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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6. <소울메이트>의 시작과 끝

by 빛과 그림자

식탁 위에 반으로 잘린 방울토마토와 작고 동그란 스낵용 모차렐라 치즈, 양상추와 루꼴라에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가 뿌려진 신선한 샐러드, 어묵을 넣은 쌀떡볶이, 두부를 작은 큐브 모양으로 썰어 넣은 일본 된장이 아닌 국산 된장으로 만든 미역 된장국. 식탁 위, 하얀 도자기에 음식들이 깔끔하게 담겨있었다. 식탁은 마호가니 소재로 심플한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이었다. 의자는 철제로 만들어진 틀에 등받이와 앉는 부분만 가죽을 씌운 현대적 스타일이다.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선구적 디자인으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지나는 희재 새엄마가 차려준 점심을 보고 난감했었다. 음식 종류가 다양했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뷔페에서나 선택 가능한 조합이었다.

희재의 새엄마는 지나를 무척 반겼다.

" 이사하고 처음 온 거지?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어머니는 늙지를 않으시네요. 어쩜, 이렇게 변함없이 아름다우세요."

지나는 희재가 늙으면 새엄마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다. 희재의 새엄마는 넓은 거실을 지나, 현관문으로 가는 긴 복도 앞에서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친구들과 영화 보고 올게. 둘이서 점심 맛있게 먹고, 편하게 놀아."


지나는 희재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너네 집, <기생충> 영화에서 나오는 집 같아. 지하실에 누군가 살고 있는 거 아니야?”

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지하실이 없어.”

“영주한테, 네 소식 들었어. 완전히 귀국한 거야?”

“응.”


희재와 지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눈만 마주치며, 접시들을 깨끗하게 비웠다. 음식들은 먹어 보니 다 맛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희재는 캡슐 커피를 내린 후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부어, 아이스 라테를 만들어 주었다. 둘 다 얼음을 넣지 않은 아이스 라테를 좋아했다.


“영주는 엄마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역을 대행하게 됐어. 카페는 혜리라는 찐 팬이 친구와 일주일 동안 맡아 주기로 했대. 나도 이따가 쿠키 구우러 가야 해.”

“어쩐지. 영주, 나한테는 연락도 안 하고. 네가 나한테만 할 말 있어서 혼자 온 줄 알았어.”


지나는 희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시작하려면, 관계를 되짚어야 했다.


‘알긴 아는 거야? 너, 한나에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팀이 활동 그만두기 전에 셋이서 나를 피했었잖아. 셋이라기보다는 한나랑 너. 영주는 중립적이었지. 내 편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


지나는 희재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희재는 덤덤했다. 긴 속눈썹을 가진 큰 눈을 지나의 말하는 입에 고정하고 있었다.


“한나를 설득하고 있었어. 재민 대표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재민 대표가 자주 전화나 문자를 보냈거든.”

“뭐, 뭐라고?”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소울메이트>”

"목적이 돈이 아니었잖아. 그 엄청난 코스프레 용품들이 다 어디서 났는지 의심해 본 적 없어? “

“ 없어. 작은 빌라에서 합숙했었잖아. 잠자리며 먹을 거며 그저 그랬는데.”

“우리 코스프레로 팬들 확보했잖아.”


희재는 답답한 듯 식탁을 쳤다. 그리고는 지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작가 지망생 맞아?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무슨 글을 쓴다는 거니? 요즈음도 글 쓴다며. 소설에, 요리에. 음악도 시작하자며. 근데 비용 계산이 이렇게 안되니.”


지나는 희재의 말을 듣자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너야 말로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한 애 맞아? 네가 팀해체 발표 후 일주일 뒤 자살 시도해서, 무서워서 한국을 떠났어.

도대체, 너란 애는.”

지나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멈추었다. 자기 목숨 가지고 흥정하는 사람을 자극하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지나의 혀를 붙들었다.


“미안해. 죄책감 때문이었어.”

희재는 지나의 손을 잡았다.


“나 때문에 엄마도 죽고, 나 때문에 팀도 해체되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사는 게 귀찮아져서 엄마 곁으로 가려고 했어.”


지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팀해체가 왜 너 때문이야?”

지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한나한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야. 재민 대표와의 관계를 내가 갈라놓으려고 했대.”


지나는 놀란 표정으로 희재에게 물었다.

“둘이 사귀었어? 한나와 재민 대표는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오디션장에 한나도 있었으니까. 둘이 지금은 결혼했어도 그때는 아니었어. 너랑 재민 대표가 먼저 사귄 거야?”

“아니, 한나는 재민 대표와 운명 공동체라고 했고, 재민대표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했어.”

“운명 공동체는 뭐고, 선택의 기로는 뭐야?”


희재는 지나를 바라보다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주위를 맴돌다가,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3인용 , 1인용 오렌지 색 가죽 소파와 하얗고 둥근 대리석 티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티테이블 가운데 고급스러운 잭 오 랜턴이 놓여 있었다. 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작품 같았다.


“호박등이 왜 이렇게 고급스러워? 번쩍번쩍한다.”

“아일랜드 작가가 만든 조각을 새엄마가 최근에 샀어. 핼러윈이 원래 아일랜드 풍습이었대”

“새엄마가?”

