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형 Aug 03. 2022

왕은 호구였고, 신하는 위선이었다.  

서울의 풍경-6

왕이 전교하기를,

"김취인(金就仁)·정성근(鄭誠謹)을 함께 처형하여, 머리를 철물전 앞 다리에 매달라."하고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성근은 간사한 생각, 거짓 충성으로 은밀히 아첨하는 생각을 가지고, 시제(時制)를 어기어 가며, 3년간 소식(素食)을 한 죄이고, 취인은 용렬한 무리로 국사를 생각지 않고 헛소리를 부연하여 수령(守令)에게 말한 죄이다. 이것을 찌에 써서 달아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윤4월 15일 1번째 기사>


연산군 시절, 연산군의 명으로 죽은 신하중에 정성근이라는 사람이 있다. 연산군이 정성근에게 붙인 죄목은 아버지 성종이 죽자 3년상을 치른 것이었다. 연산군은 정성근을 죽이면서 '간사한 생각, 거짓 충성'이라고 했고, 그의 목밑에 그렇게 죄목을 달으라고 했다. 정성근을 향한 연산군의 분노섞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연산군이 붙인 이 죄목은 납득하기 어렵다.  자청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3년상을 치를 정도로 충성을 다한 신하를 연산군은 왜 분노에 차서 죽였을까. 가장 간단한 답은 연산군이 미쳐서다. 정성근이 죽었을 때는 갑자사화 와중이었으니 어미의 '피묻힌 적삼'을 보고 미쳐버린 연산군이 말도 안되는 죄목을 갖다가 붙여 정성근을 죽였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치부하고 넘어가긴 어렵다. 연산군의 감정에 상당한 분노가 섞여있엇다.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정성근의 목을 3일 동안 도성에 내걸었고 그뒤에도 몇번이나 정성근의 죄가 씻을수 없는 중죄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연산군은 왜 정성근에게 감정적인 분노를 가졌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창경궁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궁궐의 깊숙한 곳에 있는 한 전각으로 가야한다. 통명전이다. 성종이 재위 15년인 1484년, 자신의 숙소이자 연회등에 쓸 목적으로 지었다. 깊숙한 곳에 있다보니 눈에 띄기 어렵고, 물가의 곁에 있어 시원한 장소다. 성종은 전각을 지은 다음해에 전각 옆에 연못을 하나 팠는데 궁궐 내의 샘에서 떠오르는 물을 구리 수통으로 연못까지 연결했다.  


 이 구리 수통이 문제가 된다. 이를 두고 정성근등이 왕에게 "사치의 조짐이 보인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때뿐 아니라 정성근은 성종 시절 주로 대간직을 역임하며 왕의 행위를 비판하는 일을 했다. 정성근의 이런 비판에 막 30살이 된 성종은 "나무는 썩기 쉽고 돌은 다듬기 어려워서 구리로 만든 것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간들은 막무가내로 사치라고 주장했고 성종은 승지들에게 "이게 어딜 봐서 사치스러운 물건이냐"는 투로 화를 내지만 결국 돌로 수로를 대체하고 만다. 그 돌수로가 지금도 창경궁에 있다. 


창경궁 통명전 옆에 있는 연못과 샘. 둘을 잇는 수로는 원래 구리였는데, 정성근등의 항의로 돌로 바뀐다. 문화재청

나는 이 일화가 성종과 연산군의 심리를 알아보게 하는 중요한 일화라고 생각한다. 이 일화에서 핵심은 성종이 화를 냈다는게 아니다. 결국은 성종이 대간들의 말을 들었다는게 핵심이다.  


 왕과 대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간직은 청요직이라고 불리면서 조선왕조 내내 중요한 자리로 대우 받았다. 이 대간의 사회적 위치를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성종이다. 앞에서 나는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통치 영역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린나이에 즉위한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와 함께한 공신 세력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주로 등용시킨 사람이 바로 성리학 원리원칙주의자들인 사림파다.

