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KOICA 한국해외봉사단 4차 보고서(자유수필형식)_2014.6.26

by dia soleado

2012년 8월 16일,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무려 20시간을 비행한 후 보고타 엘도라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주신 코이카 식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처음 만난 보고타의 칠흑 같이 어두운 밤과 낯선 공기, 그리고 그 모든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흥겨웠던 콜롬비아 음악. 참 차갑게 느껴졌던 보고타의 밤과 뜨거운 한낮 해변가에서 들을법한 노래의 조합은 이질적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이기도 해, 그 밤이 지난 후로도 비슷한 풍경에 처할 때면 어김없이 그때를 떠올리곤 했다. 마치 그날의 밤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던 내 2년간의 이야기를 살짝 풀어볼까 한다.


4차 보고서를 준비하며 콜롬비아에서의 처음 시간들 동안 무얼 보았었고, 어떤 것들을 느꼈었는지 지난 기록의 도움을 좀 받고자 하였으나 이내 그 모든 기록들은 내 손을 떠난 지 오래임을 알아차렸다. 보고타 생활 6개월 차에 늘 이용하던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소매치기 당한 것이다. 덕분에 한 학기 동안 열심히 만들었던 강의 자료도 시시콜콜한 일상의 기록들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콜롬비아에 오기 전 이 나라에 대해 두 가지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하나는 그저 막연히 상상하던 남미의 풍경인데, 시에스타(siesta: 더위가 가장 심한 정오의 낮잠)를 즐기며 살사음악에 취해 살 것 같은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이었고, 또 한 가지는 이미 콜롬비아를 겪어 본 한국인들을 통해 들은 이곳의 강도와 사건 사고들, 불안한 치안에 대한 현실의 어두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조심한다고 애쓰며 살았는데 6개월쯤 지나니 익숙함이 생기는 동시에 경각심도 느슨해진 것일까. 어김없이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이곳에 살고 있는 내 주변의 한국인들은 이런 말을 전해왔다. “Welcome to Colombia!”라고.


콜롬비아의 대도시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생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내 활동지역은 수도라서 보통의 봉사단원들이 흔히 겪는 문제인 전기, 수도가 끊기는 등의 일은 1년에 몇 번 일어나지 않는다. 2년 동안 생활의 불편함을 몸소 감내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왔지만 막상 이곳은 우리에게 그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에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애씀이 필요했는데, 끊이지 않는 일상적 치안의 불안함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사건’은 특별하지 않다. 얼마 전에는 내가 타고 있던 퇴근 길 버스에 칼 든 3인조 강도가 올라타 시민들을 위협하며 금품 갈취를 시도하다가 도망갔는데, 다소 놀라긴 했지만 이것은 이미 한국인에게도 현지인에게도 별난 일이 아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폭탄테러와 각종 사건사고, 심지어 학문의 전당인 대학 안에서도 심심치 않게 무장 세력들의 시위가 일어나 휴강 조치가 불가피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이다. 우리도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일상이다. 누군가는 비교적 몸이 편한 이 도시의 봉사자인 우리를 부러워하거나 혹은 질시할지 모르나, 마음을 쓰느라 드는 힘을 겪어보지 않고서야 누가 섣불리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대도시에 한낮의 시에스타와 하루 종일 즐기는 살사는 없지만 콜롬비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여유는 한국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낯선 이에게 베풀어 주는 친절도 그러하다.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어도 대부분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 주거나 동행해 주는 것은 이곳에서 예삿일이다. 외국인 선생님이라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가끔 콜롬비아 간식거리를 맛보라며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내 한국어 수업의 학생 한 명이 무언가 담긴 비닐봉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봉지 안에는 요거트가 들어 있었는데, 그걸 나에게 가져다 준 이유가 기가 막히다. 별 생각 없이 받아든 나에게 학생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 보고타에 김치가 없어서 슬프지요? 그래서 제가 요거트를 가져왔어요. 김치 대신 드세요.”

