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 위에 서지 못한, 비겁한 시간

by 장작
8d172732c29ab1782abdcc4953ebcc620fbbe9f36a494fd7e6131be54c843a57db3cfadcb808cc5610337e516f7cdabe98fd323a8c6d9b97fb8aae1daca957f87421fb07afff44909d952bb359ebdc3e.jpg 김수영 시인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김수영 作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나름 국문학과를 졸업한 필자지만, 솔직히 순수문학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수험생 시절부터 시나 소설은 단순히 수능과 내신을 위해 '정복해야' 할 영역일 뿐, 내가 직접 찾아서 읽는 종류의 글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수험 과정에서도 간간히 눈에 띄거나 가슴을 울리는 시나 소설은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위 시의 작가인 김수영 시인이다.


일제치하와 6.25 전쟁과 그 이후 좌우 이념대립, 4.19 혁명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왔던 김수영 시인이지만 스스로는 직접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기보다는 그의 표현대로 '조금쯤 옆에 서 있는' 존재였다. 여러 사회비판적인 시와 평론들을 써냈지만, 이렇다 할 직장생활이나 사회적 활동은 지양하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본 김수영 시인의 작품세계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비슷하게 필자가 좋아하는 시인인 윤동주 시인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필자는 이들의 모습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필자의 '비겁한' 모습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사회 전반의 어두운 면이나 부조리들을 숱하게 목격하면서도 이를 필설로 옮기지 못하는 비겁함. 애써 '내 영역이 아니다'라며 억지로 위안하면서, 쓰잘데기 없는 것에나 몰두하려 발버둥치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김수영 시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비겁한 화자의 모습이 아닐까.


오는 3월, 제 20대 대통령선거가 열린다. 역대급 비호감, 네거티브 대선이라고들 한다. 공약대결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서로 헐뜯고 약점잡고 말꼬리 잡기에만 혈안들이 돼있다. 그나마 양강 후보라는 이재명-윤석열 후보가 내놓는 공약들조차 실현 방안이나 재원마련안 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서로의 공약 배끼기와 비난하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지하고 있는 정당이 어디냐를 떠나 정말이지 기가 찰 따름이다. 오죽하면 대놓고 사기꾼인 허경영 후보의 지지율이 5%를 넘기고 있을까. 솔직히 저 두 후보 중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나라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렇게 어이없어하면서도, 필자는 스스로 뭔가 행동할 생각이나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나라가 걱정되면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하거나, 정당 지역구에 들어가 안에서부터 뭔가 조금이나마 바꿔보려는 행동이라도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로만 그친다. 그것도 아니면 기자라는 직업을 살려 적극적인 비판 기사라도 내야 하지만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 '내 영역이 아니다'라는 잘난 자기 속임수 때문에.


김수영 시인의 시간으로부터 어언 50여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거대 담론에 맞설 용기는 내지 못한채 옹졸하게, 부끄럽고 비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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