 사림파들은 성종의 후원을 받아 대간으로 활동하면서 대신세력을 견제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원리원칙주의자들이다 보니 대신은 물론이고 왕의 잘못도 낱낱이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성근은 이 대간들의 우두머리와 비슷했다. 이들은 성종의 재위기간 때 연달아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나중에는 거의 성종이 숨만 쉬어도 잘못했다는 식으로 까댄다. 다리가 셋달린 닭이 태어나도 왕이 잘못했다고 상소를 올리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대간들이 성종에게 너무하다고 할 정도로 비판을 해도 성종이 이를 제어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이를 두고 일반적으로는 정통성이 부족했던-성종은 전임 예종의 둘째 조카로 왕위 계승 서열에서 후순위였다-성종이 대간에게 휘둘린 결과라고 분석하지만 나는 그게 모든 이유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저 이건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종의 유약한 성격도 원인이라고 봐야한다. 앞의 '통명전 구리수로' 사건이 벌어진게 성종 재위 16년때였다. 왕위에 오른지 16년이나 지났고 가장 자신만만할때인 30대에 갓 접어든 왕이 궁궐 후원에 있는 수로 하나 자신의 뜻대로 짓지 못했다. 이건 왕의 권력이 약하거나, 그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려서 때문이 아니다. 성종의 성격때문이었다.


 이런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성종이 자신의 글솜씨를 뽐내고자 한시 하나를 지어 승정원에 선물하는데 정성근등이 나와 왕이 멋대로 시를 짓는건 잘못됐다고 항의한다. 이에 성종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시를 쓴 종이를 물에 개어 승정원 승지등에게 줘버린다. 실록은 성종이 "이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라고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간들에게 죄를 주지는 못하고 애꿏은 종이에 화풀이를 한 셈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성종이 내린 종이를 보고 승지들은 멍하게 서있었다고 한다. 


화를 내게 만드는 대상-대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승지와 같은 자기 곁에 있는 만만한 사람들에게만 감정을 보인 것이다. 성종은 유난히 자신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 편이었다. 왕비 한 명-폐비 윤씨-가 비명에 갔고, 그의 곁에 있던 내관들은 "우리들에겐 걸주와 다름없는 임금"이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성종의 이러한 유약한 태도는 둘째 치고, 대간들의 행태에도 문제가 있었다. 정성근 이하 대간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자기들의 역할이라고 믿어버렸다. 그 믿음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유교정치에서 대간이 해야할 역할이라는 사명의식이라고 표현됐겠지만, 한꺼풀 벗겨내면 왕을 비판한다는 대간들 사이에서의 경쟁의식이 더 컸다고 봐야한다. 이를 테면 "내가 더 너보다 왕을 잘 깐다"는 우월감이었던 거다. 성종 때 대간들의 반대 기록을 보면, 대간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계속해 상소를 올리거나 아예 관청에 출근하지 않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연산군이 정성근의 3년상을 '거짓 충성'이라고 깎아내린데에는 이런 상황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상당부분을 차지했을것이다. 연산군 입장에서는 툭하면 아버지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다니는 대간들이 정작 아버지가 죽자 성군이라며 3년상을 지내는 모습 자체가 아니꼬웠을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연산군이 신하들을 숙청하며 가장 즐겨 내세운 명분이 바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 이었다.


나는, 연산군의 이 행동을 이해하지만 동의하지는 못한다. 대다수의 인간이 위선적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내로남불인건 분명하다. 이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도덕. 인간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 또한 숨어있는 것 또한 인간이다. 정성근의 3년상 속에는 자신의 말을 들어준 국왕에 대한 감사와 존중이 과연 없었을까?


 위선과 자책 사이에서 줄을 탄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도 인간이다. 평생을 남에게 위축된 삶을 살았던 성종에게는 가혹한 평가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성종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하는 건, 이 위선과 자책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관계라는 인간의 삶을 성종은 무시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아니 성종은 인간의 위선 모두를 자기가 보듬어 안을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고 그 결과는 대간의 쓸데없는 비판에도 말한마디 못하고 삭히는 호구 군주였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자라난 연산군은 성종의 정확한 극단으로 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창경궁 통명전을 갈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위선과, 위선을 보듬어 안으려다 실패했던 아비와, 그로인해 인간 불신을 가지게 되버려 결국 멸망한 아들을. 


이전 05화 호랑이가 쓰러진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