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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Oct 30. 2022

가장 오래된 서울의 이야기

서울의 풍경-1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겠지만 네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5 개로왕>


서울의 궁궐이라고 하면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을 떠오르곤 한다. 좀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경희궁을 읊기도 한다. 나는 서울의 궁궐이라고 하면 풍납토성을 떠오른다. 20년전부터 발굴된 조사 결과로 거의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으로 일컬어지는 토성이다. 

 고고학 조사결과 풍납토성은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투입되어 지은 성이다. 2000년의 세월을 버티고 버텨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흙을 단단히 다진 판축기법이라는 공법으로 지었다. 연인원 100만명 이상의 장정을 수세기 동안 판축기법이라는 건축기법을 통해 지은 토성, 풍납토성을 백제의 첫 도성 위례성으로 추정하고 당시 백제가 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는 위례성 함락 당시에 '북성'이 먼저 무너진 뒤, 이어 '남성'이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 북성을 풍납토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몽촌토성으로 추정하곤 한다. 고대 고구려와 신라의 도성은 평소 거주하던 도성-고구려의 경우 평양성, 신라의 경우 월성-과 외적의 칩입시 피난하는 피난성-고구려 대성산성, 신라 명활산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풍납토성이 평소 왕실이 거주하는 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해 보는 것이다.

 이 추정의 또 다른 근거 중 하나는 수운이다. 오늘날의 잠실대교 밑에 있는 잠실수중보에서 알수 있듯이 과거 서해에서 들어오는 바닷물은 밀물일 경우 현재의 잠실대교 근처까지 들어오곤 했다. 즉 바다를 통해 배를 띄우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서울 내 지점은 잠실대교, 그러니까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였다. 아차산이라는 한강 너머의 방어선만 제대로 구축한다면 경제적으로나 안보상으로나 유리한 위치였던 셈이다. 백제가 자신들의 왕조사에서 절반 가까이를 하남 위례성에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풍납토성을 갈 때마다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성 보다는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를 생각해보곤 한다. 역사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고 나는 언제나 인간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여자는 도미부인이다. 도미라는 남자의 부인이니 정확한 이름은 없다. 기록에는 그녀가 백제 개루왕때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데, 오늘날 학자는 위례성 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일 가능성도 점친다. 

오늘날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납토성의 전경.

 

그는 상당한 미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를 안 왕이 도미를 불러 은근히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냐고 하자 도미는 이를 부인한다. 왕은 도미를 비밀리에 가두고 부인을 부른다. 왕의 계획을 눈치챈 부인은 대신 자신의 종을 꾸며 왕의 침실에 들여보낸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왕은 도미의 눈을 뽑아버리고 배를 태워 강위로 떠나보낸다. 다시 부인에게 위협을 가한다. 부인은 핑계를 댄 뒤 몰래 도망을 가는데 강어귀에 다다라 건너가지 못하자 크게 통곡을 한다. 그러던 그의 눈에 배 한 척이 다가온다. 그 배를 타고 가니 도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는 이후 고구려로 넘어가 근근히 연명하고 살았다고 한다.  도미부부의 이 행적이 가지는 사료적 의미나 정치적 의미는 논할 가치는 없을꺼 같다. 나는 다른 부분에 신경이 쓰인다.

  누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어디까지일까.

 노동력이 생산력이었던 그 시기. 두눈을 잃었다는 건 사실상 생산활동을 모두 할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도미를 위해 부인은 왕의 요구를 거절했고. 몰래 도망나와 강 어귀까지 달려갔다. 틀림없이 밤이었을테다. 달빛이 한강에 밀려들고 뒤편의 도성은 떡하니 버티어 섰을 것이다. 어느 순간엔 왕의 경호대가 여자를 찾으러 부산대거나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들렸을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견디어낸 여자는 반대편에서 배가 다가옴에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렀다. 그 눈물은 살아났음에 대한 감사일까.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을까. 그눈물의 의미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사람이 사랑으로 채워진 순간이었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그녀가 어디서 배를 탔는지는 모른다. 팔당댐 근처에도 전승이 있고 충남 보령에도 민간 전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풍납토성 근처에서 배를 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풍납토성 근처에서 있어봤다면 그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풍납토성 근처를 가면 그 사람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풍납토성에서 어쩌면 그녀를 가지려 했던 한 남자. 개로왕을 다시 생각한다. 풍납토성과 아차산을 마주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지금은 금지됐지만 예전에는 풍납토성 위로 올라가는게 허용될 때가 있었다. 토성위로 올라가면 한강의 북쪽이 보인다. 광진교나 천호대교 근처에서 간접체험을 할수 있다. 그곳에선 자그만한 산 하나가 보인다. 아차산이다. 지금은 워커힐 호텔이 가로막고 있다. 과거에는 달랐다. 

