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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03. 2022

호랑이가 쓰러진 날

서울의 풍경-5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세조가 천천히 양정 등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흔들게 하여 돌아와서 돈의문에 들어가, 권언 등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 10월 10일 1번째기사>


대한민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반복된 장면은 무엇일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김종서가 철퇴에 쓰러지는 장면이다. 어린 왕의 뒤에 서있던 늙은 대신이 야심만만한 왕의 숙부에게 피습을 당하는 순간은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졌고,  이를 다루는 시선도 천차만별이다. 단종의 편에 선다면, 김종서의 죽음은 세종과 문종의 뜻을 받들던 충신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순간일 것이고, 세조의 시선에서 본다면 왕실을 무력화하려던 권신의 최후일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 중 무엇이 완벽한 진실인지는 우리는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실과 사실이 중첩된 공간이다. 다만,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오늘날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내려 5번출구로 나와 경향신문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농협박물관이 보인다. 그 앞 자그만한 연못터가 옛날 김종서의 집터였다. 그러니까, 569년전, 이 곳에서 김종서가 철퇴에 맞았다. 무수한 드라마와 영화가 그려냈던 그 장면이 벌어진 장소가 그곳이다.  


농협박물관, 김종서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다.

 김종서의 옛 집터이자 지금의 농협박물관은 조선시대로 따지면 한양도성 밖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양도성의 서쪽문인 '돈의문'은 지금의 경향신문사 앞이자 삼성서울병원 앞 사거리에 있었다. 근처에 있는 지하철 5호선 전철역이 서대문역인 이유가 이때문이다.


  세조의 주장대로라면 김종서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권력을 가진 권신인데 이 권신의 집이 한양도성 밖에 있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무총리 관저가 서울 넘어 고양에 있었던 셈이다. 김종서는 왜 여기에 집을 지었고 머물렀을까?

 여려 해석이 가능하다. 그 중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김종서가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즉 서북방의 최신정보를 가장 먼저 알려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반도의 서북쪽 끝인 의주에서 출발, 평양과 해주, 개성을 잇는 도로는 오늘날의 구파발과 은평, 무악재를 지나 현재의 서대문역으로 진입해 돈의문으로 들어갔다. 오늘날의 1번국도와 거의 유사하다. 김종서의 집은 이 도로가 돈의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해있었다. 서북방의 상황을 알리는 파발이 돈의문을 거쳐 도성에 들어가기 전에 김종서의 집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북방영토 개척이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김종서로선 서북방. 더나아가 북방 지역의 변고를 눈치채는게 굉장히 중요했을 확률이 높다. 더구나 당시는 토목의변-명나라 황제가 몽고군대에 포로로 잡힌 사건-으로 명나라가 혼란스럽던 때였다. 김종서는 토목의변 직후, 세종의 명령으로 급거 평안도로 향하는데 이는 누가 보더라도 중원대륙의 혼란이 미칠 파장에 대한 대비다. 김종서는 이 때문에 세종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실록은 그가 세종이 죽은 직후 빈소로 찾아와 곡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어도 김종서의 시선은 계속해 북방을 향해 있었을 확률이 높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돈의문(서대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직후 이 문을 건너 단종에게 갔다.


 김종서가 북방의 변고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시선에 따라 시점은 다르다. 김종서를 권신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전력이 강했던 서북방 군의 동향을 쥐려고 했던 조치로 본다. 반면 왕실을 지키려는 충신의 관점에서는 어지러운 시대에 군의 동태를 살피려했던 노신의 충정으로 이해한다.

  나는 다른 부분을 생각하고 싶다. 도성 밖에 집을 두었던 김종서의 깊숙한 내면이다. 김종서는 순천 김씨였다. 순천 김씨의 시조는 궁예다. 왕건과 반목했던 그 궁예다. 고려왕조 말기의 권문세족 대다수가 조선왕조 초창기 지배층으로 바뀌지만. 그 권문세족에 순천김씨는 해당하지 않는다. 순천 김씨는 순천 지역의 호족이었다. 김종서는 순천 김씨 가문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컸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추(金陲)는 도총제를 지냈지만, 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배규(裵規)역시 실록에 단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반면 김종서는 세종실록에서만 629번 등장한다. 그만큼 세종의 총애를 얻었고, 또 부림도 당했다. 김종서의 출세는 당시 조선이 인재등용에 있어 상대적으로 연줄을 덜 보았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의 특징 중 하나가 이 인재등용의 과감성인데, 김종서 보다 두 세대 정도 위에 있다고 할 수있는 정도전, 그리고 그보다 십여살 어린 이방원 모두 비주류로 관직 등용을 시작했다. 김종서의 전임인 황희 역시 가문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승진한 케이스다.


야연사준도, 북방개척 당시의 김종서의 일화를 그린 그림

 이 인식을 생각하고 다시 본다면, 김종서의 집은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리고 그 성공의 발판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다. 이렇다한 가문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한 김종서는 그 성공의 기준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세종과 문종. 단종에.대한 충성은 김종서 본인의 성품 때문일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기존 질서에 대한 옹호로도 보일 수 있다. 김종서와 같은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황보인도 당시 중앙정계의 주류인사하고는 약간 결이 달랐다. 이건 사실 세종의 용인술이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세종은 주류계층과 약간 떨어져있으면서 경험을 많이 쌓은 관료층을 중시했다. 황희가 대표적이다.  세종이 황희를 중용한 건 그의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주류 인사를 중용해 주류 계층을 견제하려고 한 용인술의 한 측면으로도 이해해야한다. 김종서의 등용은 이 용인술의 연장이다.

 이를 깨먹고 끼리끼리 문화로 돌아간게 바로 세조다. 그의 측근이었던 한명회. 신숙주. 권람 모두 당대 최고 가문의 2세들이었다. 음서로 승진한 한명회와 권람은 둘째치고, 신숙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세조는 자신과 동류인 귀족가문의 자제들을 끌어모아 비주류 핵심 인사들을 쳐낸 것이다.

  앞에서 김종서를 권신으로 봐야할지, 충신으로 봐야힐지 단정할 수없다고 했다. 하지만 한가지는 명확하다. 세조가 김종서를 죽임으로 인해서 왕조의 용인술은 그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귀족계층의 2세들을 중용했던 세조는 김종서와 같은 비주류 인사들을 중용할만큼 안목과 도량이 없었다. 세조를 둘러싼 많은 비판은 그가 명분없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을 죽였다는 데 집중해 있지만, 더 깊숙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세조의 이후 행보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과 친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만 등용했다. 세조는 스스로 자신의 통치 영역을 좁혔다. 그리고 이것을 영웅의 풍모라고 자찬했다.

 나는 역사에서 도덕적으로 누군가를 질타하는 것이 꼭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살아가다보면 선악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필요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교훈으로 얻을 수 있느냐다. 여기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면 가끔씩 틀린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김종서 집터를 지나갈 때 마다 소년 군주를 지키려다 비명횡사한 한 노대신의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선왕조의 용인술이 무너지고, 그 항로가 틀어졌던 시점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전 04화 그의 목은 한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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