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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19. 2022

"마땅히 백성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서울의 풍경-8

"영돈녕부사 김육이 죽었다. 나이는 79세였다. 그가 죽자 임금이 탄식하길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며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9년 9월 5일 1번째 기사>


전현직 서울시장들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복원이 된 한양도성이지만 두 구간만큼은 앞으로도 복원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숭례문에서 인왕산까지가 한 구간이고, 장충동에서 낙산까지의 한 구간이 그렇다. 도로와 주택들이 성곽의 길을 메워버렸다. 조선의 흔적을 되살리기 위해 도성을 복원한다는 명분은 지금의 편리함과 개인의 이익에 막힐 수밖에 없다. 이 구간에 있는 곳이 남대문이라고 불렸던 숭례문과 동대문이라고 불렀던 흥인지문이다. 그러다 보니 두 문 모두 양날개가 잘라진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나마 복원으로 일정 성벽이 붙여진 숭례문보다 완전 두 날개가 껶여진 흥인지문이 더 초라하게 보이곤 한다.


 하지만 나는 흥인지문을 볼때마다 초라함 보다는 책임을 다했던 한 사람을 생각하곤 한다. 매일 아침, 아니 새벽을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대문 앞에 땔감거리를 매고 섰던 사람. 김육이라는 사람이다.

 학창시절 역사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면 기억이 나는 사람이다. 김육. 대동법의 창시자이자 대동법을 위해 자신의 한 평생을 바친 사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인식된다. 그가 왜 대동법에 평생을 바쳤는지 일반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나는 동대문을 지나칠때마다 그가 대동법이라는 법에 가졌던 생각을 어림짐작해 보곤 한다.


현재의 흥인지문(동대문), 낙향한 김육은 새벽녂 이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1580년생인 김육은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해 할아버지,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를 모두 잃고 사실상 고아로 자라난다. 김육은 이때 아버지를 묻을 땅을 어렵게 구했는데 사람을 쓰지 못해 자기가 직접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50여년이 지난후 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죽을뻔 했다"고 말했다.

 김육은 이 어려움을 딛고 성균관 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5대조 조부가 기묘사화 희생자인 김식이었던 덕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성균관에 들어갔으니 이후 관료로 나아갈 길이 열렸고 기묘사화로 희생당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평가도 딸렸다.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주위 인간관계도 넉넉했다. 승진은 필수였다. 그때 김육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광해군때에 벌어진 정치투쟁 이른바 '회퇴변척' 사건이다. 이 사건이 무슨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생략을 하고 간단히 결과만 놓는다면 당시 성균관 총학생회장의 위치에 있던 김육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어 평생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는 결정에 처할 뻔 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의 노력으로 마지막에 이 결정이 철회됐는데 그때 김육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후 벌어진 인목왕후 폐위론에 김육은 성균관을 때려치고 가평으로 내려가버린다.

 그 후 광해군이 축출되는 1623년까지 근 10여년을 그는 가평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간다. 삶으로 따지면 나이 33살에서 43살까지로 삶의 전성기라고 부를만한 시점이다. 그는 그때를 그저 농사만 짓고 살았다. 김육에게 있어 불안함은 없었을까. 이때의 그를 보여주는 기록이 하나 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는 땔감이 많이 필요해서 주위 산에서 땔감을 베어서 지고 오는 지게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흥인지문을 통해 들어오곤 했는데 매일 아침 동대문에 종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릴때 가장 먼저 들어오던 사람이 김육이었다고 한다.

 가평에서 동대문 인근의 청량리까지 오늘날 경춘선 전철로도 1시간 30분 이상이 걸린다. 자전거도 없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가평에서 걸어와서 땔감을 팔고 다시 가평까 돌아가 성실하게 밭을 매고 나무를 벤 뒤 다시 그 땔깜을 들고 밤늦게 출발해(당시 동대문에서 문이 열리는 시간은 새벽4~5시쯤이었다) 돌아온 것이다. 나는 김육이 이 짓을 매일 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사람인이상 이런 육체노동을 매일 했다면 머지않아 지쳐 죽는다. 몇번 이런 행동을 보여준것이 주위 사람들의 눈에 들어 "양반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성실하게 일을 하다니" 정도의 이유로 나중에 설화가 됐을 꺼라고 본다.

 그렇다하여 김육이 보여준 성실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일화에서는 주목해야 할 점은 김육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삶의 지향성이다. 그는 평생 자신에 충실했다. 자신이 목표로 하면 이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렸을때 조부모와 부모 모두를 잃은 상태에서도 과거에 합격했고 자신이 아니다 싶은 일이 발생하면 '무'로 돌아간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것을 내던졌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해 하루 밤낮을 밭갈고 나무베고 시장에 내다팔며 성실한 노동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백성들의 생활과 일부 관리들의 착취, 조세제도의 문제점, 관료제도의 허울성등을 목격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서인세력들은 광해군때 관료들을 대신할 새로운 실무관료 모집에 나선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띄었던 사람이 김육이다. 김육은 이후 의정부도사로 일을 시작해 음성현감, 평안도 안변도호부사, 충청도 관찰사 직등을 역임한다. 주로 지방관리였다. 그는 지방 관리로 역임하며 꾸준히 중앙조정에 세법의 문제점과 개선책 관료제도의 개혁등을 주창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한다. 가장 절정일때가 충청도 관찰사때였는데 이때는 조정 세금의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걷혀졌던 탓이 컸다.


