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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08. 2022

조선은 그 때문에 때를 놓쳤다.

서울의 풍경-7

왕이 말했다.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국문받을 때 한 짓도 죽을만 하다. 또 조광조가 시종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도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데 그 마음이 곧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12월 16일 1번째 기사>


1화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복궁 신무문은 늦게 지어진 문이다. 이성계와 이방원이 살았을 때, 경복궁의 북쪽은 목책으로만 둘렀다. 신무문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종 15년인 1433년이다. 80여년 뒤인 1519년 11월 15일 밤, 조광조 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시작이 바로 이 경복궁 신무문에서 벌어졌다. 남곤과 홍경주, 심정을 비롯한 반(反) 조광조 세력은 중종이 몰래 열어준 이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갔다. 중중과 이들은 곧바로 회의를 열고 승정원과 대간 내 친조광조 세력을 전원 교체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숙청한다고 결정한다. 음력 11월15일이니 양력으로는 12월 초중순이다. 초겨울 한밤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조광조 세력의 죄목은 '파당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조직 내 사조직 모임 조성 혐의다. 중종은 한 달 뒤 조광조가 국문장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다는 죄목을 추가 적용해 죽여버린다. 기묘사화가 발생하고 조광조가 죽기까지는 한 달 남짓 걸렸다. 기묘사화는 중종이 직접 군 병력을 소집하고 자신의 뜻에 맞는 신하들만 불러모아 기습적으로 숙청을 단행하는 모습을 띄었다. 이는 전형적인 친위쿠데타다. 기묘사화의 주동자가 중종임을 알 수있게 해준다.

 중종은 왜 신하들을 경복궁 신무문으로 불렀을까. 중종은 기묘사화 직후 신하들을 만난 자리에서 여러차례 자신이 신하들을 신무문이 아니라 서쪽문인 영추문으로 불렀다고 말한다. "신무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하기도 한다. 당시엔 왕족이 아닌 신하들이 궁궐로 들어오려면 영추문을 통해 들어오는게 일반적이었다. '반 조광조'세력 들이 영추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갔다면 '친조광조'측이 몰랐을리가 없다. 결국 평소에는 왕래가 없는-중종은 이후 신무문 일대가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고 말한다- 신무문을 통해 신하들을 들인 것이 사실에 가깝다. 실제로 실록은 중종의 주장 이후에도 기묘사화가 신무문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 신무문, 기묘사화 당일 중종은 몰래 이 문을 열었다.


 나는 중종이 내뱉었던 이 거짓말이 그의 인생을 가장 잘 알려주는 일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가장 문제적 임금을 꼽으라고 하면 중종을 1순위로 놓는다. 그가 거짓말을 잘 해서가 아니다. 책임감이 없었기 때문이고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광조에 대한 숙청이 대표적이다. 중종은 조광조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점에 기습적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조광조 세력을 숙청했다. 중종은 그 직전까지 조광조를 매우 두텁게 대했다. 실록에서 조광조는 기묘사화 직전까지 단 한번도 조광조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러다보니 조광조의 죽음이 결정된 직후 사관은 "왕이 완전 딴 사람 같다"고 적기까지 했다. 그의 숙청이 결정된 다음날, 영의정 정광필은 주위에 "왕이 딴 사람 얘기 듣고 저렇게 된거 같다"고 말하기 까지 한다. 조광조 본인도 감옥에 갇힌 후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한번만 제발 뵙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얼굴을 보고 설득하면 중종의 화가 풀릴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정작 조광조를 향한 왕의 분노는 정말로 깊었다. 기묘사화 당일부터 조광조에게 죄가 있다면서 죽이라고 명한 사람은 중종 한 명뿐이었다. 조광조 세력에게 온건적이었던 영의정 정광필은 물론 조광조의 처벌을 주장했던 남곤 마저도 사형 만큼은 찬성하지 않는다. 조광조가 처음에는 귀양을 갔던 것도 이 두 사람이 극력 중종을 말려서 가능했다. 실록에 의하면 신하들이 끝끝내 조광조를 죽이지 않는 처벌안을 만들어 올리자 중종은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고 한다.

