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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01. 2022

그의 목은 한강을 건넜다.

서울의 풍경-4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제1차 왕자의 난(1398)으로 모든 권력을 잃은 이성계가 2년 뒤 세자 신분이던 이방원과 만났을 때 일이다. 이성계는 대뜸 이방원에게 조온을 시작으로 조영무 이무까지 총 3인의 처벌을 요구한다. 실록은 이성계가 "조온과 조영무는 내 밑에 있었는데 나를 배신했고 이무는 이쪽저쪽을 오가며 박쥐처럼 행동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 사람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 편이긴 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에서 핵심 인력은 반란군의 주력을 이끌었던 안산지사 이숙번, 기본계획을 짠 하륜, 그리고 이방원 편에 선 민 씨 형제를 비롯한 고려 구 귀족층,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었던 이화를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이었다. 이성계는 2년 , 핵심이 아닌  하위 실무자급인 조온과 조영무, 그리고 이무를 콕 집어 처벌을 요구했다. 이성계는 왜 그랬을까.

 경복궁 동쪽에 서있는 동십자각. 맞은편에 있는 트윈트리 타워 일대에서 정도전이 죽었다. 카카오맵


의문의 답은 경복궁 동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동십자각을 마주 볼 때 풀린다.


기록에 의하면, 정도전은 1398년 8월 송현방에 있는 남은의 첩 집에 머무르다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한다. 송현은 오늘날 경복궁 동쪽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다. 송현방은 이 일대 명칭이다. 즉. 과거 한국일보 사옥이자 오늘날 트윈트리 타워가 있는 곳이 송현방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죽었다. 그 맞은편에 동십자각이 있다. 동십자각은 말 그대로. 경복궁 동쪽에 십자 모양으로 세운 망루였다.  조온은 이 동십자각을 지키는 왕실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이무 역시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왕실 근위대는 이성계의 사병이었던 가별초가 핵심이었다. 조온과 이무는 이 왕실 근위대의 대장들이었다. 왕실 근위대는 아니지만 조영무도 가별초 출신이다.  동십자각을 지키고 있던 가별초 병사들의 눈에 남은의 첩 집으로 달려가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안 보였을 리 없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기 전, 이웃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화살이 날라들고 불이 치솟는 광경이 상관에 보고가 안 올라갔을 리 없다. 보고가 이성계까지 갔다면 당연히 근위대를 출병시켰을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의 죽음이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군권을 가지고 있던 정도전이 조기에 사망하면서 이방원 측이 승기를 잡았다. 정도전이 죽기 전 이성계가 근위대를 출병시켰다면 난은 조기 진압당했을 것이다. 근위대가 정도전의 죽음을 보면서도 방치했던 건 조온을 비롯한 근위대 장교들이 이방원에 이미 포섭당했음을 의미한다.

 이성계가 조영무를 포함한-조영무에 대해 이성계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키웠지만 나를 배신했다"라고 분노를 표시한다- 세 사람의 처벌을 요구한 건 사병혁파가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이방원 진영 내 무장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려 내부 균열을 노린 정무적 판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도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감정적 처사이기도 했다.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된 직후 정도전의 처벌을 공식화하는 문서에 서명하다 "목에 뭔가 막혀 내려가지 않는다"라고 절규한다.


 그래서 나는 동십자각을 지나갈 때마다 정도전의 죽음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냉정하게 지켜봤을 이방원을 생각하곤 한다. 기록은 담담하게 이방원이 정도전을 참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하나를 더 생각하곤 한다. 그의 무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은 자신의 책 '동국여지지'에서 "과천현 동쪽 18리에 정도전의 무덤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과천현의 동쪽에는 우면산이 있다. 198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은 우면산 일대에 있는 무덤들을 발굴 조사했는데 머리만 남은 유골과 질이 좋은 조선 초기 백자 파편이 발견됐다고 한다. 참수당한 정도전의 머리가 유력하지만 확정적이진 않다. 그래도 나는 이 무덤이 정도전의 무덤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동십자각을 지나갈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왜 이방원은 정도전의 목을 한강을 건너 묻게 했을까?

 지금의 트윈트리 타워에서 추정 정도전의 무덤이 있는 양재동까지의 거리만 직선거리로 10km가 넘는다. 한강도 건너야 한다. 지금처럼 다리가 놓여 있지 않았을 테니 유족들은 정도전의 목을 담은 상자를 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아도 당시 한양도성 밖에는 얼마든지 시체를 버릴 장소들이 널려있었다. 도성 안을 따진다 해도 인왕산도 있고, 북한산도 있었다. 아니 더 나아가 이방원은 '왕자를 죽이려 했던' 정도전의 목을 묻어 묘소를 만들어 달라는 유족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방원의 손자였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죽인 김종서의 사지를 찢어버렸고 시체는 수습되지 못했다.


  정도전의 목이 한강을 건너 양재동에 묻혔다는 건,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을 역적이 아닌, 정치적 패배자로만 생각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정도전의 후예들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아니었을까. 이방원은 이후 정도전의 죄를 풀어주지는 않지만, 그의 아들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허락한다.  무릇 나 자신이 단단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정도전의 목이 한강을 건너게끔 허락한 이방원에게서 자신감 있게 세상을 대하는 사람을 본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묘소인 헌릉.  


 정도전이 죽고 난 뒤 24년이 지난 1422년, 태종 이방원은 창덕궁 이궁에서 죽는다. 24년 전 목만 건넜던 정도전과 달리, 이방원의 시체는 온전히 한강을 건넌다. 이방원은 내곡동 일대 산 중턱에 영면한다. 오늘날 헌릉이다. 이방원은 죽기 전 자신의 자리를 아버지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건원릉에서 한참 떨어진 한강 이남으로 잡았다. 그는 아들 세종이 먼저 죽어 헌릉에 묻힌 원경왕후를 기린다며 인근에 사찰을 세우려 하자 "내가 좀 있으면 들어가는데 사찰을 세울 수는 없다"라고 반대할 만큼 자신의 묘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런 이방원은 묏자리를 잡을 때 정도전의 무덤을 생각했을까. 정도전의 무덤과 이방원의 무덤은 직선거리로 5km 떨어져 있다.


ps) 이성계의 요구로 이방원은 조온과 조영무, 이무를 귀양보내지만 곧 신하들의 반발을 명분삼아 석방시킨다. 가장 먼저 세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람은 권근인데 이방원으로부터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마자 석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전 03화 정도전은 왜 경복궁을 비틀어지게 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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