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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31. 2022

그는 가족을 원했다.

서울의 풍경-10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즉위년 3월 10일 4번째 기사>


조선왕조 22대 임금인 정조는 이상하게 고개와 관련된 일화가 꽤 있는데 지지대고개와 거둥고개가 그것이다. 두 고개 모두 정조의 가족 무덤들과 관계가 있다.

 지지대고개는 오늘날 1번국도상에서 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다. 거둥고개는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역 서부에서 공덕역으로 넘어가는 만리재로-세종시대 훈민정음에 반대했던 최만리가 살았던 동네라고 이름 붙여졌다-의 인근 고개다. 지지대고개는 정조가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려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붙여졌고, 거둥고개는 정조가 자꾸 이 고개를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희궁 숭정문, 정조는 이 문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정조는 왜 이 고개들을 자주 찾았을까. 정조는 지지대고개를 넘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진 융릉을 자주 찾았고, 거둥고개를 넘어서 자신의 후궁이었던 의빈성씨와 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효창원을 자주 찾았다. -오늘날 백범기념관과 효창운동장이 있는 그곳이 바로 효창원이다. 의빈성씨의 무덤은 일제시대에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그래서 나는 효창원을 찾을 때마다 정조를 생각해보곤 한다.

 정조의 일생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와 의빈 성씨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의 인생에서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정조는 그 트라우마와 싸우면서 살았고 결국 그 트라우마에 잡아먹혔다고 해도 진배없다. 그가 자주 아버지 무덤을 찾았던 이유도 사실 거기서 시작된다.

 그러면 의빈 성씨는? 최근에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유명해진 의빈 성씨는 실제는 혜경궁 홍씨 집안 청지기의 딸이었다. 10살 무렵에 궁궐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는데,당시 궁궐에 들어오는 궁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입하나 줄이려는 목적이 컸던 걸로 추정된다. 혜경궁 홍씨와 사저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기 때문에 꽤 혜경궁이 가까이 대했을 확률이 높다.

 정조는 덕임을 정말로 사랑했다. 정조와 덕임이 처음 관계를 맺은게 정조 4년이다. 그 후 그녀는 6년동안 총 5번의 임신을 한다. 정조가 정말 그녀를 자주 찾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근데 덕임은 두번이나 정조를 거부했다. 정조는 덕임이 사망한 후 직접 제문을 짓는데 거기서 자신이 15살이었을때 14살인 덕임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가 대차게 차인 사실을 기록해놓았다.

 덕임은 왜 그랬을까? 공식적인 이유는 정조의 본처인 효의왕후와 덕임간의 관계가 좋아서 덕임이 효의왕후 보기 민망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과연 그뿐이었을까? 그 옛날 절대적 권력을 지닌 차기 왕위계승자의 요구, 그것도 승낙만 하면 집안이 필 수 있는 그런 제의를 거절 하려면 상당한 용기와 마음가짐 없이는 안 된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실 고위 여인들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어린 궁녀를 딸처럼 키웠던 일들이 많았다. 기록은 덕임을 혜경궁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조와 덕임은 어렸을때 부터 자주 봐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정조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와 세상에 대한 불안감, 우울증 등을 덕임은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조의 기록에 의하면, 덕임은 '죽음을 무릅쓰고' 정조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때 덕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무튼 정조는 덕임이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뒤 한동안 방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정조는 자신의 매형과 어울려서 기생집을 드나든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한동안 후궁을 만들지 않는다. 자식도 없었다. 정조는 효의왕후와 데면데면했다. 이를 걱정한 왕실 어른들의 다그침으로 정조는 두명의 후궁을 들이는데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다. 그런데 정조는 두 명의 후궁을 들인 이후에 다시 한번 덕임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15년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온 남자가 한 여자에게 두번이나 프로포즈를 했다. 그런데 덕임은 이 요구도 거절한다.  두 사람은 15년 동안 아예 서로 모르고 살았을리 없다. 정조가 어렸을때 벌어진 첫번째 프로포즈와 거절은 그 뒤에도 덕임이 궁궐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면 둘만의 비밀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덕임은 계속해 혜경궁 곁에 있었을 것이고, 소문난 효자였던 정조가 그녀를 못봤을리가 없다.

 결국 15년의 기간 동안 정조라는 이름의 한 남자와, 덕임이라는 이름의 한 여자간에는 훗날의 사람들은 알지 못할, 그들만이 아는 역사가, 흔적이, 두 사람만이 아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남자가 가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였던지, 아니면 여자가 가지는 회한인지는 우리는 전혀 모를 뿐이다. 다만, 이 부분만 생각해보고 싶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던 남자가 그렇게 만들려고 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덕임은 두 번이나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그건 왜였을까.