"새엄마가 잭 오 랜턴에 꽂혔어. 그냥 좋대. 우리 집안 마스코트래.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더라고."


지나는 희재가 1인용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3인용 소파에 앉았다. 거실 통창 밖으로 잘 관리된 잔디 정원이 펼쳐졌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나쁜 부부의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둘의 비밀?”

“재민 대표의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한나에게도 비밀이 됐겠지.”

"그건 어떨지 모르지."

“재민 대표가 사이비 종교에 복수할 거라고 했어. 내가 자기와 함께하면.”


지나는 소설 같은 희재의 이야기를 꼼짝 않고 귀 기울여 들었다.


*


혜리는 아침부터 바빴다. 최근에 영주 언니네 쿠키가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 영주언니가 바빠져서, 혜리는 영주언니의 가게에서 월, 수, 금, 8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혜리는 영주언니가 주는 아르바이트 시급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영주언니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쿠키 주문이 많아지면서 영주언니는 굽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마감시간을 오후 9시에서 8시로 한 시간 당겼다.

영주언니의 엄마가 어제저녁에 쿠키를 구워 놓았다. 다친 다리가 많이 회복되어서 부분 지지대를 한 상태에서 일했다. 혜리가 늦게까지 남아 도운 적도 있다. 어쩌다 굽는 과정에서 모양이 망가진 쿠키는 먹을 수 있었다. 갓 구운 따근따근한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혜리는 아쉽게도 밤이라 조금만 먹었다. 입맛대로 먹었다가는 곧 눈사람처럼 살이 찔게 분명했다.


오늘은 너무나 특별한 날이었다. 지나 언니가 오후 여덟 시에 카페로 온다. 혜리는 카페 문을 닫고 쿠키를 굽는 동안 지나 언니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혜리는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앉아 지나언니에게 인사하는 것을 연습했다.


“언니,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거울을 바라만 보았다. 눈을 반짝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동안 수많은 문장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언니, 이제 어디 안 가실 거죠. 완전체는 불가능하지만 세 분 이서라도 <소울메이트> 하실 거죠. 배신자 한나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거 아시나요. 애초에 음악성이 없었어요. 재민대표 나쁜 놈이에요. 최근에 또 걸그룹으로 장난치려고 해서 대형 기획사와 폭로전을 하고 있던데 알고 계시죠.’


혜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거야. 복잡해. 한 마디만 할 거야. 그래야, 첫인상이 좋게 남아.”


혜리는 가방에 그동안 지나언니에게 썼던 손 편지를 챙겨 넣었다. 수백 통을 썼지만, 부질없어 보여,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만 열 통 남겨 놨었다. 혜리는 여러 가지 티들 중 오뭉치 친구들과 맞춘 파란 꽃무늬 티를 골랐다. 청바지와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그리고, 얇은 잠바를 입은 후, 잠실역으로 출발했다.


*


희재의 새엄마가 5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지나가 희재와 집에 있는 것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어머, 오래 만나네. 너무 좋다. 그동안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어. 저녁때가 되었으니 저녁 먹고 가. 일곱 시에 민교수님도 오니까 뵙고 가고.”

희재 새엄마는 희재아버지를 꼭 민교수님이라고 불렀다 희재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여전하다고 지나는 생각 했다.

“아니에요. 영주네 가게에 가봐야 해요.”

“그래, 영주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나, 쿠키 열심히 홍보하고 다녀. 성당체육대회에 기념품으로 기증도 할 계획이야. 우리 영주, 뭘 해도 야무져. 예뻐 죽겠어.”


딴 친구 이야기하며, 쓸데없이 친한 척하는 거, 희재가 질색으로 하는 것 중 하나였다. 희재 새엄마는 여전했는데 지나는 이제 싫지 않았다. 따듯함과 염려를 발견했다. 어릴 때, 지나는 희재를 따라 희재의 새엄마를 싫어했었다.

‘내가 변했나? 달라 보이는 게’


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재는 새엄마와 얼굴을 보고 대화하지 않았다. 새엄마도 희재와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말을 할 때는 시선을 비낀 채로 말했다.


희재 집을 나서며 지나는 희재의 말을 되새겼다. 여러 번 충격을 받고, 상황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에 한숨만 나왔다. 재민의 특별한 인생사가 너무 섬뜩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희재의 안전이 걱정될 정도였다. 재민이 희재와 <해피 핼러윈> 곡을 의논하는 개별 면담 시간에 개인사를 털어놓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한나의 뜻밖의 정체도 놀라웠다. 재민과 한나의 엄청난 탐욕과 야망이 질주하는 모습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 사이비 종교와 걸그룹이라. 어찌 보면, 희재 덕에 우리가 빠져나온 건가? 한나의 질투 때문에? 이런데, 내가 글을 써야 하나? 깜박이는 커서를 박자기 삼아 눈을 껌벅이면서?"

지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나의 두렵고 답답한 마음이 말을 뱉고 나니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지나는 희재의 용기에 감탄했고, 미안함을 느꼈다.


8월 말, 시원해진 저녁공기를 향해 손을 뻗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기를 손에 쥐려는 것처럼 보였다. 진실은 엄중하고 무섭네. 우리가 재기할 수 있을까?’

지나는 거대한 빙산이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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