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보이는 것에 가려진 것들
커다란 방에 가죽 침대가 놓여 있다. 매트리스는 억대를 호가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하얀색 베개, 이불의 가장자리 부분들은 최고급 금실로 정교하게 수가 놓아져 있다. 만들기도 힘들지만, 깨끗하게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침구들이 티 없이 깔끔했다. 거울은 천장에 거의 닿을 만큼 높고, 벽 한 면의 삼분의 일을 가릴 만큼 폭이 넓었다. 거울의 테두리는 이태리 장인들이 나무를 파서 조각한 후 얇은 금박을 입혀, 박물관의 고급 액자 같이 장식되어 있다.
한나는 목욕 가운을 벗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180센티미터에 가까운 큰 키, 길고 적당하게 근육이 붙은 팔다리, 복근이 뚜렷한 콜라병 형태의 몸통, 얼굴을 가득 채운 눈, 코, 입. 원래 이목구비가 뚜렷했었는데, 성형으로 더 뚜렷해졌다. 한나의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커 서클 렌즈를 낀 것 같았다. 눈빛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한나는 태권도 헤비급 국가 대표 선수였던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중성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아이돌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신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가슴 성형을 하고 운동을 통해 초콜릿 복근을 만들면서 허리가 잘록해졌다. 엉덩이도 꾸준한 하체 운동으로 애플 모양이 되었다.
한나는 살아 있는 여신이 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유일신이 아닌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현실의 여신이다.
한나는 10살이 될 때까지, [헤븐 게이트] 교회 지하실에서 살았다. 교회쥐처럼 가난하다는 서양 속담처럼 정말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친구와 동업해서, 헬스클럽을 열었는데, 믿었던 친구가 전세로 계약하기로 했던 헬스클럽을 월세로 계약했다. 장기 회원권을 현금으로 싸게 판매한 그는 엄청나게 많은 회원들을 모은 후 전세금과 회원권 판매액을 가지고 잠적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구입했다고 말했던 헬스기구들도 장기 렌털로 빌린 거였다. 한나의 아버지는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고, 헬스장 회원권을 끊은 사람들에게 집단 소송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나의 아버지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집을 팔았다. 태권도장을 판 돈은 헬스클럽 전세금으로 다 날린 뒤였다.
국가 대표에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버지는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핸드폰 전화 번호부에 있는 지인들에게 다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교사자격증을 소지한 어머니는 동네 중학교 임시직 체육교사로 직장을 잡았다. 어머니도 리듬 체조 전공으로 체대를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퇴근한 후 어머니는 계속 구직앱을 뒤졌다. 집을 비워주기 일주일 전 마침내 한나의 어머니는 메모를 주며 이력서를 내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헤븐 게이트] 교회 경비 구함. 무술 유단자 우대. 교회에서 숙식가능
* 반드시 면접 후 뽑으니 이력서를 들고 교회로 오세요.
“교회에서 숙식이 가능하다니까, 혹시 가족을 데려와도 되냐고 물어봐요.
혹시, 혹시 모르니까”
한나의 어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로 말했다. 혹시 혹시라고 말할 때 기도 자세의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한나는 아직도 그날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교회의 면접을 위해 어머니에게 옷차림을 점검받았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넥타이를 무슨 색으로 맬까 고민했다. 어머니도 여러 넥타이를 가지고 와 아버지의 흰 셔츠에 대어 보았다. 그러다 파란 바탕에 작은 사자 무늬들이 반복되는 패턴의 넥타이를 골랐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우리 결혼 7주년 때 자기가 선물해 준 넥타이네. 그때만 해도 참 행복하고 걱정이 없었는데. 집 마련한 기념으로 태국으로 가족 여행도 갔었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고 끄덕였다. 어린 한나가 보기에 우는 것 같았다.
“엄마, 울어?”
한나가 어머니를 껴안으며,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머니의 눈가가 번들거렸다.
“울긴 왜 울어. 아빠 눈을 봐. 얼마나 반짝이니? 아버지가 너무 잘생기고 멋져서 옛날 생각한 거야. 엄마는 키도 작고 몸도 가는 데 아빠는... 눈빛이 강해서 사람들이 굶어 죽지는 않을 거랬어.”
외출 준비를 마친 아버지의 모습은 멋있었다. 작은 서류 가방도 들고 있었다. 키가 백구십에 가까운 아버지는 마음고생이 심해 살이 십오 킬로가 빠져, 날씬하고 멋진 배우 같았다. 뚜렷한 이목구비 중 특히 눈은 긴장해서 평소보다 반짝반짝거렸다.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커서 포도알 같았다.
