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이야기를 곱게 써볼까요
나는 시집을 갔다. 우리는 시집을 갔다.
시어머니도 나도 며느리가 됐다.
결혼의 환상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하루 만에 깨졌다.
결혼식부터 이어진 주목받는 것을 나름 즐기게 된 새색시가 이바지 음식을 잔뜩 싣고 의기양양하게 시댁으로 첫인사를 드리러 간 날.
시아버님과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단둘만 남은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너와 내가 그동안에 허물없이 지냈지만 이젠 결혼을 했으니 똑같을 순 없어. 나는 시어머니고, 너는 며느리다. “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만, 온기가 없는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분명히 저번에 딸처럼 살자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내가 저번에 아니면 지금 잘 못 들은 건가?‘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한 번도 단둘의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환상을 가졌다.
며느리는 모녀간이 되고 싶었고,
시어머니는 고부간이 되고 싶었다.
서로 우위를 선점하고 싶던 환상
나에게 6년이나 떡볶이를 만들어주시던 남자친구의 엄마는 시어머니가 되자 나에게 이상하고 커다란 돌덩이를 건네주셨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여자 둘에게 계급 같은 관계가 시작된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고, 충격적이었다.
남편은 그날의 대화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때 솔직한 마음을 말했어야 했다.)
말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는데 왠지 입을 다물어야 할 것만 같던 큰 돌덩이와 같은 자리의 무게를 느꼈다.
남편이 알던 엄마에 대한 환상을 깨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고,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 묵직한 돌덩이를 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고, 돌덩이는 위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돌덩이는 잊고 지내다가 명절이 다가오면 쑥쑥 커지며 위에 부담을 주었다.
결혼식을 하고 2주 만에 돌아온 추석은 내가 며느리가 되었음을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님은 추석 명절을 앞둔 일주일 전 그러니까 돌덩이를 삼킨 지 일주일이 된 날에 내게 전화를 하셨다.
둘만의 전화 속 대화에선 또 한 번의 타협이 없는 말씀을 전하셨다.
“너는 먼저 명절 사흘 전에 오너라”
무거운 돌덩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당시엔 법정 휴일이 명절 앞뒤로 하루였고, 샌드위치 휴일이란 것도 대체휴일이란 것도 없었다.
남편은 빨간 날의 전날까지 회사를 나가야 했고, 시댁은 아주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거리여서 혼자 시댁으로 가야 했다.
결혼과 동시에 아주 낯설고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곳이 된 시댁에서 먹고 일하고 자야 했다.
명절의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으나 홀로 지내야 하는 이틀간의 불편한 동거가 걱정이 되었다.
차례를 지내야 하는 큰집이었던 시댁은 할 일이 태산처럼 많았고,
어머님은 추석을 2주 앞둔 나의 첫인사를 받으신 날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명절준비를 시작하신 것이었다.
새 아가를 무조건 예뻐하시는 아버님과 시어머님의 묘한 갈등 상황에 눈치가 보였다. 어머니는 아들도 잃고 남편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새색시답게 빨간 치마, 연두저고리의 한복을 차려입고 친척들의 주목까지 받으며 어찌어찌 첫 번째 명절의 3일간이 지났다.
대단한 시집살이를 경험한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나는 결혼이 아니고, 시집을 갔구나 ‘
그 생각이 들었고, 친정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말없이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그때 남편은 내가 일한 것이 서러워 우는 줄로만 알았다.
여유롭지 않은 집에서 정성 들여 잘 키운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을 했으니 가세에 도움이 되기를 충분히 바랄 수 있으셨을 텐데
취직만 기다렸다는 듯 홀딱 제 살림을 차려버렸으니 나였어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공허했을 엄마란 여자의 마음.
그 세대엔 보통 자식이 결혼과 동시에 독립을 했다. 갱년기나 빈 둥지 증후군이란 말이 없어 제대로 이해나 위로를 받지 못했으며 자칫하면 못된 시어머니로 낙인이 찍혀버렸다고 생각하니 쓸쓸하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마음이었고, 모든 시댁의 말씀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선 후회가 없으며 만일 당연하다는 생각을 안 했다면 내 삶은 아주 불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대화는 가족 간에 꼭 필요하단 것을 간과했고, 내가 조금 참는 것으로 모든 것은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다.
돌덩이를 점점 크게 키우는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그때 솔직한 마음을 말했어야 했다.)
주변에서 말하는 고부관계에 대한 많은 의견들 속에서 처음 하는 시어머니 자리의 역할에 대해 고민과 혼란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 시어머님이 며느리에게 바란 것은 “명절 3일 전에 오라”는 것뿐이었다.
며느리는 별 저항 없이 수긍했고, 어머님은 초반 기선제압에 가볍게 성공하셨다.
명절을 엄마와 단둘이 보내던 나는 북적북적 사람이 드나들고, 고소한 기름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있는 명절의 느낌을 좋아했다.
초반의 명절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나는 며칠간의 머무는 일이 불편했을 뿐 익숙해졌으며 어머님의 조수 역할이면 충분했다.