김육의 초상화, 그의 나이 58세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평생 낮은곳에 임하려 애썼다. 중년이 되면 그는 인쇄사업을 차려서 떼돈을 번다. 그가 재상이 된 후 아들인 김좌명은 귀족적 언사로 유명했다. 또 다른 아들 김우명의 딸은 효종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당시 왕실은 특정 가문과만 결혼했다. 권력을 나누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김육의 가문인 청풍 김씨에서 세자빈이 나온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효종이 얼마나 김육을 아꼈는지 더 나아가 김육이 조정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보게 한다. 김우명의 딸은 명성왕후가 되어 아들 숙종의 재위 초반 정국을 좌지우지했고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는 현종과 숙종연간 최고위 권신이었다. 김육이 가평에서 땔감팔어 근근히 연명하고 살 때에 비하면 급격한 성장이다.

 이때쯤 되면 사람은 자신의 옛날을 잊곤 한다. 김육은 그러지 않았다. 나이 70이 넘어서 2선 후퇴를 해야 할 시점에 효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저를 쓰시려면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한다. 효종대의 대동법 시행은 사실상 김육이 없었으면 이뤄지지 못했다. 대동법의 반대파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대동법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복잡한 세금체계를 최대한 줄여 '쌀' 하나로만 내게하는 정책이다. 조선시대 세금체계의 핵심은 '사람'에게 세금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를 '토지'로 바꾸는 것이 대동법의 핵심원리다. 하지만 대동법은. 조선의 낙후된 물류운송시스템에서 세금체계를 '쌀'로만 단일해 운송을 하면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조선왕조는 세금을 대부분 쌀과 무명으로 받은뒤 이를 배로 실어날랐는데 배가 한척이라도 침몰하게 되면 세금 손실이 발생한다. 기존 세금체계에서는 별 문제가 아닌 일이 세법변화로 인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규모로 쌀을 운송함으로써 빚어지는 보관문제 등도 있었다. 실제로 대동법을 반대한 사람-대표적인 사람이 김집이다-들의 주요 논리가 이거였고 광해군때 한차례 대동법을 실행했다가 접은 이유도 이 부작용때문이었다.

  김육은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현재는 섬인 안면도는 옛날에는 육지-태안반도-와 연결되어 있는 반도 지형이었는데 여기에 운하를 파서 섬으로 만든 사람이 김육이다. 왜일까. 김육은 충청감사로 재직하면소 이 지역-현재의 서산. 태안-의 풍랑이 상당히 거세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배들이 자주 침몰하기 일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육이 이 운하를 파면서 배들의 운전이 좀더 편해졌다.

 그래도 배가 침몰할수 있다는 우려와 보관시스템의 문제 자체는 해결되지 않는다. 김육은 상당한 정치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우선 왕의 신뢰를 얻어내어 반대파들을 고립시킨다. 조정의 여당을 김육일파들이 차지하게끔 정치적으로 조성한다. 김육의 손녀가 세자빈이 된것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반대파에게 미움을 받지않게끔 처신했다. 김육은 대동법에 반대한 김집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 김장생의 제문을 지어준다. 사망할때 자신의 뒤를 이어 대동법을 정치적으로 보호해줄 후견인으로 김집의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지목했다. 또다른 반대파인 원두표에게는 정치적으로 고립을 시키면서도 그의 할아버지 원호를 위한 사당을 지어주자고 제의해 최대한 감정적 비난을 할수 없도록 처신했다. 그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대동법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다 보면 재미있는 지점을 알 수 있다. 반대파들의 상소문에 항상 "김육의 충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반대파들의 논리를 최대한 축소할수 있게끔 영리한 처신을 한 김육의 감각을 알 수 있다.

 김육은 왜 이렇게 집념이 강했을까. 나는 그의 생각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동대문을 지나갈때 마다 그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사람은 죽을때까지 자기가 땔감들고 가평과 동대문을 오갔던 그 때의 기억을 잊지 않았구나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삶에도 최선을 다해주려 노력했구나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이 맞다고 보는 이유는 나이 일흔이 넘은 김육이 왕에게 대동법 성안을 위해 올린 상소문에 있는 구절 중 한 대목때문이다. 나는 조선왕조실록이 남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을 꼽는다면, 바로 이 문장을 든다. 조선은 김육의 저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저 말을 지키지 못해 망했다. 김육은 조선왕조의 철학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小民)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효종 즉위년 11월 5일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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