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회와 선택(2)
<핑크 에인절>의 공연장면이 TV 뉴스를 통해 상연되었다. 뉴스 엥커의 코멘트가 달렸다.
"인기 그룹 <핑크 에인절>의 장 재민 대표가 해임되었습니다. K- 엔터테인먼트는 장 재민 대표가 회사에 대해 배임한 사실이 발견되어 해고했다는 간단한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오늘 오후 7시에 광화문 프레스 센터에서 장재민 대표의 공식 기자 회견이 예고되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한나는 언론을 통해 일이 커지는 데 불안감을 느꼈다. 소리 소문 없이 일처리 하는 재민의 평소 태도와 대응이 달랐다.
<소울메이트> 를 해체할 때, 재민은 최종 공연을 마치고 한 달 뒤 멤버들을 기획사 사무실로 불렀다. 그동안 번 수익들을 배분하고, 그룹 해체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나가 그룹해체를 원했을 때, 재민은 완강히 반대했다. 한나는 재민과 희재의 관계가 더 발전할까 봐 두려운 마음을 숨겼다.
표면상으로는 이제 재민의 능력이 인정받을만하니, 더 큰 회사로 갈아타자고 했다. 재민이 <소울메이트> 해체에 대한 마음을 안 돌리려고 하자, 한나는 재민에게 교주의 딸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주었다. 모든 퍼즐이 맞추어졌을 때 재민은 몸서리치며 울었다. 한나는 우는 재민을 안으며 말했다.
" 형처럼 개죽음당하지 않으려면, 나랑 연대해야 해. [헤븐 게이트]는 거대한 조직이야. 미국 바이오 연구소부터 인공 자궁 연구소, 애완동물 복제 서비스 센터까지 모두 [헤븐 게이트] 소속이야. 연화 본부장은 살기 위해서라도 형을 버려야 했어."
한나는 60층 팬트 하우스 거실 창으로 멀리 보이는 완만한 산을 내려 보았다. 재민의 형이 준 기회였다. 아버지 명철의 몸에 성스러운 상처들이 생긴 후, 한나 가족의 운명은 달라졌다. 아버지 명철은 교회 1층 비밀 공간에 마련된 수술실에서 신도인 의사에게 은밀하게 수술받았다. 총상인 게 밝혀지면 사건의 경위가 반드시 수사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의사는 국내 최고의 대학 병원의 외과 교수였고 ,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총알은 한쪽 폐를 뚫고 지나가 명철은 폐 하나를 3분의 2 이상 절제해야 했다. 허리 부분을 지나간 총알은 다행히 장기를 건드리지 않고 근육만 스치고 지나갔다.
명철은 수술 후 두 달 정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재활을 한 후 운전사 겸 경호원으로 복귀했다. 그의 위상은 실버라이닝에 의해 완전히 달라졌다. 동성 부부였던 교주와 실버라이닝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실버라이닝은 본인이 나서서 교주의 역할을 물려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기질상 공개된 장소에서 강론을 하고, 대규모 행사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다. 명철의 과거를 아는 실버라이닝은 주민의 암살 사건을 겪으며 명철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
그런데 ,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후 헤븐 가디언은 큰 사고를 당했다. 헤븐 캐슬에서 헤븐 가디언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날따라 집 안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헤븐 가디언은 뇌가 부풀러 오를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두개골을 잘라 연 상태로 수술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거의 보름이 지나도 뇌압이 가라앉지 않았다. 실버라이닝은 신도인 의사들의 조언을 듣고 나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랑하는 헤븐 가디언을 살려도 후유증이 노출되면 보이는 신을 믿는 [헤븐 케이트] 신도들은 동요할 것이다.
교리대로 인간 복제가 계획대로 시행되고, 인공 자궁을 통해 동성 간의 유전자를 나눈 자녀를 갖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명철은 [헤븐 게이트]의 헤븐 가디언이 되었다. 주민의 암살미수 사건 이후 달라진 대접을 받았었다. 여전히 운전사와 경호원 역할을 했지만 의복이 하얀색에 울트라 마린색 선이 들어간 옷으로 바뀌었다. 울트라 마린색 선의 테두리를 따라 금색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상처 부분은 금실로 총탄 자국이 수놓아져 있었다.
헤븐 가디언이 낙상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후 명철은 실버라이닝의 지시에 따라 일정한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헤븐 게이트]의 교주가 된 후 명철은 국가대표시절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아시안 게임에 참여해 금메달을 받았을 때, 수많은 관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었다. 사이비교의 교주가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 찬양과 박수를 받는 것이다. 신도들은 인간인 명철에게서 영생을 누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신을 보았다. 명철은 기회를 잡았다. 엄청난 사랑과 수많은 헌금들, 무조건적인 지지를 사이비 교주보다 더 받을 수 있는 직업은 없을 것이다.
한나가 높은 팬트하우스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 것도 오래전 일이었다. 살아있는 신의 딸이 받아야 할 대접이었다. 하지만, [헤븐 케이트]는 딸을 원하지 않았다. 한나는 독립해야 한다. 실버라이닝에게는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은 아무도 몰랐다.
