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따끈한 옛날 옛적에..
눈이 오면 생각나는 외할머니의 라면
마지막 눈일까?
강원도엔 무척 많은 눈이 내렸고, 오늘은 중부지방에도 눈 예보가 있다.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다.
집에서 보는 눈은 포근해 보이고 참 예쁘다.
눈을 좋아하는 나는 마음 같으면 밖으로 나가 눈을 맞고 눈을 만지고 싶지만...
그저 자꾸만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눈처럼 소복소복 쌓인 추억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막다른 골목에 있던 우리 집과 셋째 이모네 집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눈 오는 날의 그 골목은 온전히 우리 것이었다.
수원까지 먼 길을 출근해야 했던 이모의 집엔 외할머니가 함께 사셨다.
당시엔 가장 따뜻한 옷으로 챙겨 입어도 솜 넣은 잠바였고, 빨간 내복을 껴입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스웨터와 엄마들이 짜준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끼고 추운지 모른 채 사촌들과 눈싸움을 맘껏 할 수 있었다.
양쪽집 문을 열어놓은 채 오가며 숨고 옥상에서 눈을 던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 같이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콧물이 줄줄 나도록 놀다 보면 벙어리장갑은 더덕더덕 얼음이 붙은 얼음장갑이 되어 사실 보온의 효과가 없이 무겁기만 한 상태가 되는데 바로 그때 외할머니는 라면을 한솥 끓여놓고 우리를 부르셨다.
“얘들아, 춥다. 어여 들어와~ 라면 먹어~“
아무리 재밌어 더 놀고 싶어도 그 부름엔 거절할 재간이 없는 유혹이었다.
우리가 따뜻한 방에서 옹기종기 앉아서 라면을 먹을 동안 할머니는 면과 국물을 조금 남겨둔 솥에 찬밥을 넣어 끓이셨다.
풀코스 라면 정식!
그때의 라면맛은 그야말로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다 먹고 나면 배부른 할머니의 강아지들은 방바닥에 녹아 붙었다.
오빠는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며 어른이 되어서도 외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할머니의 라면 비법은 라면 수프를 반만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셨다.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맛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무리 따라 해 보아도 기억 속의 맛은 나지 않았다.
‘아마도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넣은 비법 때문이었겠지’
새하얀 골목에서 눈놀이를 한 그날밤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져 꿀잠을 잤었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연탄
다음 날 아침
우리의 놀이터였던 새 하얗던 골목은 살색의 골목길로 변한다.
묵직한 까만색 연탄이 완전연소로 잘 타고나면 살색의 가벼운 연탄재가 된다.
밤새 가족들을 따뜻한 아랫목에서 잘 수 있도록 불사르고 차갑게 식은 살색의 연탄재는 아침이면 모든 집의 대문옆에 쌓인다. 전날부터 차곡차곡 쌓인 살색의 연탄재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청소부 아저씨들이 치워가는데 눈 온 날은 아저씨들이 오지 않았다.
눈이 온 다음날 새벽엔 약속한 듯 집집마다 사람들이 나와 밤사이 꽁꽁 언 눈길 위에 살색의 연탄재를 잘게 부숴 뿌려 놓았다.
내 집 앞을 넘어 골목 끝까지 뿌려두면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고 안전히 갈 길을 갈 수 있었다.
소심하고 조심성이 지나친 내가 만일 일찍 일어나게 되면 연탄재를 발로 콱콱 밟아 부수는 파괴의 쾌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눈이 오면 느낄 수 있는 좋은 기분에 덤까지 얻었던 셈이다.
어느 집은 연탄 광에 수백 장의 연탄을 배달로 들였고, 어느 집은 하루치 연탄을 직접 사들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일은 불과 50년도 안된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손에 묻을까 겁나던 까만 연탄이 살색 연탄으로 변하는 시간은 공기순환 불구멍 조절에 따라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렸다.
위쪽 까만 연탄에 1/4쯤 불씨가 남아 있을 때 아래쪽으로 내려놓고, 그 위로 새 연탄을 올려 구멍을 잘 맞추어야 한다.
프로 연탄 갈러가 되면 잠깐의 숨만 참으면 순식간에 맞추지만 초보의 경우는 숨을 한참참고 들여다보며 구멍을 맞추고 나면 뜨거움과 일산화탄소의 매캐한 냄새로부터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어른들은 잠들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 연탄을 갈고, 추운 새벽에 먼저 일어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연탄을 갈아 넣어야 밤새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가장 졸리고 눈이 안 떠지는 힘든 시간에 연탄을 갈아야 했다.
누군가였던 어른은 주로 엄마였다.
그것은 수고로운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 시대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ㅇㅇ동에서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종종 나왔고,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몽롱한 정신에 마당으로 뛰쳐나와 동치미 국물을 들이켜고 살아난 주변 사람이 한두 명쯤은 꼭 있었다. 슬프게도 오빠는 절친을 대학생 때 자취집의 연탄가스 중독으로 잃었다.
그 위험성과 환경오염의 이유로 연탄 구들장이 점차 사라진 것이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우리 집엔 고등학교 때쯤 석유보일러와 연탄보일러를 함께 사용하는 절약형 말하자면 하이브리드식 난방 장치가 설치되었다.
아파트가 늘어나며 지금은 대부분의 집은 방안에서 편히 조절하면 되는 보일러 시스템을 갖추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연탄은 많은 추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며 존재하고 있다.
그 옛날옛적의 연탄으로 뜨거워진 아랫목은 항상 두툼한 이불이 깔려있고, 밥시간을 놓친 가족을 위한 밥공기가 들어있었다.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우면 커튼까지 닫아도 어딘가로 숭숭 들어오는 바람으로 콧등이 알싸한데 등은 따끈따끈한 기분이 좋았다.
눈이 오면
내 나이 서른다섯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눈이 오면
훨씬 춥고 위험했던 구들장의 아랫목 온도가 더 따뜻했다고 느껴진다.
눈이 오면
따끈따끈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눈 오는 날이 좋다.
발행을 누르려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데 신기하게도 오빠의 이야기가 두 내용에 모두 들어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연년생으로 나이가 붙은 이종 사촌들과는 추억이 아주 많다.
친오빠와는 나이 차이가 있어 눈 오는 날 함께 놀지도 않았는데..
눈이 오면 오빠가 생각난다.
눈이 오면 가족이 그리워진다.
나는 눈 오는 날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