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내 나이 사십 중반이 되니 자꾸만 나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요즘이다. 다양한 대중매체 속에서 영화, 음악, 드라마의 향연이 꽃을 피우고 있지만, 어찌 된 지 나는 옛 영화와 드라마의 감수성에 빠져들고 있다. 음악 역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OST들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채워가는 나날들이다.
얼마 전 TV를 시청하다가 낯익은 옛 멜로디 하나 가 떠올랐다. '분명히 아는 곡인데 무슨 영화 OST 같은데...'
호기심 대마왕인 나는 재빠른 검색으로 곡명을 금 세 찾을 수 있었다. 열렬한 첫사랑의 홍역을 치른 적 없는 나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시린 노래. 손예진, 조인성이 출연한 영화 클래식의 메인 주제곡 '사랑하면 할수록'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영화를 본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감정에 끌리 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다시 또 봐도 영화 속 나의 베스트는 바로 이 장면이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간절했기에 누구보다 소중한 사랑을 했던 두 남녀. 그러나 두 사람의 현실은 부풀어진 사랑만큼 녹록
하지 못했다.
사랑은 진실했지만,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헤어짐 을 선택해야만 하는 그들의 이별은 시절의 어긋남
이었을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만 나 열렬히 사랑하기까지 나는 그 시간들 속에 분명
히 인연의 끈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 마음 이 활활 불타오를 땐 상대의 마음이 꺼져가는 불씨
가 되어가거나, 뒤늦게 내 마음의 진심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은 내 곁에 없을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세월을 돌고 돌아 비로소 사랑을 완 성할 때 같이 눈물을 흘리며 감정이입에 빠지는 것
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믿는
편이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중요하듯 사소한 타이
밍이 우리의 사랑을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말이다. 어찌 보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잊을 수 없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이치일 수도 있다. 사람은 옆에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사랑에 처음 눈뜨던 그 시절, 그 또는 그녀와의 인연이 거기까지
였음을...... 애달픈 마음을 뒤로하고 현실을 인정해
야 함을.......'시. 절. 인. 연'이라는 네 글자가 구구
절절 가슴에 쏙 들어박힌다.
내게는 절절한 첫사랑의 기억은 없지만 열일곱 소 녀의 수줍은 짝사랑만 남아있다. 타고난 소심함이
어디 가리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종종 써주고, 행 동대장처럼 염탐도 자처했으나 내 사랑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첫사랑의 페이지
는 마치 풋풋한 추억 속 오랜 유머 같은 느낌이다.
내가 너무나도 애정하는 '시절인연' 그 자체인 영화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펼쳐볼까 한다.
바로 하루를 살아도 만나고 싶은 사랑,
영화 'ONE DAY'이다.
다섯 번을 보고 또 봐도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르고 또 흐르는 새드무비. 울고 싶을 때 촉촉하게 울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이자 포스터만 봐도 내 가슴이 미어진다. 18년의 세월 동안 이어질 듯 어긋나는 그들의 역사는 사랑과 우정 그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그들이 처음 인사를 나눴던 졸업파티에서 짜릿한 원나잇을 이뤘다면 엠마와 덱스터는 서로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덱스터 부모님의 등장으로 그들은 아쉬운 경험을 공유했고, 닿지 못한 아쉬움을 쌓아두게 되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깊이는 커져갔지만, 끈끈한 우정의 위대함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때에 따라 그들에게는 다른 연인이 있었고, 허울 좋은 남사친 여사친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속였다. 단둘이 떠나는 여행 속에서 태연한 척했지만 콩닥콩닥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약 주인공 엠마였다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정말 어려웠을 것 같다.
결혼을 앞둔 덱스터의 눈빛에서 자체발광 아련함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말하지 않아도 언젠 가는 덱스터가 먼저 손 내밀어 주리라 믿었던 엠마
의 충격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끊어내지 못한 우리의 인연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너와 나 언젠
가는 평생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영화 속 엠마가 되어 마음속 이야기를 되내어 본다.
상처로 얼룩진 결혼생활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는 비로소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녀는
동화작가의 꿈을 이뤘고, 근사한 애인과의 장밋빛
미래를 앞두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모습과 상반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의 현실.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왔지만, 그의 마지막 사랑은 오직 엠마뿐이었다. 뒤늦은 설렘을 안고 그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지친 엠마는 덱스터의
손을 놓기로 한다. 웃으며 안녕, 그녀의 행복을 빌
며 떠나려는 순간 그의 뒷모습에 무너지고만 그녀
가 그를 향해 달려온다.
서로 마주 보며 한결같은 애정을 주고받는 두 사람.
그들의 길고 긴 사랑의 여정이 드디어 끝났음을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흘러 행복한 결혼 생
활을 이어가던 평범한 하루의 어느 날. 비극은 예상
치 못하게 찾아왔다. 덱스터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그의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엠마는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들은 다시 노력하기로 한다.
'이제 됐어. 그들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고, 행복
한 일만 남았으리라.'
나는 뻔하디 뻔한 해피엔딩을 너무나도 기대했었
다. 그러나 일상다반사라고 했던가. 믿을 수 없는 사고가 그녀를 덮쳤을 때,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 이 새어 나왔다. 비극 같은 운명에 인생무상의 감정
에 휩싸였고, 나의 눈물샘은 그칠지 몰랐다.
홀로 남겨진 그는 망연자실했고, 나는 어째서 그들에게 가혹한 운명을 선사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신이시여, 정녕 꼭 그래야만 했나요?'
시작이 어긋나면 끝도 어긋나는 게 당연한 걸까.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그리움에 사무쳐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당신도 시절인연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 반짝이던 모두의 순수한 사랑은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시는 인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다짐은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 또 다른 버팀목이 되어 줄 운명을 꿈꾸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