*
한나는 새로 맞춘 근무복을 입고, T타워 팬트 하우스에서 사무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경호원에게는 사무실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한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타워 주민의 반응은 매번 한나를 기쁘게 했다.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한나를 깜짝 놀라서 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벌벌 떠는 경우도 많았다. 손이 떨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잡아 떨림을 멈추려다가 같이 떠는 사람도 꽤 있었다. 60층에서 1층으로 내려갈 때 아주 드문 경우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때는 한나는 서운함을 느꼈다.
재민은 T타워 옆 상가 건물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서 한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고 따뜻한 히브스커스 차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들어 올려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
한나의 사무실은 허름했다. 낡은 인조가죽으로 만든 3인용 소파와 2인용 소파 사이에 유리가 얹어진 상처가 많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넓은 공간에 비해 소파와 테이블이 단출해 보였다. <핑크 엔절> 지원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진혁이 눈치챈 것 같아. 첩자가 있는 듯 해. 아직 작전이 개시되지도 않았는데 상황을 미리 파악한다는 게... 최근에 본사에서 파견된 사람은 없고.”
“벌써 찾으라고 지시했어.” 한나가 대답했다.
재민은 티테이블 위에 메모장을 올려놓았다.
[도청 다시 체크하고, 비밀 카메라가 없는지 확인해]
한나는 메모장을 접어 근무복 주머니에 넣었다.
“옷을 왜 비행기 승무원처럼 입었어? 작은 스카프까지 매고. 여신 콘셉트 옷은 어디로 가고?”
“이리저리 연구 중이야. <핑크 에인절>도 일하는 알파걸의 이미지가 필요해서. 전문직 여성들을 사로잡아야 매출이 오를 것 같아. 그리고 오히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번 빠지면, 충성심을 오래 유지해.”
재민은 한나를 바라보다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내이지만, 용기가 필요했다. 한나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태연하게 견뎌야 다가갈 수 있었다.
한나는 재민의 곁에 앉아 재민에게 키스해 주었다. 재민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스킨 쉽을 더 즐기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었다.
“저녁에 집에서 봐. <핑크 에인절> 멤버들을 단속하는 게 중요해”
“걱정하지 마. 내 아바타들이야. 한나 신전의 제사장들.”
한나는 진지하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
종합운동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재민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한나 신전의 제사장, 주사위는 던져졌어.’
<핑크 에인절>을 키워서, K 엔터테인먼트의 <베터 보이즈>처럼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쉼 없이 달려왔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재민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는 길고 큰 눈, 잘 조화된 작은 코, 옅은 색의 작은 입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넓고 반듯한 이마가 작은 이목구비가 주는 유약하고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상쇄해서 고상하고 귀하게 보였다. 어머니는 가냘픈 체격으로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재민이 한나와 결혼함으로써 평범한 구역장에서 [헤븐 게이트]의 3인자가 되었다.
종교를 위해 남편과 큰 아들을 희생시킨 어머니에게는 합당한 자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엄청 운이 좋은 사람이다. 대부분은 신자들은 가족을 버리고, 가진 재산을 다 바쳐도 평신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형에게 들었던 어머니의 비밀이 떠오르자 재민은 언제나처럼 소름이 돋았다.
“엄마가 아버지를 죽인 것 같아. 엄마가 예배에서 간증할 때 자신은 가족을 버리고 신앙을 택했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 엄마는 우리한테 잘해줬잖아. 아빠도 사고사였고. 이상해서 엄마의 노트들을 읽어 봤어.”
형은 울분에 차서 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던 재민은 혼란스러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재민아, 기억해. 혹시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가 한 일일 거야, 엄마는 종교 때문이라면 뭐라도 할 사람이야. 나도 진실을 안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재민은 엄지손톱을 검지로 긁다가, 입으로 가져가 손톱 옆에 있는 살부스러기를 이빨로 뜯었다. 긴장될 때 자기도 모르게 하는 버릇이었다. 재민은 자신에게 어머니의 DNA가 흐르는 것을 확신했다.
형이 죽은 해, 재민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밀린 숙제를 하느라 유난히 늦게 잔 다음 날, 재민은 잠결에 어렴풋이 형의 목소리를 들었다. 형이 자는 재민에게 말을 건 적은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문소리가 났다. 재민은 잠이 확 달아났었다.
' 형에게 무슨 일이 있나?'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였다. 재민은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형이야?"
재민은 방문을 열며 물었다.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있었다. 재민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 엄마, 어디 갔다 왔어? 형이 온 게 아니네."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재민이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세월이 오래 지났다. 재민은 손톱 주변 살들을 뜯다 멈추었다. 뜯긴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종합 운동장에 도착했다.
재민은 한나에게 들은 사실들을 머리에서 털어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더 그의 머릿속에 깊게 깊게 자리 잡으며 수시로 떠올랐다. 재민은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