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기댈 수 있는 사람”
서로를 다시 알아보는 시간
인생이 끝자락을 향해 가고 나서야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서로를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조용히, 따뜻하게 기대기 시작했다.
기댈 수 있는 사람
Chapter 1. 늦은 사랑, 깊은 의지
Chapter 2. 작은 거실 극장, 두 사람
Chapter 3. 스쿠터 옆자리
Chapter 4. 리모컨 알람
Chapter 1.
늦은 사랑, 깊은 의지
아빠는, 참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말보다 침묵이 더 익숙했고,
사랑보다 외면이 먼저였던 사람.
젊을 적엔 바람기도 있었고,
엄마 마음에 상처도 자주 남겼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평생 묵묵히 감당해 냈다.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집안의 모든 무게를
혼자 짊어진 사람.
자식 셋을 거두며,
그저 살아내기 바빴던 엄마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아빠가 아팠다.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세상과의 접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조용히 변해갔다.
산책을 나가면 아빠는 꽃을 자꾸 주워왔다.
예전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꽃잎이 예쁘다고,
그저 땅에 떨어진 걸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처음엔 나도 이상해서 물어봤었다.
“아빠 뭐 해, 꽃을 왜 자꾸 주워?”
그랬더니 아빠가 숨을 조금 쉬고, 말했다.
“너희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야, 좋아하는 꽃이야.”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
아, 아빠도 이제야
사랑이라는 걸 배우고 있구나.
몸이 아프고, 마음이 작아지고,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서야
곁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비로소 느낀 거였다.
엄마는 여전히,
그 아픈 아빠를 돌보고 있었고
아빠는 그 엄마를 바라보며
작은 꽃을 하나하나 모았다.
그건 그냥 꽃이 아니라,
늦은 사과였고,
늦은 사랑이었고,
말 못 했던 고마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결국,
마지막이 가까워지고서야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이
하늘을 떠받치던 땅 같은
존재였단 걸 알았던 거 아닐까.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하늘이 떠 있다면,
그걸 바치던 땅이 바로 엄마였단 걸.
병든 남편 곁에 묵묵히 앉아 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아빠에게는 결국 사랑을 가르친 순간들이었다.
조금 늦게 핀 꽃이었지만
그래서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Chapter 2.
작은 거실극장, 두 사람
아픈 아빠에게 일상이란 침대였다.
움직이는 건 힘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엄마랑 나란히 누워 같이 티비를 보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늘 엄마 옆에 있었다.
가만히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돌리다가
엄마가
“어? 뭐라 그랬지?”
“방금 지나간 사람 누구야?”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야?”
하고 묻기라도 하면
아빠는 꼭 대기하고 있었단 듯
해설자처럼 천천히, 꼼꼼히 설명을 해줬다.
어떤 날은 드라마 줄거리를
내레이션 하듯 다시 말해주고,
어떤 날은 예능 리액션을
같이 하면서 웃기도 했다.
엄마는 못 들은 걸 되묻고,
아빠는 들은 걸 풀어서 다시 전하고.
그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오래된 시트콤 같기도 하고,
평생 함께 살아온 부부만이
만들 수 있는 소리 없는 교감 같기도 했다.
그 거실 작은 티비가
어쩌면 두 사람의 작은 극장이지 않았을까.
밖에선 바람이 불고,
세상은 바쁘게 굴러가지만
그 작은 방 안에서는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흘렀고,
그 속에서만큼은 모든 병도,
아픔도 조금은 멀어졌던 것 같다.
나는 그 장면을 문득문득 떠올려본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이해해 주는
그 조용한 대사들 속에
두 사람의 사랑이 보였으니까.
그냥 티비 한 편을 보는 게 아닌 두 사람에
이야기고 사랑 같았다.
Chapter 3.
스쿠터 옆자리
엄마는 늘 아빠 곁에 있었다.
거의 집을 나설 일이 없을 정도로
아빠 곁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아빠 옆에서 하루를 끝냈다.
끼니는 자주 건너뛰었고,
먹더라도 대충, 급하게,
아빠가 잠든 틈에 쏜살같이
씹고 넘기는 식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살이 붙고,
속은 자주 더부룩했고,
허리는 자주 찌릿거린다며 아파했다.
근대 엄마는 늘 괜찮다고 말했다.
“병원은 나중에 가도 돼” 말만 하면서
근데, 정말 안 괜찮았다.
걷다가 쪼그려 앉고,
허리를 감싸며 자꾸 숨을 고르는 걸
아빠도 나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병원을 갔더니 협착증이었다.
노화도 있지만, 무리해서 그렇다고.
엄마는 치료를 받았고,
마약성 진통 주사도 맞았다.
엄마는
“이거 맞으면 괜찮아져” 하면서 애써 웃었다.
아빠는 그게 더 속상했겠지.
그러더니 엄마 아빠는 둘이 약속을 했다.
“매일 산책하자, 운동이라도 해야 해.”
그렇게 아빠는 스쿠터를 탔고,
엄마는 그 옆에서 따라 걸었다.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단짝이었다.
그러다 아빠가 나한테 말했다.
“스쿠터 옆에 조그만 범퍼카 같은 거…
엄마 태워서 다닐 수 없을까?”
그 말을 듣는데 웃음 나왔다.
그게 얼마나 귀엽고,
또 마음이 찡한지.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상상했다.
스쿠터 옆에 달린 꼬마차에
엄마가 타고, 아빠는 운전하고,
두 사람이 그렇게 같은 속도로 같은 길을 가는 걸.
아프고 지치고 힘든 시기였지만
그 시간 속에서조차 서로를 향한
사랑은 참 다정했던 거 같다.
“누가 더 힘들까”보다
“당신은 덜 아팠으면 좋겠어”를
말하는 거 같아서.
Chapter 4.
리모컨 알람
아빠의 침대는 거실에 있었다.
병원용 전동침대를 집에 들여놓고
우리는 거실을 아빠의 방으로 꾸몄었다.
거실은 TV도 있고 창도 있어서
아빠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기도 했었다.
엄마는 그 거실을 하루 종일
오가며 아빠 곁을 지켰다.
식사를 챙기고,
약을 챙기고,
침대 옆 탁자를 정리하고,
다리를 주물러주고,
힘들면 어깨를 안아주고.
그러다 너무 피곤한 날이면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겨우 눈을 붙이곤 했다.
아빠는 새벽이나 아침에 먼저 깨 엄마를 찾았다.
“유진 엄마?”
“유진아?”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항상
엄마는 “왜?” 또 왜!! 하며 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엄마가 너무 지쳐 대답이 없고
움직이지 않을 때면 아빠는 슬며시 리모컨을 들었다.
그리고...
TV 음량을 끝까지,
최고로 올려버렸다.
갑자기 집 안에 울려 퍼지는
웅웅 거리는 뉴스 소리, 드라마의 대사,
액션 영화의 총소리까지.
그럼 엄마는 화들짝 놀라
문을 벌컥 열고 나왔고,
그 앞엔 아빠가 씨익 웃고 있었다.
마치 장난을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허허” 웃던 아빠.
엄마는 그 장난에 웃다가도
“또 시작이네..”
그러고는 아빠 앞에 앉아 TV 소리를 줄였다.
아빠는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깨웠다.
엄마를 향한 아침 인사는
소리 가득한 웃음이었고,
그 속엔 ‘이리 와 ‘라는
다정한 말이 숨어 있었다.
그 시간들이,
지금은 조금 그립다.
그 장난도,
그 TV 큰 소리도,
아빠의 웃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