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처음엔 낯설게 시작된다”

part 3.

by 이안



“아픔은 처음엔 낯설게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드는 변화.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견디고, 버티고, 사랑하려 애썼다.






아픔은 처음엔 낯설게 시작된다


Chapter 1. 손끝의 기억


Chapter 2. 웃음이 머물던 자리


Chapter 3. 눈물이 많아진 그


Chapter 4. 입맛이라는 추억






Chapter 1.


손끝의 기억


손톱깎이를 볼 때마다

문득, 아빠가 떠오른다.


병상에 오래 계셨던 아빠는 손톱과 발톱이

어찌나 빨리 자라던지, 그 조그마한 것들이

때론 아빠 자신을 다치게 했었다.

잠든 사이, 무심히 긁힌 팔뚝이나 뺨엔

작은 상처들이 말없이 남아 있곤 했다.


쉬는 날,

내가 집에 가면 아빠는 날 보자마자


“이안아,” 하고 부르셨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조용히 내민다.

나는 익숙하게 물었다.


“손톱 깎자고?”


그러면 아빠는 짧은


“응,”


한 마디와 함께 작게 웃었다.


아빠에 손톱 발톱을 깎는 일은

엄마는 시도조차 조심스러워했다.


나이가 들며 흐려진 눈으로 아빠의 손발을

어설프게 다루다 혹시 상처라도 낼까 봐.

그래서 그건 늘 나에게 맡겨졌다.


그렇게 나는,

작은 손톱깎이를 들고 아빠의 거칠어진

손을 잡고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한 조각씩,

사랑을 깎아내듯 다듬었다.


아빠는 그 시간 동안

거울도 TV도 보지 않았다.


대신 내 손끝을 바라보며

그저 말없이 가만히 계셨다.


그 조용함은 꼭,

무언가 큰 임무가 주어진 듯 느껴졌었다.


그 시간은 아빠가 말없이

내게 기대는 시간이었고,

나는 말없이 아빠를 안아주는

시간인 거 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교감이

손끝으로 오고 갔다.


요즘도 손톱깎이를 보면

그 기억이 조용히 스며든다.


그 침묵

그 따뜻함


그리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던

서로를 위한 그 마음.








Chapter 2.


웃음이 머물던 자리


방문 목욕차가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야근을 마치고 부리나케

대구 집으로 향하던 중,


익숙한 차량이 집 앞 주차장에

서 있는 걸 보았다.


창문을 살짝 내리고 안을

들여다보던 찰나,

목욕차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빠였다.


“아빠!”


무심코 튀어나온 내 목소리에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셨다.


그 미소는 오래 전의 아빠를 닮아 있었다.

힘겨운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고이 남아 있었던 표정.


그 순간, 내 입꼬리도 조용히 따라 올라갔다.


그러자 목욕차 안에 있던 관리사분들이


“아버님이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봐요.”


“따님이 아빠를 똑 닮았네에.”


하며 웃어주셨다.


나는 차에서 내려

아버지의 휠체어를 직접 끌었다.


햇살 좋은 날,

그 짧은 거리의 귀가가 참 오랜만에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 웃음 하나로.







Chapter 3.


눈물이 많아진 그


아버지는 원래 눈물이 없는 분이었다.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한 기질과

오랜 삶의 단단함이 스며든 사람.


힘든 일 앞에서도 입을 꾹 다물며 버티는 게

익숙했던 그런 아버지.


그런데 병이 깊어지고,

몸이 약해질수록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울면

아버지도 같이 눈시울을 붉혔고,

감미로운 노래 한 소절에도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돌리곤 하셨다.


처음엔 낯설었다.

눈물이란 감정이 아버지와 어울릴 줄 몰랐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건 아버지가 약해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마음이 열렸다는 증거였다.


쇠약해지는 몸처럼 감정의 문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고,

그 틈으로 밀려드는 감정들에

아버지는 더 이상 벽을 세우지 않았다.


그 모습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꼭 닫혀 있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비로소

엿볼 수 있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삶이 아버지를

조금씩 앗아가는 동안,

눈물은 그가 남긴 작은 흔적처럼

우리 곁에 자주 머물렀다.


말보다 더 깊은 감정이

그 조용한 눈물 안에 담겨 있었다.







Chapter 4.


입맛이라는 추억


병이 깊어지며 아버지는

예전처럼 많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


입맛도 줄고,

한입만으로도 힘들어지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버지의 머릿속엔 자꾸

떠오르는 맛들이 있었다.


“그때 먹었던 회덮밥 맛있었지…”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찰떡, 기억나?”


입에 제대로 넣지도 못할

음식들을 자꾸만 떠올리셨다.


어쩌면 그것들은 음식이 아니라

건강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아버지를,

맛으로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으니까.


그럴 때면 엄마는,

입 떨어지는 음식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사러 가셨다.


시장 끝, 백화점 한구석,

멀리 떨어진 단골 맛집까지.


아버지가 “먹고 싶다” 한마디만 하면

엄마는 그 말 하나에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힘들게 사 온

음식을 아버지는 한입,

두 입 먹고 말았지만

엄마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도 한입은 먹었네.”


“오늘은 냄새 맡고도 좋다 했잖아.”


두 분을 지켜보는 나는 마음 한편이

찡하면서도 따뜻했다.

지극한 정성과 지고한 사랑이

그 좁은 식탁 위에 조용히 오갔으니까.


음식은 곧 마음이었고,

그 마음은 늘 둘 사이를 오갔다.


그건 단지 먹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