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민달팽이
비가 대차게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차가운 베란다 타일을 밟고서 저 멀리 학교 운동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이 웃통을 뒤집어까고 공을 차고 있었다. 어른들은 앞질러 부상이나 지독한 감기에 둘러싸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빗 속에 있었다. 마지막 골목을 주파하며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자, 가슴속 무언가와 영영 이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살이 나 으슬으슬 무기력해지는 것이 싫어서 구태여 무리하지 않는 아이였다.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었던지라 막무가내로 뛰어들거나 하는 일은 잘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 처박혀 있기엔 아쉬운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구석에서 외로웠던걸 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고독과 간절함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아무 곳으로 감동할만한 인상을 찾아 나선다.
온 마을이 흠뻑 젖은 날에는 마치 세계가 뒤집어진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미묘하게 달라진 흙냄새로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겠지만, 후각이 없이 태어난 나에게 주요한 차이란 언제나 채도와 명도로 구분되는 법이 있었다. 이제와 기억해 보면 차가워진 공기를 들이마실 때 점막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감각이나, 비가 두드리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 따위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꺼번에 달려들며 상황은 총체적이게 되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 가슴 뛰게 만들었다.
비에 젖은 흙을 특별히 사랑했다. 마른 흙. 말라서 콩고물처럼 날리고 여기저기 들러붙는 인색한 흙이 아니라, 촉촉하고 차갑고 영혼이 느껴지는 흙이 좋았다. 까만 흙에선 무엇이든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명도와 채도의 변화만으로 많은 것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데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변화는 기존의 성질을 새로운 축을 따라 나열하고 구분하는 일 없이 단지 나를 인상 속에 멈춰 세울 뿐이었다. 나는 행복을 느꼈고 모든 것이 깊은 땅 속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집과 집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따라 식물들이 자랐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큰 나무가 여럿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울창한 나뭇잎이 비를 막아주어 우비를 때리는 소리가 잦아들었고 공간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자연이 제공한 차음실에 머물며 나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바깥에는 거센 바람에 소용없게 된 우산을 원망하듯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있었고, 사나운 비 속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멈춰있는 스스로가 대조되었다. 그러자 나는 어떤 확실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순간 발 밑에 작은 반점들이 움직이고 있음에 알아차린다. 비가 직접 때리지 않는 평화로운 땅뙈기의 한 부분에서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흰 반점이 처음으로 인식되자 주변에 분포해 있는 반점들도 속속들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 허업‘하고 숨이 턱 막혔다. 기분 좋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생경한 장면에 매혹된 나는, 모두 알고자 하는 눈으로 흙바닥을 훑었다. 고개를 처박고 어정쩡한 자세로,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된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낯설게 된 지형도였다. 무슨 수를 써도 접속할 수 없는 생태가 눈앞에 펼쳐 치자 나는 전율했다. 비가 오면 땅에 물이 차서 숨을 쉬러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이전에 읽은 적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그 지식과, 지식을 떠받드는 여타 보조적인 지식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타구니 안 쪽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두 손으로 아랫배를 꾹 누르며 그 감각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고 싶어 동시에 눈을 감았다. 고독이 덮쳐왔다. 발 밑 세계는 나를 단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은 채 어설픈 접근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숲에 들어와 간신히 획득한 포근함이나 보행자와 스스로를 구분 짓는 은밀한 마음은 깜깜한 흙 위에 놓이자 의미를 퇴색하고 모든 영양을 빨려버리고 말았다. 흰 반점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만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조금씩 이동할 뿐이었다. 이토록 은밀한 빗속에서 그보다 더 은밀하게 운동하는 세계가 있다! 경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섣부른 걸음이 작은 존재들을 모조리 밟아버리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나에겐 무엇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떠한 요구도 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제멋대로 일을 진전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며시 발을 떼려고 했지만, 무언가 끈적한 것이 밑창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에 깨닫고 멈칫했다. 그 순간, 고성방가가 집중을 깨고, 골목 뒤로 사라졌던 무리가 아직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울타리 사이로 살짝 보였다. 오늘 하루 참 배려받지 못했다. 당장 죽어 사라져도 저 무리는, 그리고 나무와 비와 흰 반점들은 입력된 수축과 팽창을 기계적으로 도출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기분 좋은, 약간은 저차 한 소외감을 느꼈다. 빗방울이 닿는 다양한 표면들을 상상하며 물의 온도를 가늠하려던 것을 멈추고 이만 돌아가고 싶었다.
얼마나 서 있었던 걸까. 폭신해진 땅 위로 발이 잠기고 있었다. 발을 떼보니 새하얀 운동화에 보기 싫은 얼룩이 져서 무척 아쉬웠다. 그러자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몰두한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다가오는 법. 오염은 시간을 설명하는 고유한 방식을 가진다. 얼룩이 더 이상 지워지지 않게 되었을 때 누런 운동화는 오늘을 떠올릴 것이다.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선 선형적이지 않은 단위가 필요한 것이다. 자리에 피어난 경이와 시간과 함몰 그리고 고독을 증명함이란 이런 식이다. 이후에 그들이 민달팽이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종국에는 이름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긴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이를 대체하는 일은 없다. 집을 짓지 않는 달팽이라니? 나는 그러한 개념을 알지 못했지만 이름이 부재한 자리에 생겨난 리얼리티와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흙속의 민달팽이를 느낀다. 그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수축과 팽창에 집중하면 발 밑의 울렁거림을 전부 알 수 있다. 비 오는 날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관적으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