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날아오르길..
우리 집의 공식적인 마지막 졸업식인 둘째의 대학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은 늘 찡하다.
나의 졸업식이 그랬고,
내가 아닌 이의 열여섯 번의 졸업식이 그랬다.
눈물이 났던 졸업식은 아이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부실했지만 그래도 울타리 안에 아이가 있음이 내 마음엔 든든하기도 했다.
한 때 부실한 울타리 밖으로 데리고 나올 뻔했으나 엄마인 내 마음이 의지할 울타리여서 박차고 나오지 못했고 아이들은 버텨주었다.
다행히도 심각했던 고비에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건 우리의 큰 행운이었다.
부실한 울타리를 정성껏 수리하고, 울타리 안팎의 나약한 양들을 보살폈던 선생님들께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학교란 울타리를 벗어나 울타리 없이 홀로 서야 하는 성인의 사회로 나가는 일이 그렇게 마음이 안쓰러웠다.
겉에서 보면 환경적인 것에 아쉬움이 없이 보이는 아이에게 왜 “안쓰럽다”라고 표현하는지 묻는다.
자식에겐 늘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자식에겐 늘 부족한 부모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았기에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를 보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비관론자는 아니지만 결국엔 모든 인생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나는 안쓰럽다 고 표현한다.
내 아이뿐 아니고, 강당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목이 메어왔었다.
엄마의 마음으로.. 앞선 인생을 살아온 인간으로서..
아이들에겐 그 울타리가 답답한 구속이라 여겨졌을 것이고, 자유를 향한 구속의 마지막 끝맺음에 신나고 설레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훗날에 삶을 살아가다가 혹은 부모가 되어 만나게 되는 졸업식에서 아마도 안쓰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졸업이란 끝과 시작을 동시에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선 2월에 졸업을 하고 3월에 시작하는 반면 미국의 학교들은 6월에 졸업을 하고 9월에 시작을 한다.
을쓰냥하고 추위가 다가오는 계절에 시작하는 것보단 만물이 생성하는 따뜻한 봄에 시작을 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아이는 방점(傍點)을 찍고, 또다시 출발선에 선다.
마지막 졸업식을 맞아 우린 4인 가족이 합체하여 졸업자를 마음껏 축하하고 즐기는 날을 보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띄웠다.
풍성한 꽃다발을 마련하고, 큰아이가 사 온 작은 축하케이크에 불을 붙여 소원을 빌었다.
멋진 순간을 남기기 위해 여러 카메라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학교 홍보 모델 같다. 멋지다!”
조금은 낯간지럽고, 오버스러운 축하엔 마무리를 잘했고, 힘찬 새 출발을 하길 바라는 진심만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사진이 마음에 들게 잘 나왔다.
사진 속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행복해 보인다.
사진이 거짓이란 말을 하기도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진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흐릿해지는 기억이 사진으로 되살아날 때 좋은 기억으로 덮어지면 좋지 않은가..
그래서 사진 찍을 땐 어색하더라도 맘껏 오버를 해도 좋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고 했듯 누구의 고통이 또는 어떤 힘듦이었는지 경중을 따질 순 없다.
아이들의 청소년기가 우린 참 힘들었고,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느낀 그 힘듦은 부모로서의 내 마음이었고, 직접 겪은 아이들의 힘들었을 깊이는 내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많이 아프지 않았길 바라고, 흉터가 크게 남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렵게 지나온 시간만큼 단단한 초석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네가 던진
날아오른 모자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길
고민은 신중하게
결정된 일엔 믿음을 갖길
지금까지 그랬듯이
꿋꿋이 너의 길을 가길
고맙다. 잘 지내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