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핼러윈 파티>

7. 보이지 않는 것들

by 빛과 그림자

창문을 열자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창밖으로 서울의 숲이 넓은 정원처럼 펼쳐져 있다. 재민은 창가에 서서 맑은 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다, 먼 하늘에서 짙은 회색빛 먹구름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비 소식이 예보되어 있었다. 재민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넓은 사무실 중앙에는 고객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티 테이블이 놓여 있다. <핑크 에인절>의 열 개가 넘는 광고 계약이 여기서 성사되었다. 이제까지 순풍에 돛 단 듯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재민은 삼십 퍼센트 정도 꿈이 실행됐다고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복병을 만났다. 갈 길이 아직 먼데 예상보다 빨리 견제가 시작되었다.

K 엔터테인먼트 회장 진혁이 재민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듯했다. 재민을 이사로 영입해 계열사 사장까지 끌어올렸던 진혁이 갑자기 재민을 계열사 사장에서 해임한다고 통보했다. 게다가, 재민이 기획해서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핑크 에인절>을 본사로 옮기려고 한다. <핑크 에인절>이 고공행진해서 빌보드 차트 5위를 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엄청난 수익이 보장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빼앗길 수는 없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쫓아낸다고!"


재민은 크게 고함쳤다. 재민은 땅 속에서 우화 하기를 기다렸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데 이 시기에 분쟁이 일어나 많은 수익을 잃게 되는 것에 분노했다.

아이돌들은 본인들이 별인 줄 알지만 사실은 반딧불이다. 물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짧은 시간에 빛을 발하고 사라진다.

매미가 오랜 시간 땅 안에서 굼벵이로 살아가듯 연습생들은 긴 무명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자가 없으면 그 세월을 견디기 힘들다. 먹이고 재우고 연습시켜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잠시라도 지상에서 노래 부를 수 있다. 재민은 이제 이 분야에서는 유능하기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


"두 사람 다 작곡과 작사를 하는 게 익숙해 보이는데, 특별한 성장 배경이 있나요?"

재민은 오디션을 볼 때, 희재와 지나를 보고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비주얼이 다르게 생겨 취향이 각각인 팬들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희재는 솔로 가수로도 적합한 싱어 송 라이터로 보였지만, 시대의 흐름 상 걸그룹이 더 돈이 되었다. 키가 큰 근육질의 한나와도 대비되어 서로의 강점을 어필할 수 있어 보였다. 지나가 작가가 꿈이고 아이돌에 관심 없다고 했을 때도 독서를 좋아하는 념 아이돌로 홍보하는 기획안이 떠올랐다.

같은 날 영주도 뽑았다. 영주는 개인기를 보여 달라는 재민의 주문에 연극을 했다.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2막의 포조 연기를 했었다.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대사를 큰 소리로 전달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재민은 오디션이 끝나고, 영주와 금발로 염색한 미스 캐나다 출신 지원자를 저울질했었다. 재민은 고민하다, 영주로 결정했다.


재민은 영주가 개인기를 할 때, 자신의 가족사가 떠올랐었다. 그래서 영주가 연기했던 장면을 책장 속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 찾아보았다. 희곡을 읽는 순간, 재민은 죽은 아버지와 형이 떠올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요즘 재민은 어쩌다 길을 헤맨다는 생각이 들 때, 영주가 연기했던 구절을 찾아본다.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 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착해지며)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그는 끈을 잡아당긴다) 앞으로!]*


재민은 진혁이 오늘이라도 벙어리가 되거나 장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죽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어쨌든, 재민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소울메이트>는 재민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소울메이트>는 재민에게는 첫 관문이었다. 한나의 의지에 따라 헤븐 가디언님이 재민에게 준 기회였다. 재민은 어머니가 구역장으로 있는 [헤븐 게이트]의 교리를 믿을 수 없었다. 한나는 재민에게 자신도 그렇다며 새로운 길을 찾자고 제안했다. 십여 명의 중 한 명인 구역장의 아들에 불과한 재민을 한나가 선택한 것이다.

한나는 재민에게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재민은 형과 아버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었다.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한때, 양심의 가책 때문에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재민은 이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다. 지금 생각하면 천국과 지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재민은 살 길을 제대로 선택한 것이다.

*


<소울메이트>는 석촌 호숫가에 있는 작은 빌라에서 살았다. 호숫가에 자리 잡은 재민 대표의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식사는 빌라 근처 음식점거리 모퉁이에 있는 가정식 백반을 제공하는 식당과 계약을 맺어 해결했다. 매 끼에 밥과 국, 다섯 가지 정도의 반찬이 제공되었다. 잡지 인터뷰에서 기자가 멤버들에게 좋았던 점을 꼽으라니까, 다양한 재료와 요리법으로 반찬을 만들어서 지겹거나 물리지 않았다고 대답했었다.

