 한 팀이 이랬다. 

이 팀도 5명이다.(원래 6명인데 1명은 사정이 있어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찰흙 활자를 꺼낼 때부터 분위기가 쎄하다.

"아, 찰흙 싫어요. 저번에 토우 만들기 할 때도 찰흙 싫었는데."

"다음에 찰흙으로 만드는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근데 왜 또 찰흙이냐고요."

몇 명이 찰흙 만지는 거 싫다고 징징거렸다.(열심히 하면서도 꼭 그런다.) 

"이번 찰흙은 다 굳은 거고 가공된 거라 저번 달과 달라. 손에도 하나도 안 묻고."

살살 달래면서 겨우겨우 이어나갔다. 으휴.


아이들이 후보로 말한 문장들이다.


1. 그냥 내버려두세요, 제발요!

2. 오늘은 쉽니다!(글자 수가 적어서 후보에서 제외) 

3. 인간은 나약하다.(글자 수가 적어서 후보에서 제외)

4. 포기는 노력한 자만이 할 수 있다.

5. 하나라도 더 먹고 죽자.

6. 맛있는 거 먹고 1분 덜 살자.

7.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8.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게 힘이다.

9. 치킨, 족발, 보쌈, 피자 먹고 싶다.

10. 홍삼인 줄 알고 먹었는데 족발 소스였다.(17자라서 후보에서 제외)


투표를 거쳐 만장일치로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가 선택되었다. 

아, 유행하는 가수인가?, 이런 의미없는 말을 만장일치로 찬성하다니... 하면서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찰흙 글자 파기에 몰두하게 했다. 아이들이 글자를 파다 나온 찰흙 밥이 바닥에 떨어질까 살피며(그러지 않아도 지나가던 박물관 관계자 분이 깨끗하게 쓰고 가라고 했다.), 잘못 판 것이 있으면 다른 걸로 교환해주며 마무리했다.

드디어, 완성! 

종이에 찍었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이...항상 제일 부정적이던 아이가 

바로 전에 "역사 포기할래요." 해서 "아니야. 조금만 관심 가지면 재미있어질 거야."했는데...

이 아이 혼자 진지하게 활자를 찍었다. 한달에 학원을 8개씩 다녀서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 역사 공부도 하기 싫다던 녀석이 갑자기 열심히 한다. (뭐지? 8개 학원 다니려면 너무 힘들겠다, 고 진심으로 공감해줘서 그런가?)

이 팀은 좋은 대학과 공부에 대해 부모님들이 신경을 좀더 많이 쓰시는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위의 문장과 같은 후보들이 나왔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래요, 하고.


그날 저녁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를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런 유래가 있었다.

[야매 트렌드 연구소]2023년 2월 트렌드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아, 문화 현상이었구나!

수업할 때마다 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팀이었다. 뭘 좀 쓰라 하면 이런 거 왜 쓰냐고 하면서 쓰고, 거의 토를 단다. 이 팀은 공부와 관계없는 걸로도 여러 번 토론을 해야 한다. 


수업 때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더 보고 가자.' 하고 들어가 슬쩍 하나 더 보려 하면 '약속을 지키라.'고 해서 전시실을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이들이었는데..., 어떤 때는 결과물이 좋지 않아서 속상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음료수로 꼬시고 노는 걸로 꼬시고 해서 수업을 이끈 적도 있었다. 


문화 현상에 대해 생각하다 

'이 아이들이 현재 문화 현상의 중심지에 있구나. 현재를 누리고 싶어서 징징대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녀석들이 나에게 투정을 부리는 거구나. 그러니 징징거리면서도 시키는 건 다 하지.(심지어 수업 끝나고 갈 때 자기네들이 만든 역사 송을 꼭 하고 간다.)

나름 자기 할 말을 하는 아이들이었구나. 징징대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필요한 거였겠지.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가 새롭게 보였다.

이 활자가 진짜로 남는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2022~23년의 문화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좋은 연구 소재가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유산은 우리 조상들의 삶이니 소중하다고 하면서 나는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문장에는 숨은 의미와 여러 상황이 들어 있는걸 나는 문장이 전하는 일차원적인 생각만 했던 거다.


"저기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로 또 하나 깨달았다.

고맙다, 얘들아. 

징징거려서라도 좀더 누려 보아라!! 좀더 놀고 좀더 즐기고 뉴진스의 콘서트도 가고! 


그래도... 수업할 때 조금만 덜 징징거리면 아이스크림 사줄게.ㅎㅎ 


다른 팀이 한 것(4학년 남자아이만 여섯)


1. 지구는 50억년 뒤에 멸망한다.

2. 대한민국과 북한은 통일되어야 한다.

3. 중국은 미세 먼지를 만들지 마라.

4.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겨야 한다.

5. 지구 멸망을 대비하라, 지구인들이여.

6.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이 발전해야 합니다.

7. 테슬러 주식을 사라.

8. 이 활자를 읽으면 후회합니다.

9. 민트 초콜릿이 세상을 지배한다.


시사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내용이 많다. 이 후보 중에 <이 활자를 읽으면 후회합니다.>로 했다.  ㅎㅎ

하필 후회하는 걸 선택했을까? 요 아이들도 공부 스트레스가 좀 있는 아이들이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별로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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