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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Sep 17. 2022

그곳에 왕이 있었다.

서울의 풍경-2

"이제현(李齊賢)이 말하였다.

 '군주가 천명만 믿고 자기 마음대로 제멋대로 법도를 무너뜨리면, 비록 천명을 얻었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잘 다스릴 때에도 환란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도 위기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하늘이 주시는 복을 기다려야 한다. 현종(顯宗)같은 분은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이도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5. 현종에 대한 이제현의 평가>


철도가 뚫리고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오고간 통로는 거기서 거기였다. 터널을 뚫고 교량을 놓기 어려우니 사람들은 옛사람들이 걸어간 길과 나루터들을 계속 이용했다. 과거 옛지도를 보면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는 직선으로 그어져 있다. 현재처럼 굳이 도로를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강의 나루터도 그러했다. 그래서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가는 나루터는 몇 되지 않았다. 그 중 광나루가 있다. 오늘날의 광진교 일대다. 광나루를 거쳐 현재의 강동구를 넘어 광주와 이천. 장호원 등으로 향하던 길이다.


서울시가 제시한 한강 유역 나루터를 이용한 역사 탐방로. 1번이 광나루길이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이다. 고구려 사람도 백제도 신라도 고려도 조선 사람들도 지나갔을 테다. 그 모든 이를 추억하긴 어렵다. 나는 광진교를 지나갈때 마다 모든 이를 추억하지는 않는다. 천 여년전 겨울 조심스럽게 얼음 투성이 강물을 건너가던 한 사람을 생각할 뿐이다. 고려 8대 임금이었던 왕순. 현종이다. 


 현종은 왕건의 손자와 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세시대의 '금수저'나 마찬가지지만 불륜에 의한 출생이었던 게 문제였다. 아버지 안종과 어머니 헌정왕후는 각기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서로 사랑했다. 현종이 태어나기 전 두 사람의 불륜이 들통났고, 국왕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낸다. 그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은 후 사망한다. 태어난 현종은 잠시 궁궐에 있었지만 성종의 배려로 유배간 아버지한테로 간다. 불과 3년 뒤 아버지 마저 죽었다. 태어난 지 3년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고 이렇다한 후원세력도 없게 된다.


문제는 왕건의 직계혈족이 그밖에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왕건 사후 왕족들간 벌어진 내분의 결과 대다수의 왕족들이 살해당하거나 급사했고, 현종이 장성한 시점에서는 왕건의 직계 혈족이 성종의 조카였던 목종과 현종 단 둘뿐이었다. 거기다 목종은 아들이 없었다. -기록은 그를 동성애자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목종이 죽으면 왕위는 현종에 돌아가게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왕위계승권자가 됐지만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현종의 이모이기도 했다-는 현종을 증오해 죽이려 들었다. 현종은 북한산 서편의 진관사에서 승려로 살아가며 천추태후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한다. 

 위험의 순간이 여러차례 지나간 뒤 지방 군벌인 강조가 반란을 일으켰고 현종을 왕위에 올린다. 그 직후 거란의 요나라 성종이 이를 문제삼아 처들어왔고 맞서싸운 강조가 패배하자 현종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40여길간 피난길에 오른다. 한국 역사에서 왕이 자발적으로 피난길에 오르는 첫 사례다.


 나라가 세워진지는 이제 고작 80여년이었고 견훤과 궁예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생국가 고려는 현종의 대에서 끝났을 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마음놓고 후원자가 사라진 현종을 공격했다. 요성종은 침략명분을 강조의 쿠데타와 현종의 즉위에서 찾았기 때문에 현종으로서는 친거란측 인사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는 도망가면서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기록은 현종을 호위하는 군사는 불과 십여명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종은 1010년 섣달 그믐에 개경을 떠난다. 양주에 도착했을 때 거란군은 개경 도성에 진입했다. 양주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현종의 눈에는 불타는 개경이 보였을 것이다. 양주의 호족들은 수도를 잃어버린 왕에게 박한 대접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궁예가 죽은지 채 10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기록은 한 호족이 현종에게 "너는 나의 이름을 아느냐"고 거만을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위하는 군사는 50여명이 채되지 않았고. 그들을 이끌던 사람은 평양에서 도망 나온 지채문이라는 장수였다. 군사도, 장수도, 그리고 왕도 서로를 믿기 어려웠다. 몽진를 외치던 신하들도 왕을 따르지 않았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은 가장 먼저 왕이 개경에서 떠나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인데 이때 같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왕의 곁에는 왕후 2명만이 같이 있었고 한명은 임신중이었다.