 아무튼 두번째 프로포즈도 거절당한 정조는 결국 극약처방을 내리는데 덕임의 하인을 처벌하려 했다-옛날엔 궁녀들도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 결국 정조가 이 처벌을 내리자 덕임은 정조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정조는 이때를 "비로소 내 명을 받아들었다"라고 썼다. 비로소라는 단어 속에는 정조가 느꼈을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정, 정조는 이 기둥에 자신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글을 지었다.

  정조는 끊임없는 단련과 학식으로 자신을 높였고, 그 학식으로 신하들을 가르쳤으며 스스로도 본인을 '만천명월주인옹'(만백성의 주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자부심이 높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 자부심 높은 정조라는 사람 밑에 끊임없이 자신을 다잡았던 불안감을 느낀다. 그는 유난히 담배와 술을 좋아했다. 그것도 말술이었고, 한번에 몇대 이상을 피우는 중증 흡연자였다. 담배와 술 모두 중독성이 높은 터라 정조와 같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고 통제력이 강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담배와 술을 좋아했던 정조의 맨얼굴에서 트라우마와 불안감을 씻으려 애쓰는 성격을 엿본다.

 정조라는 남자는 그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평생 온전한 가족을 꿈꿨던 사람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자신으로 인해 비명에 죽었고 그 광경을 그는 평생 기억했다. 할아버지 영조는 편집증 환자였다. 할머니 영빈 이씨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자고 영조에게 주청해야 했다. 사리분별 할 수 있는 12살의 나이에 강제로 얼굴도 못본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야 해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심각한 권력다툼을 피부로 느끼며 자랐다. 어렸을때 만난 효의왕후와는 평생을 데면데면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는 두번이나 자신을 거절했고, 사실상 권력을 동원해서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 정조는 이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덕임은 두번을 유산하고 세번째 임신으로 아들을 낳는데 바로 문효세자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낳아주었다. 자신의 탄생으로 아버지가 죽어야 했던 삶을 산 정조에게 문효세자의 탄생은 어떤 의미였을까. 정조는 이때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다행스럽다"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왕실의 대계를 이어가게 됐다는 이유를 댔지만, 정조의 마음속은 어떠했을까. 당시 왕실 법도에는 왕자의 양육을 왕비가 맡도록 하고 있는데 정조는 문효세자를 일부러 덕임의 곁에 두도록 했다. 다분히 어머니-영빈 이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큰 아버지 사도세자를 염두에 둔 행동이다.

 정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이 때였을 것이다. 그 시기는 불과 6년여 정도였다. 문효세자는 태어난지 5년만에 홍역으로 사망한다. 문효세자가 사망할때 임신 중이었던 덕임은 4개월 뒤에 뒤따르듯 사망한다. 임신 9개월이었다.

 결국 정조는 다시 홀로 남았다. '혈육'은 있었다. 어머니 혜경궁도 있고, 본부인 효의왕후도 있었다. 후궁도 여러명 있었다. 그렇지만 가족은 사라졌다. 그는 아들이 쓸쓸해할까봐 덕임과 아들을 같이 묻었다. 이례적인 일이다.-지금은 의빈 성씨는 서삼릉의 귀인 묘역에 있으며 문효세자는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있다.- 다음해에는 왕실에서 자꾸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흉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 묘소를 바꾼다. 이 바뀐 무덤이 오늘날의 융릉이다. 그리고 융릉을 호위하는 성을 짓는다. 수원 화성이다. 그 뒤 정조의 후계자인 순조가 태어난다.

오늘날의 만리재, 이 고갯길 줄기 중 하나가 거둥고개다.

 정조는 그 뒤에도 14년의 인생을 더 산다. 그 14년동안에도 많은 업적을 했고, 정력적인 정치활동을 했다.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을 위해 모든 정치적 역량을 쏟았다. 하지만 그런 정조의 행동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아내기 어려운 건 나뿐일까.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왕이라는 의무감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던 정조는 아들과 덕임이 죽은 이후에도 행복을, 그리고 삶은 아름답다고 느꼈을까.

 유난히 정조는 가족들의 무덤을 자주 들렀다. 정치적인 이유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무덤 행차 전후로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과연 그 이유 뿐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마음에도 없이 아버지의 무덤과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와 아들의 무덤에 자주 모습을 보였던 걸까. 거둥고개와 지지대고개라는 이름에서, 그 고개를 넘나들며 자꾸 가족들이 묻힌 공간을 보려 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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