4년쯤 되어 어느 정도 쓸만한 조수가 되었을 때 어머님의 디스크가 발병되었다.
처음엔 장을 봐주시면 시키는 대로 그리고 작은어머님들이 도와주셔서 명절상을 차려낼 수 있었다.
두어 번의 명절을 치르고 보니 어차피 내가 할 일이니 편한 내 집 부엌에서 미리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해가고, 당일에 해야 할 음식만 시댁에서 마련했다. 머무는 날이 3일에서 2일로 줄어드니 몸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시어머니의 할 일을 대신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이 시기는 두 며느리의 기세가 서로 등등할 때여서 신경전이 대단했다.
그리고 3년 후 며느리는 먼 곳으로 떠났다.
명절에 드리는 안부 전화 속 단둘. 고부간의 대화는 언제나 그 첫날의 돌덩이가 떠올랐다.
떨어져 산 세월 동안 고부의 관계는 발전 없이 멈춰있었고, 거의 십 년 만에 돌아온 며느리는 다시 새댁모드가 되었다.
흰머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친구들은 세월을 겪어내며 둥글둥글한 고부간이 되어 있었다.
발전하지 못한 우리 집 고부간에 대해 친구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떨어져 지낸 시간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어 어머니의 모든 말씀을 첫날의 새댁처럼 받아내고 있었다. 많은 일들 중 제사의 문제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이젠 내가 할 일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귀국의 생활은 온 가족이 힘들었으며 아이들의 안정을 위해 데려온 강아지 비누의 분리불안증이 생기자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일이었던 제사를 가져왔고, 마음이 편했다.
남편은 부모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제사를 지내는 일에 아무 관여를 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제사와 차례 준비 그리고 15명을 위한 아침식사 준비를 혼자 충실히 했고, 어머님은 전날 오후에 집에 오셨다.
어떤 것도 탓하거나 말씀하지 않으셨다. 제사와 차례, 두 번의 제사를 6년쯤 혼자 해냈다.
현재 우리 집은 종교가 없지만 이제 차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만하면 잘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아버님이 선언을 하셨다.
‘내가 싫은 내색을 한 적도 없었는데 무엇을 잘못했을까?’
약간 억울하고 알 수 없는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친척들께 일일이 말씀을 전하셨고, 백중날에 절에서 제를 지내 조상께도 고하셨다.
아버님은 우리 집 며느리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이해하셨고, 고생했다고 하시며 당신이 전달한 무거운 돌덩이를 손수 거두어주셨다.
이후 우리는 시부모님과 네 식구가 모여 형식에 구애 없는 즐거운 명절을 보냈다.
그리고 새 아가를 무조건 예뻐하셨던 시아버님은 2년 후에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두 며느리에게서 갑자기 돌덩어리가 제거되었다.
그러나 며느리가 오랜 시간 동안 위속에 품었던 돌덩어리는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돌가루가 되어 간혹 따끔따끔하게 후유증이 느껴진다.
나는 요즘 허리가 아프다. 희한하게 명절 즈음이 되면 어딘가 아프고 병이 난다.
분명 며느리의 명절 증후군이다.
나의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남편의 장사를 도우며 한 달도 전부터 명절을 걱정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어쩌면 시어머니를 지금까지 괴롭히는 디스크도 오래 앓던 명절 증후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똑같은 며느리였던 어렵고 어려운 고부간이 서로 좀 더 진심으로 아픔을 나누었다면 좋았을걸 하고 마음이 아프다.
집에서 예를 지내지 않는 대신 우리는 명절과 제사의 가까운 날에 성묘를 간다.
아직은 어머님이 함께 하시니 어머님의 방식과 흡족하실 마음만큼 준비를 한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내 마음도 어머님과 비슷하게 닮아있다.
가끔은 아무 날도 아니지만 놀러 가듯 꽃을 사들고 보고 싶은 아버님께 찾아가기도 한다.
돌덩이가 사라지니 이승의 사람들은 더 가까워지고, 저승에 계신 분은 더욱 그리워진다.
이다음의 우리 아이들에겐 또 다른 방식으로 서로 정을 나누고, 고인을 추모하는 날이 되길 바란다.
“어머니 허리가 아파서 저는 이번에 성묘 못 가요. 전은 조금만 했어요 “
“아픈데 하지 말지! 허리 아픈 거 내가 선수지. 고생하지 말고, 얼른 병원 가. 물리치료받고 약 먹어. 벨트 꼭 차고 움직여라 “
갱년기와 빈 둥지 증후군, 명절 증후군을 겪으며 살아온 두 명의 며느리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함께 아픈 곳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늙고 있다.
나는 아직 시어머니가 되어보지 못했다.
언젠가 며느리를 만날 날이 있기를 기대하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고민하고 멋진 시어머니가 되리라 막연한 다짐을 한다.
조금은 알 것 같은 내 시어머니의 마음처럼..
남들보다 조금 늦게 둥글둥글해지기 시작 한
우리는 이제 단둘이 걸어 다닐 때 서로 의지하며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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