앞에서 말한 양주의 호족들이 왕을 공격했다. 가까스로 왕과 지채문 그리고 채 50명이 되지 않는 군사들은 도망쳐 나와 북한산 아래 도봉사로 향한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광나루다. 광나루를 넘어가면 거란군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지채문이 나서 주위 정찰을 가겠다고 왕에게 청한다. 왕의 나이 18살이었다. 갑작스럽게 떠맡은 왕위였다. 시작하자마자 수도를 떠나야하는 상황, 호족들이 자신을 끌어내리려 공격해왔고 신하들은 도망갔다.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했던 장수가 이제 정찰을 하겠다며 곁에서 떠나겠다고 청한다. 


 기록은 이때 왕이 주저하는 빛을 띄자 지채문이 다시 청을 넣었고 왕이 마침내 허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18살의 왕이 그때 느꼈던 심정은 나는 감히 어림짐작하지 못하겠다. 지채문과 떠난 왕의 일행은 한강으로 향한다. 1010년에서 1011년으로 넘어가던 한겨울의 그날. 현종은 한겨울의 추위속 광나루로 향했다. 지채문은 왕을 배신하지 않았다. 정찰을 나간 그는 왕을 호위하러 오던 하공진을 만나 데리고 온다. 하공진은 광나루 앞에 있었을 왕에게 말했다. 추격하는 거란군를 제가 저지하겠다고. 


  하공진이 거란왕을 만나고 있었을때. 거란 선봉부대와 현종간의 거리는 수십여리밖에 되지 않았다. 하공진

은 거란왕에게 현종이 수백여리 밖에 있다고 뻥을 쳤고 거란왕은 이 거짓말을 받아들여 철군한다. 바로 이 즈음 현종은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위기가 목전에 있고. 적의 손길이 어름푸릇하게 있었을때. 18살의 청년은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강의 푸르른 물결을 보고 있었다.

  그때 현종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어림하기 어렵다. 다만 생각할뿐이다.

  

북한 개성에 있는 현화사비. 현종 재위기간에 세워졌고 그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삶이란 도전과.응전의 연속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그 도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길이 갈린다. 현종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의 행동이나 말 하나 하나 중 어느 하나만 잘못되었더라도 왕은 물론이여 고려라는 왕조도 무너질 수있었던 순간이었다. 한번도 타인의 신뢰를 받지 않았던 왕은 이 순간, 타인을 신뢰하며 이 위기를 넘어갔다. 마치 얼음이 낀 광나루 터를 조심스레 넘어갔듯이

 그는 다가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위협에 맞섰다. 이때뿐 아니라 그의 삶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궤적이다. 나는 그 궤적의 시작이 이때 나타났다고 본다. 흔들리는 신하에 대한 믿음. 자신의 판단에 대한 신뢰. 세상에 대한 굳은 의지. 그 모든 것이 어느 한 시점부터 피어올랐다. 나는 이 시점이 지채문과 하공진을 만났을 때라고 본다.  

 거란의 2차 침입이 끝난 뒤 가까스로 돌아온 현종은 그 뒤 놀라운 행적을 보인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감찬을 적극 칭찬하며 요직에 기용했고, 조원, 강민첨 등 전쟁기간 각 자리에서 열심히 싸운 장수들을 등용했다. 왕실 직할지가 큰 피해를 입어 부하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주지 못하면 시문을 내리거나 자신을 반성하는 교서로 달랬다. 중간에 무신들이 급료가 부족하다고 난을 일으키는데 이를 진압했지만 적극 참가자들만 처벌했고 단순 참가자들은 모두 방면시켰다.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 현종이 승려 시절 여기에 묵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간사에 있어 많은 배신과 실망을 봤을것이 분명한 현종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타인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다. 선택의 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느꼈다. 10 여년뒤 벌어진 거란의 3차칩입에서 현종은 고려군을 피해 남하한 10만 거란군으로 포위된 개성에서 항전을 택한다. 주력부대가 모두 나가있어 개경 내에 채 만명도 되지 않은 병력만 있었음에도 내린 결정이었다. 주위 중신들에게서 피난 건의가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종은 10년전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 이 선택은 무모함이었을까 아니면 객기였을까. 나는 둘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선택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마주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이다. 그때도한 겨울이었고, 개경의 성벽 위에 서있던 현종의 마음은 8년 전 한겨울의 그 광나루를 넘어가던 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의 이 선택은 보답을 받았다. 식량이 떨어진 거란군은 철수했고 귀주대첩에서 전멸한다.  결국 나는 광진교를 갈때 마다 현종을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곳에 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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