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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Sep 17. 2022

장희빈의 마지막 날

서울의 풍경-9

왕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 10월8일 8번째 기사>


1701년 10월8일. 국왕 숙종은 비망기를 내린다. 한 때 자신의 정식 아내였던 희빈 장씨로 하여금 자살하라는 명령이다. 그해 9월에 이은 두번째 지시였다. 

 숙종은 이 명령서에서 그녀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저주'때문이라고 말한다. 장희빈이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수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처소 뒷편에 인현왕후를 죽여달라고 비는 공간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막상 조선왕조실록은 그녀가 이 명령을 어떻게 따랐는지에 대해 명확히 기록하지 않는다. 자살했다는 것만 확실하게 증언할 뿐이다. 이틀 뒤인 10월10일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사후 처리를 명령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때는 장희빈이 확실히 죽었던 셈이다. 그런데 최근 번역 중인 승정원일기를 보면 10월9일에 신하들이 장희빈의 선처를 숙종에 요청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니까 장희빈은 숙종이 자살을 명령한 그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죽지 않았던 셈이다.

 장희빈이 죽은 장소는 창경궁 취선당-오늘날 창덕궁 낙선재 권역이다-이었다. 그리고 숙종은 이때 창덕궁에 있었다. 그러니까 숙종은 자신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 이상 내버려 뒀다. 자신의 명령이 궁궐내에서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그리고 장희빈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숙종 본인이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숙종이 하루 이상 참았다는 건 의외의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

 숙종은 왜 그랬을까. 가장 무난한 해석을 하자면 아들 경종-당시 세자-을 비롯한 희빈 장씨 옹호 세력들이 계속 숙종을 설득해서 였을 수 있다. 실제로 실록은 숙종이 명령을 내린 직후 여러차례 신하들이 이를 말리는 기록을 실어놓고 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숙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건 다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숙종이 단순히 아들과 신하의 요청만으로 하루동안 자신의 결정이 미뤄지는 걸 그냥 뒀을까.


창덕궁 낙선재 앞 구역, 장희빈의 거처였던 취선당이 이곳에 있었으며, 장희빈은 이 곳에서 죽었다. 


 추측이지만, 나는 이 하루동안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살려고 바둥치는 장희빈의 움직임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기록이 없으니 추정뿐이겠지만 난 그건 아니었다고 본다. 숙종이 장희빈의 죽음을 명령하기 전,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도 숙종의 명령으로 사망한다. 장희재역시 장희빈과 같은 혐의를 받고 있었다. 남아있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장희빈은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숙종의 저런 조치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아예 몰랐을까?

 나는 이 하루, 어쩌면 이틀 동안 장희빈이 무엇을 생각했을지가 더 궁금하다. 실록의 기록에서 숙종이 직선적이고 훗날 생각 잘 안하는 시야의 사람이었다면, 장희빈은 뭔가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성격이라면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를 몰랐을리 없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기록에서 보이는 장희빈의 마지막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그녀가 죽어가며 아들의 사타구니를 쥐었다거나 아니면 숙종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거나 하는 건 그녀의 반대당파인 서인세력들이 만들어낸 허위소문에 가깝다.

 사람이란 다양한 면모를 가지므로 장희빈이 마지막까지 살려고 발버둥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 그녀의 삶을 생각해볼때 그런 선택을 내렸을꺼라고 추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장희빈이 태어난 곳은 은평구 불광동 일대다. 지금의 은혜초등학교 근처다. 장희빈의 아버지는 당대 유명한 역관이었다. 당시 왕실은 효종과 현종 모두 심양에서 거주했었기 때문에 역관과의 친분이 다른때보다 강했다. 또 그녀의 외할머니는 조선 최고의 갑부로 유명했던 변부자라는 사람의 친척이었다. 외삼촌은 조선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면포상인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 은평구 불광동이라는 것도 다시 꼽씹어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당시 조선 외교과 무역의 중심은 대 중국 외교였는데 불광동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의주로 가는 직선도로-1번국도-에 위치해있다.  따라서. 그녀의 어린시절은 대우받고. 뽐내며.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시절이었을 확률이 크다. 아니 나는 거의 확신한다. 주위로부터 사랑받는 귀엽고 예쁜 소녀 장희빈의 어린시절이었을 것이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장희빈 일가 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장희빈도 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녀의 인생은 11살때 부터 바뀐다. 아버지가 죽은 후 가문을 맡은 삼촌 장현이 그녀를 궁으로 들여보냈던걸로 추정된다.-그녀가 어떻게 궁으로 들어가게 됐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당시에는 궁 내부 소식을 알겸, 궁과 외부간 끈을 연결할 겸해서 중인가문의 자녀들이 궁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희빈의 경우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보인다. 궁궐에 들어간 그녀가 어떻게 숙종을 사로잡았고. 아들을 낳았고 왕후가 되었다가 다시 몰락해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까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달라서 법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저 유복하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다. 장희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도도하고 다른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온 이쁜 소녀가 궁궐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달라졌을 것이다. 실록은 희빈 장씨가 숙종이 자신과의 동침을 명령하자 인현왕후에게 "나를 살려달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인현왕후를 시험하는 행위다. 이 기록에서 나는 주위로부터 사랑받았던 한 소녀가 궁궐 암투를 겪으면서 타인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장희빈의 '마지막 하루'동안 벌어진 일들이 궁금하다. 숙종으로부터 죽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장희빈은 그 명령서를 들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자신의 죽음으로 빚어질 아들의 문제. 숙종에 대한 원망. 부추긴 신하들에 대한 복수심.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녀는 아니지만. 그녀가 사약을 먹기 직전 그녀가 떠올릴 공간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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