<소울메이트>의 시작은 작은 소속사가 운영하는 아이돌 그룹들과 다르지 않았다. 멤버들은 일단 안무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한나를 제외하고는 댄스 실력이 아마추어 보다도 한참 떨어졌었다.

희재는 그럭저럭 리듬감을 실어 안무를 소화했고, 영주는 빠른 속도로 학습해 나갔다. 영주는 연극영화과를 다녀서인지, 몸을 쓰는 데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었다. 지나가 가장 문제였다. 지나는 몸치였다. 다른 멤버들이 쉽게 익히는 동작들이 두세 배를 노력해야 간신히 몸에 붙었다.

재민 대표는 지나 때문에 팀의 데뷔를 두세 달 늦추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정식 활동 전부터 유튜브와 sns를 통해 팀이 노래 연습하거나 댄스 연습하는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고, 회사 차원에서 아르바이트 생들을 고용해 영상을 24시간 스트리밍 하게 만들었다. 유명해지면 팬들이 자발적으로 할 일이었지만, 그룹을 시작할 때는 돈이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 공연하는 행사가 있으면, 연락해서 같이 출연하려고 노력했다.

<소울메이트>가 오랜 무명의 시절을 보내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한나의 경제적 지원은 매우 컸다. 멤버들은 재민 대표가 여기저기서 후원을 받고, 자질구래한 홍보나 광고에서 돈을 끌어 온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많이 드는 코스프레 의상비를 메꾸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한나는 일류인 무대 의상 디자인팀을 고용했다. 뭔가 달라 보이고, 코스프레 의상이 특별해 보인 이유는 전문가들의 유능함 때문이었지만, 멤버들에게 비밀로 했었다.


처음부터 재민은 희재에게 많은 관심이 갔었다. 유달리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얼굴 때문이기도 했지만, 희재의 어두워 보이는 분위기와 음악에 대한 정열이 대조되며 재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희재의 음악적 재능도 크게 기대되기도 했다. 원숭이가 나무에 떨어질 때가 있듯 재민은 <소울메이트>를 운영하는 동안 희재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았다. 계기는 <해피 핼러윈> 곡을 희재가 지나와 협업해 작사, 작곡했을 때부터였다.


희재가 울면서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재민은 오랫동안 자신이 의심을 품고 있던 상황을 희재에게 말했었다. 멤버들과 정기적으로 가졌던 개인 면담 시간에서였다. 재민 대표는 전체 면담이나 회의 시간 외에도 멤버들과 장단점을 점검하고, 각자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었다.


재민은 구역장을 맡고 있는 어머니에게 가지고 있던 의심을 희재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오직 한나에게만 말했던 비밀이었다. 한나는 재민이 비밀을 말했을 때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재민을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침내 재민 대표가 희재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희재는 크고 아름다운 눈을 껌벅거리며, 큰 충격에 싸인 표정을 지었다. 재민이 희재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었다.


“세상에 그런 어머니도 있군요.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 재민에게는 비밀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응징처럼 느껴졌었다. 아버지와 형에 대한 죄책감을 더는 길이기도 했다.

*


한나는 재민이 <핑크 에인절>을 빼앗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진혁이 재민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재민과 한나는 <핑크 에인절>을 기반으로 다른 회사를 차릴 계획을 하고 있었다. <핑크 에인절>은 진혁이 키운 <베터 보이즈>만큼 세계적 인지도가 높아진 상황이어서, 굳이 K 엔터테인먼트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진혁만큼 재민도 인지도나 능력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계획이 너무 일찍 노출되어 누가 기밀을 누설했는지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나는 아버지 회사의 투자를 유치해서 <핑크 에인절>의 지분을 합법적으로 획득하려고 했었다. 사장인 재민과 은밀하게 작업 중이었는데 진혁이 선수를 친 것이다. 한나는 재민과 세계관과 종교관이 같았다. 한나에게 재민은 앞으로의 삶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하나밖에 없는 구세주였다. 재민은 한나의 분열된 세계를 안정되게 만들었다. 한나는 재민 덕분에 강력한 부모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재민은 한나에게 연락한 후 사무실에서 나왔다.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 핑크 에인절> 공연을 챙겨야 했다. 조금 전 사장 자리에서 해임될 거라는 통보는 받았지만, 절차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몰랐다. 당장은 자신의 역할을 해야 했다. < 핑크 에인절> 매니저에게도 흔들리지 말고, 공연에 최선을 다하라는 하나마나한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기나긴 법적, 사업적인 대응이 시작될 것이다.

재민은 담담하게 대처할 결심을 하며,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한나 사무실을 들린 후, 대기하세요. 공연장도 가야 해요.”

keyword
월, 금 연재
이전 06화<핼러윈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