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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Jul 31. 2022

정도전은 왜 경복궁을 비틀어지게 지었나.

서울의 풍경-3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 9월 9일 병오 2번째기사>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후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다음과 네이버 '지도'에 청와대가 표기됐다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때까지는 국가보안시설로 정해져서 청와대 본관도, 비서진들이 근무하는 여민관도, 대통령 관저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 영역이 풀렸다.

 

경복궁과 청와대 전경 청와대 본관 정면이 경복궁 중심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다면 의문점이 하나 일어난다. '왜 청와대와 경복궁은 틀어졌을까?' 다. 첨부한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광화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근정전으로 향하는 경복궁의 중심축은 청와대 본관이 아닌, 비서진들이 근무했던 여민관을 향한다. 그리고 그 선을 죽 그으면 대통령 관저다. 청와대 본관은 이 축선에서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경복궁의 축선과 상관없이 지어졌을까? 그건 또 아니다. 청와대 본관에서 죽 선을 그으면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이 나온다. 이 신무문 뒤로는 회랑이 놓여졌고 끝은 근정전이다. 말하자면 근정전에서 '나뭇가지'가 하나 갈라져 나와 신무문으로 향하고, 이 신무문에서 다시 직선으로 뻗으면 청와대 본관이 나오는 셈이다.

청와대와 경복궁의 자리 배치도, 붉은 원이 신무문이다.

 청와대 본관은 왜 이 위치에 지어졌을까? 본관은 왜 하필이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마주보게 지어졌을까? 경복궁의 정면인 광화문 바로 뒤가 아니고 말이다.

 청와대 경호처가 만든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책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정남향에 (청와대 본관이)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1년 노태우 정부는 20여명의 전문가들 논의를 거쳐 북악산 정남향에 청와대 본관을 지었다. 실제로 청와대 본관의 사진을 보면, 본관 뒤에 바로 북악산이 자리잡고 있다. 웅장한 청와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청와대 본관. 북악산 정남향에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청와대는 왜 경복궁과 틀어져 지었느냐가 아닌,  왜 경복궁은 '북악산'과 틀어지게 지어졌을까로 바뀌어야 한다. 왕조시대, 국가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왕의 거처인 궁궐의 위치는 당연히 '주산'의 정남향이어야 한다. 청와대 본관이 원래 근정전이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이를 무시하고 지금의 위치에 근정전과 경복궁, 그리고 광화문을 지었다. 왜였을까.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줄 단서는 신무문이다. 앞에서 청와대 본관의 정면에 신무문이 있다고 했다. 북악산의 정남향에 청와대 본관이 있었으니. 신무문은 북악산의 정남향 연장선상에 자리잡은 셈이 된다. 이 신무문은 근정전에서 왼쪽으로 15도 가량 틀어져 올라가야 나온다.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정도전이 처음 경복궁을 만들었을 때, 신무문은 없었다. 궁의 뒤편은 목책으로만 둘러져있었다. 그 뒤로는 후원이 펼쳐져있었다. 신무문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종때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고려왕조의 별궁인 남궁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숙종시절에 북악산 밑에 왕의 별궁을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려 남궁이다. 오늘날의 청와대 자리다.

  위에 있는 기사대로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말한다. 고려왕조 궁궐의 터는 좁아서 그보다 밑으로 내려와 방향을 다시 잡아 궁궐을 세웠다고. 이게 바로 경복궁이다. 왕조가 바뀌었으니 전 왕조 고려의 건물들은 부수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의 자취는 주춧돌은 그리고 거리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고려의 궁궐이었으니 궁궐 밖에도 도로가 있었을 것이고, 그 도로를 통해 사람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을 지으라고 명령하기 전 고려남궁을 새궁궐로 쓰기 위해 보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경복궁 북쪽의 신무문이 근정전과 직선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고려 남궁의 흔적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고려남궁의 정문이 무너지고 난 뒤에 경복궁의 북문으로 자리잡은 건 아닐까? 신무문이 지어지기 전 목책만으로 경복궁 뒤쪽을 구성했을때도 이 지역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위한 통로는 필요했을 테고 사람들은 익숙한 길로 다녔을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신무문이 지금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북악산 정남향에서 출발한 '직선'이 향하는 곳이다. 청와대 본관과 신무문, 근정전을 거친 선은 바로 남산을 향한다. 나는 이 선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직선은 고려왕조가 만든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고려의 '선'이었다.

 그렇다면, 정도전과 이성계는 고려왕조가 만든 이 ‘선’을 의도적으로 틀었다는 뜻이 된다. 정도전이 의도한 경복궁의 축선은 어디로 이어질까. 정도전이 새로 만든 ‘선’은 근정전과 광화문을 거쳐, 숭례문을 지나 관악산으로 향한다. 고려왕조의 남궁이, 또 청와대가 ‘남산’을 향했다면 조선은 ‘관악산’을 향했던 셈이다.

 고려시절의 서울의 중심 축선은 북악산-남궁-남산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리고 고려를 타파하고 들어선 조선은 이 선을 없애고 싶어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 들어선 권력은 과거를 지우는 것으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 한다. 600년전 정도전과 이성계도 별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정전 정면, 북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도전과 이성계는 관악산에서 출발하여 숭례문을 거쳐, 광화문과 근정전에 다다르는 새로운 '축선'을 개발했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근정전 뒤에 근사한 북악산이 오지 않더라도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기 위한 어쩔 수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개창 599년 뒤인 1991년, 민주주의 정부는 공교롭게도 북악산 정남향에 본관을 배치한다. 나는 이 위치가 고려남궁의 정전, 즉 고려의 '근정전' 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무문을 고려남궁의 정문이었다고 가정할 경우 본관이 정전일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정부가 이를 인식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30년 뒤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으로 국가 권력의 핵심 포스트는 이 곳을 떠난다.  고려가 궁궐을 세우고, 조선이 그 터를 없애고 다시 궁궐을 세우고, 대한민국이 그 뒤에 청와대를 짓고, 떠났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마주볼때마다 고려와 조선, 대한민국의 풍경을 생각해보곤 한다. 역사란 이렇게 되풀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반복되기도 한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는 그 생각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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