 1600년전 백제의 한 왕은 밤새 그 산을 쳐다보았을 테다. 그가 개로왕이다. 역사 공부를 했다면 어렴풋이 기억할 이름이다. 고구려의 간첩 도림의 바둑 꾀에 넘어가 장수왕에게 도성을 빼앗긴 무능한 임금. 

 역사의 편린은 그를 그렇게 기록하지만. 실제로도 그랬을까. 나는 그를 역사의 가혹한 수레바퀴를 이겨내려 했지만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개로왕의 인생은 백제의 한계를 오롯이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 비유왕은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있는 인물이지만. 동시대 사료로 부를 수있는 일본서기에는 아예 이름이 없다. 백제왕실의 혼란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도림의 말에서도 당시 백제의 혼란했던 상황이 엿보이는데 도림은 개로왕을 꼬시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굴러다닌다는 표현을 쓴다. 기록의 한계로 정확한 상황은 알수 없지만, 당시 백제가 상당한 내분상태였다는 의미다. 오죽하면 아버지 무덤이 만들어진게 개로왕 재위 21년때다.

 사실 백제의 내분은 왕조내내 계속된 문제이긴 했다. 외부에서 내려온 백제 왕실과 지역 토착민들이 우세를 보였던 귀족층은 왕조 내내 화합 보다는 경쟁과 갈등의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게 극적으로 나타난 게 의자왕의 항복 전후의 정황이다. 그리고 고질적인 병폐를 가장 잘 이용한게 고구려.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다. 이들은 백제가 내분 상태일때를 골라서 남하를 했는데 결국 이때문에 백제는 한강유역 이북의 거점을 상당부분 상실한다.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 석촌동 고분군. 석촌(돌마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무덤에서 나왔다. 

 이후 풍납토성은 큰 규모로 개축된다. 개로왕은 이 토성에 흙을 구워 만든 기와를 둘렀다고 한다. 말 그대로 방어력을 높이려는 조치였다. 문제는 풍납토성 방어의 제1선 고지인 아차산이 고구려 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 있었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가져간 뒤 보루를 쌓고 풍납토성을 감시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한다. 

 개로왕은 고구려가 쌓은 아차산 보루를 매일 밤낮으로 봤을 것이다. 그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불안감과 초조함.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자신을 따르지 않는 백제 귀족들에 대한 분노. 섭섭함. 편안한 감정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분노와 불안감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당시 중국 왕조인 북위에 요청하는 문서에서도 드러난다. 이 문서에서 그는 북위가 군대를 파병하면 자신의 딸을 북위 궁궐로 보내 청소를 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비굴한 모습 보다는 아차산 보루를 보면서 불안감과 초조함에 몸부림 치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북위는 개로왕의 청을 거절했고. 고구려는 3년 뒤인 475년 대대적으로 풍납토성을 공격해온다. 아차산 보루의 횃불이 하나였다가 두개가 되고 다시 4개가 되고. 그렇게 수만개가 됐을것이다. 개로왕은 그 횃불을 봤을 것이다. 

 패배를 직감한 개로왕은 동생인 문주-기록에 따라서는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난 동생으로 본다-를 불러 도망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책임을 지고 죽을것이라고 한다. 문주가 도망가는 시간을 버는 동안 풍납토성은 함락됐고. 불타올랐다. 오늘날 지층에 그 흔적이 있다.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끌려가 목이 잘린다. 아차산은 개로왕의 무덤인 셈이다. 

 나는 풍납토성과 그 근처를 갈때마다. 세상의 운명에 저항하려 했던 한 여자와 한 남자를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했으나 여자는 성공했고, 남자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를 칭찬하고 남자는 비판할 수 있을까? 내가 2000년을 거쳐서 살아남은 풍납토성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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