김치 대신이 요거트라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학생은 어디에선가 김치가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김치를 못 먹는 나를 위해 또 다른 발효식품인 요거트를 챙겨 온 것이다. 요거트를 먹으면 내가 김치 못 먹는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쁘고 고맙던지, 타향살이의 설움이 한 번에 씻겨 나가는 듯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도 보람 있고, 뿌듯할 때는 단연코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학습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때이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데 워낙 흔히 배우는 언어가 아니라서 그야말로 ‘ㄱ’자도 모르고 수업에 참여한다. 기본 모음부터 시작해 자모 읽는 법을 떼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배우며 본격적인 한국어 학습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나면 어제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도 말할 수 있고 짧은 글도 읽고 쓸 수가 있다. 기말고사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인데, 학생들은 문제들을 풀어내느라 공부했던 온갖 지식들을 총동원하며 고군분투하지만, 나는 ‘ㅏ,ㅑ,ㅓ,ㅕ’를 배우던 그들이 시험지의 문제를 읽고, 이해하고, 풀어내는 그 모습 자체에 감동하고 만다. 지난 학기에는 나에게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던 학생 한 명이 한국의 정부초청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길에 올랐다. 이따금 소식을 전해오는데, 써 놓는 글을 보면 그 수준이 가히 놀랄 만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제한된 교실 한국어를 배우다가 거대한 한국어의 장으로 나아가니 실력이 놀랍게 일취월장하는 것 같다. 나에게 배우고 간 것보다 이미 훨씬 많은 것들을 익히고 있는 학생이 지금도 여전히 소식을 전하며 감사의 인사를 남겨주고, 우리가 함께 공부한 것들 덕분에 지금의 공부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해올 때면 선생에게 그 이상의 어떤 보람이 더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에는 정말 언어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한국어 수업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성인인 대학생 50여명을 앉혀 놓고 말로만 이끌어 가야하는 한국문화론 강의는 나에게 정말 고역이었다. 그야말로 스페인어의 알파벳만 배우고 온 내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대학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힘든 일이었고, 한편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아는 조교 학생이 있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많은 도움을 받아 몇 학기를 지나왔지만,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이 수업을 이제 그만 두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늘상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럴 때면 마음 또 한 켠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도 같이 고개를 내밀곤 했다. 그것은 오기와 패기를 버무려 놓은 듯한 감정이었는데 한계에 도전해보겠다는 비장한 마음까지도(!) 품게 하였다. 그렇게 벌써 몇 학기를 지나왔다. 다음 학기에는 나를 도와 줄 조교 학생도 없지만 전과 같은 큰 두려움이 없는 것은 비단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내가 수업에서 몇 시간 겨우 떠들어 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학생들이 나에게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소통할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닐 터, 기다려주고 버텨준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학생들이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함께 웃고, 즐기고, 한숨도 쉬고, 답답해하기도 하며 더불어 살다보면 마침내는 수업의 끝이 오고 한국문화에 대한 지식보다 더 큰 공동 작업의 뿌듯함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원들과 함께 일상의 기쁨과 고충을 나누는 것도 지금의 우리에겐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매우 특별한 것이어서, 이곳의 희로애락을 뼛속까지 시원하게 소통하는 것은 함께 콜롬비아에 살고 있는 우리 단원들 간에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같은 목적으로 만나 어떻게 서로에게 이렇게도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내며 살아갈 수 있는지 그 힘이 놀랍기까지 하다. 서로를 통해 배우고, 깎이고, 다듬어지기도 하니 그 또한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1년 반 전 1차 반기보고서를 쓸 때 제일 마지막에 이런 다짐을 썼었다.


'해외봉사단원에 대한 보통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주러’ 온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는 이방인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배워야 하고 그들의 도움을 얻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어진 일에 대하여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되, 그들과 더불어 배우러 온 사람임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때는 나름 고심하며 앞으로 이곳에서 배우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정말 학생들에게 배우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배우고,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우리 단원들에게도 배우는, 나의 2년간의 활동은 총체적인 배움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며 살겠다고 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배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날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던 내 2년간의 이야기. 그것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 또한 그런 특별함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 서로 ‘만남’으로 자랐다고. 그렇게 그 날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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