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색의 바람이 분다
두문불출하고 있던 그 사이에 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선선하고 차가워지려는 밤바람.
약간은 쓸쓸하며 사색(思索)하게 만드는 바람.
좋아하는 그 바람이다.
언제나 봄날인 어린 나는 가을이 되면 세상 고민을 모두 떠안은 듯 사색의 바람을 즐겼다.
숱 많던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말이다.
마치 연둣빛 봄의 새싹이 안 어울리는 가을이란 코스튬을 입은 것처럼 그려진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든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인 봄처럼 내 인생의 봄날도 빠르고 짧게 지나갔다.
사실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의 사색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지 않나?
여름과 사색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편견이다. 하지만 뜨거움에 지쳐 사색할 여유가 없다는 그저 좋은 핑계가 필요했었다.
한숨 자고 나면 어디선가 기운이 솟아나 말짱해지는 한 여름 같던 푸르고 젊은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잠시 여름의 사색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현명함이 있었다면 좀 괜찮았을까?
어느새 올해의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처럼 기나긴 내 인생의 여름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할 일이 무척 많은 명절연휴를 앞두고 아픈 몸이 원망되었다.
아프면 아픈 몸을 다독거릴 생각을 하지 않고, 왜 아픔을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지 좀 이상하다.
완전하진 않지만 허리 아픈 것이 조금 나아지니 40년도 넘어 색은 좀 바랬으나 아직도 짱짱한 보원 자석벨트를 차고,
천천히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꿈지럭 거리며 무엇을 한다.
‘그런데 자석벨트는 왜 그렇게 오래된 거지? 내가 그렇게 일찍부터 허리가 아팠던 것인가?‘
왜 그런지 나는 내가 아팠던 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산고(産苦) 조차도..
이미 날이 정해져 있던 비누의 미용은 다른 가족들이 데려갔고, 비누는 빡빡이가 되어 돌아왔다.
명절 전이어서인지 미용실장님은 우리 비누에게 예쁜 스카프를 목에 둘러주셨다.
빨간 공단 바탕에 꽃장식이 되어있고, 하얀 깃 동정을 단 듯 정성 들여 만든 것 같았다.
우리 비누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삐딱한 허리를 부여잡고 스카프를 한 비누의 사진을 수만 장 찍는다.
“아이고, 우리 비누 정말 정말 예쁘다!”
걱정과 달리 비누는 내가 아니어도 나처럼 돌볼 가족이 있으니 안심이 된다.
지난날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식물 화분에 물을 주었다.
식물은 물을 안 줘도 잘 못줘도 죽을 수 있어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다.
들여다 봐주지 못한 티가 역력하다.
가을빛을 느끼고 조급하게 분갈이를 해준 식물들 중 일일초와 포인세티아가 죽어가고 있었다.
물 주던 일을 멈추고, 아직 살아있는 듯한 일일초의 끝쪽 가지를 잘라 물꽂이 보험을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긴 휴식기를 거치고 예쁜 초록잎을 내보냈던 포인세티아는 여름도 잘 견뎠지만 살뜰한 돌봄이 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식물은 걱정이 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휙 하고 부는 바람을 따라 낮에 비누와 걸었던 산책로를 혼자서 걸었다.
어두운 산책로를 밝히는 새로 설치한 수은등 같은 노란 led 불빛이 운치를 더하니..
잠깐 사이에 느낀 사색의 바람은 못해본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것.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괜찮을 일의 비율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의 비율을 늘려가도 괜찮겠다는 것.
순식간에 가을이 온 것 같다.
좋아하는 가을 밤바람이 부니 이제 좀 살겠다.
인생의 계절 순서는 사계절의 순서를 닮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인생의 봄과 여름은 시간은 양마저도 계절과 닮아있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 가을의 시간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봄과 여름을 지나며 고운 머리카락은 바람결에 훌훌 잘도 날아갔다.
올 가을엔 이미 서리가 내린 숱 없는 짧은 머리도 풀어헤치고, 거추장 거려 넣어둔 바바리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서 볼까 한다.
인생의 가을도 왔으니 가을옷이 잘 어울리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시작된 가을을 느낀다.
봄처럼 짧을지도 모를
인생의 가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