 이 글의 맨 위에 있는 '조광조는 곧지 않은 사람'이라는 중종의 일갈은 끝내 국문장에서의 추가 범죄를 찾아내 조광조를 죽이려 들 때의 말이었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는 남곤의 만류에 중종은 위와 같은 말을 하며 기어코 죽여버렸다. 끝끝내 만류하는 신하들 앞에서 본심을 꺼내 보인 것이다. 나는 중종의 이 말은 정치적 언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슴 깊이 숨겨진 중종의 본심이라고 본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평가가 옳은지는 둘째치자. 또 정치에 있어서 상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건 왕왕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종처럼 사람을 도구로 써서는 안됐다. 조광조가 싫다면 그가 국가운영에 걸맞지 않은 인재라면 등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 등용해서 쓸모가 없다면 승진시키지 말았어야 했고, 그를 어화둥둥 치켜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단 4년만에 정6품 성균관 전적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까지 폭풍 승진을 시킨다. 그런 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조광조와 그 일파를 모조리 숙청시켜버린다. 그래놓고 '원래부터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뒷담화를 한다. 이런 중종의 태도가 리더십상으로 좋은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중종의 이후 태도다. 그는 조광조의 죽음을 결정한 주체에 대해 기묘사화 당일이나 이후 내내 '조정의 뜻'이라고 말한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이후 기묘사화의 주체를 남곤을 비롯해 조광조와 다툰 세력들에게 돌렸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주초위왕'도 이 시각에서 나온거다. 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광조를 죽이려 든 사람이 누군지는 명확하다. 

 조광조만 그랬다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광조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 중 한 명이 김안로인데, 중종은 이 김안로를 띄웠다 죽이는 짓에서 정확히 조광조를 다루던 방식과 똑같이 한다. 중종은 김안로에게 동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을 동시에 겸직 시켰고, 자신과 사돈도 한다. (김안로의 아들과 중종의 딸이 결혼했다) 그렇게 김안로를 권력의 정점에 갖다 놓은 뒤에 어느 순간 태도를 돌변해 죽여버린다. 이때도 본인이 김안로에게 권력을 준 행위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라는 말로 쏙 빠져가 버린다. 그야말로 피해자 코스프레의 전형이다.

 내가 중종을 더 문제 삼는 이유는, 그가 그렇게 '남탓'을 하면서 획득한 권력을 사용한 방식에 있다. 중종의 재위기간은 38년으로 아버지 성종(25년)보다 오래 재위했고, 역대 국왕 중에 고종(대한제국 포함), 영조, 숙종, 선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다. 근데 이 기간 중종이 뭘 했는지 우리가 기억하는 게 있는가.

 진짜 아무것도 없다. 대장금에서 허허 웃는건만으로 왕의 역할을 다 할수는 없다. 더구나 이 시기는 조선왕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시기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은 성종까지의 전성기를 넘어 정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귀족들은 끼리끼리 모이면서 시야를 좁혔고 자신들 위주로 굽어진 정책을 쓰기 일쑤였다.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어가고 사람들은 과도한 세금을 내느니 귀족의 노비로 들어갔다. 창고에 처박힌 병장기들은 썩어갔고 군대의 훈련수준은 엉망이었다. 이를 보면 세금을 줄이고, 귀족들의 특권을 줄이자던 조광조의 개혁의도가 어느정도 맞다는 생각이 들법도 하다.




 하지만 중종은 일생동안 국가 개혁이나 사회 발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례와 의례에 집착했고 행정문서의 달인이었다. 시시콜콜 아랫사람들이 잘못 문서를 기안해왔다고 들볶아 대기 일쑤였고, 자재 점검을 한다며 들쑥 창고에 들러 갈구곤 했다. 자기가 타는 말을 점검하겠다며 갑자기 마구간에 들러 모든 말을 끌어내서 타고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이건 국가를 책임지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냥 자기 만족행위다. 

 이렇게 38년 동안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중종은 이후 후계자 안배도 이해하기 어려울정도로 처신한다. 세자(훗날의 인종)를 위해 뒷배를 굳건히 다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세자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있는 김안로를 숙청해버렸다. 둘째아들 경원대군의 뒷세력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세자가 마음에 안들면 이유를 대서 폐위하면 되는데 그것도 안했다. 후대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던 말던 자기 대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사고 방식이다. 이때문에 중종 사후 조정은 대윤(친 인종)과 소윤(친 경원대군)으로 나뉘어 심각한 정치투쟁을 벌였고, 그 이후에도 이 후유증은 지속된다. 중중의 재위기간과 그 이후 세대를 넘쳐 약 100여년동안 조선왕조는 정치투쟁에만 몰두했고, 결국 그건 임진왜란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도저히 중종을 좋게 평가해 줄 수없다. 그가 조광조를 숙청해서만도 아니다. 그 뒤에 김안로도 그런식으로 다루어서도 아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를 위한 책임의식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형 연산군이 쫓겨난 뒤 반정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불안했다고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재위였다. 국가운영을 위한 통찰력이 아닌, 내 안위를 돌보기 위한 세월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문에 조선은 때를 놓치게 됐다. 그가 한반도를 위해 한 가장 큰 혜택은 강남 한가운데 왕릉을 조성해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쉴 공간을 마련해준 것 하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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