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없는 보름나물과 오곡밥, 부럼 깨기
* 보름나물과 오곡밥 *
보름나물과 오곡밥은 정월 열 나흘(음력 1월 14일)에 먹는다.
아홉 가지나물과 다섯 가지 곡식이 들어간 오곡찰밥을 지어 아홉 번 먹고, 아홉 짐의 나무를 해오던 풍습이다.
땔감 나무를 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도 때를 맞춰 먹는 풍습은 큰 즐거움과 기대를 하게 된다.
* 부럼 깨기 *
부럼 깨기는 대보름 날인 15일(음력 1월 15일) 아침에 눈을 뜨면 딱딱한 견과류를 와삭 큰소리를 내며 깨물어서 버린다.
보름날 부럼을 깨지 않은 사람에게 “내 더위 사가라~“ 하고 말하면 더위가 옮아간다는 고약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머리맡에 부럼을 준비해 두었다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와도 말을 나누기 전에 부럼을 깨야 한다. 기억하기!
부럼이란 말이 부스럼에서 온 것은 아주 옛날엔 종기를 포함한 피부의 부스럼으로 죽기도 했다니 무척 공포스러운 병이었을 것이다. 액땜을 하듯 부럼을 깨서 버리며 일 년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니 간단하면서도 뜻이 좋은 이벤트라고 생각된다.
부럼용 견과류는 전통적으론 단단한 껍질을 까지 않은 피땅콩, 호두, 잣, 밤을 사용했다.
자칫하면 치아가 상할 수 있으니 부럼 깨기용은 피땅콩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요즘은 비싸서인지 큰 시장을 가면 모를까 고동색의 딱딱한 껍질째 있는 잣을 보기가 어렵다.
신기하게도 오늘 마트의 부럼용 견과류를 파는 코너에선 땅콩, 호두와 함께 피스타치오를 팔고 있었다.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재밌기도 하다.
어릴 적에 외할머니는 딱딱한 잣을 망치로 적당한 힘을 주어 콩콩 두들겨 상처 없이 뽀얗고 고운 알맹이가 나오면
끝이 뾰족하고 힘 있는 초록색 솔잎 두세 개쯤을 잣의 동그란 부분에 콕 끼우고 솔잎을 손에 쥐어 주시고, 불을 붙여주셨다.
기름진 잣은 아주 잘 탔다. 그 부드러운 작은 불이 꺼지기 전에 소원을 빌었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잣불은 아주 귀엽고 예뻤다.
해마다 올해는 안 할 거야...... 하면서 결국 올해도 콩과 팥을 불리고, 건 피마자 잎을 불린다.
잡곡을 넣어둔 선반을 열어보니 서리태 콩과 팥, 찹쌀과, 수수, 좁쌀, 보리, 현미가 있으니 이만하면 오곡찰밥은 가능하겠다.
또 뒤적거려 보니 건 피마자잎이 나왔다. 시래기가 없어서 아쉽지만 일이 줄었으니 한편 다행이기도 하다.
피마자잎과 콩, 팥을 불려두고, 마트로 가서 생 취나물과 호박, 느타리버섯, 콩나물, 무를 카트에 담았다.
옛날의 정월달엔 신선한 채소가 없었으니 건나물을 사용했었겠지만 지금은 제 철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초록의 채소들이 나온다.
말린 시래기와 부지깽이를 살까 약간 고민했지만 하기 쉬운 나물거리들을 샀다.
그리고 부럼 깨기용 피땅콩을 사 왔다.
보름나물은 말린 것을 사용하니 품이 많이 든다.
전날 불리고-삶고-손질하고-다시 볶고..
오곡밥도 콩과 팥을 미리 불려야 하므로 완성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셈이다.
손이 많이 가니 맛있을 수밖에...
어떤 때에 맞춰서 해 먹는 음식 중 가장 번거롭고 어려운 것이 보름날의 음식이다.
시간을 가치와 비용으로만 환산하여 계산한다면 사 먹어도 되겠지만
따스한 잣불의 추억과 어렴풋해진 엄마의 음식맛을 기대하며 특별식을 만드는 것은 나의 재미이다.
번거로워도 막상 해서 감칠맛 나는 말린 나물반찬과 짭조름하게 간이 잘된 오곡밥에 김을 싸서 먹으면..
요즘 애들 말로 “저 세상 맛!”
‘글을 마무리하고 일어나 얼른 나물을 해야 저녁으로 먹을 수 있겠다’ 란 생각을 하다가 교정했던 글을 다 날렸다..
다시 주섬주섬 떨어진 글을 모아봤지만 좀 전의 글과 다른 맛이 나는 것 같다..
오곡밥과 나물 준비를 마치고 쓰려고 했던 피마자잎 나물과 오곡밥의 레시피는 내년으로 미루고,
저녁 시간이 더 늦어졌지만 저 세상 맛을 위하여 움직여보자.
오늘의 교훈
급하다고 서두르다간 다 망친다!
급할수록 차분하게..
건강한 한 해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