‘재민도 계획이 있겠지? 사무실에서 미처 못 들었는데.’
한나는 먼 하늘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와 땅에 있는 건물 위를 날고 있는 점 같은 새떼를 보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지나는 희재집에서 나와 이태원으로 출발했다. 영주의 카페에서 쿠키를 구워야 했다. 영주가 찍어 보낸 명함 뒤편의 지도를 보니, <쿠키카페>는 세계 음식 거리 종점 전에 있었다.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나가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지나 오른쪽으로 쭉 가면 되었다.
지하철 안에서, 영주와의 대화를 생각하니 지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나야, 우리 엄마가 아직 다리가 다 안 나았는데도 가게로 갔어. 쿠키를 굽겠다고. 내일은 네가 좀 도와줄 수 있니? 엄마가 병원을 가봐야 해서"
"찐 팬 혜리인가? 아르바이트비 좀 더 주고 같이 부탁해. 마련된 반죽을 굽는 거라며."
"그게 그래. 다 좋은 친구인데, 좀 덜렁대는 건지. 숙련이 필요한가 봐. 교육할 경황은 없어. 굽다 모양이 부서진 게 너무 많이 나와서 주문량을 못 맞춰서 혼났어. 환불도 몇 건 했대"
"엄청 덜렁대나 봐. 요리 학교에서 첫 시간부터 반죽만 잘하면, 굽는 건 다 잘 굽던데."
"네가 요리 학교에서 많이 해봤으니까 부탁해. 시급 두둑이 쳐 줄게."
<소울 메이트>의 찐 팬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반갑고 놀라웠지만, 반죽된 쿠키를 제대로 못 구워서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도 코믹했다.
‘어쨌든, 영주 대단해. 부모님 솜씨를 닮아서인지, 본인이 워낙 꾸준히 열심히 노력해서인지, 맛집으로 별점이 꽤 높네.’ 핸드폰을 검색해 보고 지나는 좀 놀랬다. 지나는 영주가 보내 준 쿠키 사진들을 유심히 보았다. 오렌지색 호박 모양의 쿠키와 검은색 해골 모양의 쿠키. 그리고 검은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체커보드쿠키 세 종류를 8월 2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핼러윈 한정판으로 팔고 있었다.
*
“아, 언니, 안녕하세요. 만나서 정말 영광이에요.”
지나가 <쿠키가게>에 도착했을 때, 혜리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오랜만에 걸그룹 멤버였던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가 악수하러 손을 내밀었을 때, 혜리의 환한 표정과 온몸을 떨며 기뻐하는 태도에서 잊었던 팬들에 대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영주의 카페는 깔끔한 북유럽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아직 핼러윈 장식은 없었지만, 핼러윈 한정판 쿠키 포스터가 하얗고 깨끗한 벽에 붙어 있었다. 혜리는 카페를 잘 청소하고 정리해 놓았다. 지나가 일하기 편하도록 친절하게 냉동고에 보관된 반죽들을 꺼내 주고 , 오븐 팬들도 날라주었다. 훌륭한 보조자였다.
조용하고 조직적으로 지나와 혜리는 쿠키를 구웠다. 대리석 판에 쿠키반죽을 밀대로 밀어서 쿠키틀로 모양을 찍고 얇게 기름 바른 오븐 팬에 가지런하게 정리해서 놓았다. 예열된 오븐에는 큰 쿠키 오븐 팬이 5개까지 들어갔다. 지나와 혜리는 별말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팀으로 움직였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일했다.
“때르릉, 때르릉”
전화벨 같은 오븐의 마지막 알람이 울렸다. 혜리와 따듯한 캐모마일 티를 마시고 있던 지나는 하이 파이브를 하려고 손을 올렸다. 혜리도 지나를 보고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일 잘 끝났다. 이 판은 꺼내서 식게 두고, 식은 쿠키는 포장하고 떠나자.”
지나는 포장용 비닐봉지를 가져온 혜리에게 말했다. 그때,
지나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마치 오븐의 알람소리 같았다.
지나는 김은미 기자라고 뜨는 이름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저, 김은미기자입니다.”
“아, 웬일이세요?”
“K-엔터테인먼트에서 <소울메이트> 멤버들을 재결성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네? 전혀 모르는 사실이에요. 도대체, 어디서 들은 정보예요?”
“취재원을 밝힐 수 없습니다. 혹시, 제가 다른 정보를 알게 되면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 너무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제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릴 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네. 그러겠습니다. 꼭 연락 주세요. 언젠가 석촌 호숫가에 있는 밥집에 대한 인터뷰했던 기자입니다.”
“네. 기억합니다.”
지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카페 의자에 앉았다. 혜리는 부지런하게 쿠키를 포장하고 있었다. 하나씩 비닐 포장을 한 후 칸막이가 있는 종이박스에 담기도 했다. 선물 박스가 상당히 많았다.
지나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이면 이 기회가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혜리는 쿠키포장을 계속하면서 지나 언니의 진지한 표정을 흘깃흘깃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