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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11. <오뭉치>와 <소울메이트> (1)

by 빛과 그림자

지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늦은 밤이라 승객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영주와 희재가 함께하는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너네 혹시 연락받은 거 있어? K- 엔터테인먼트에서?
-응

희재가 대답했다.
-언제?

-오늘 저녁 7시 30분쯤?
지나가 받은 전화 목록을 보니 그 시간대에 4번 전화가 왔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뭐래?
-재민 대표의 일방적 그룹 해체 때문에 고생 많았대. 한나 빼고 세 멤버로 < 소울 메이트>를 재결성하겠냐고. 의논해 보고 연락달래.
-뭐지? 긴긴 세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재민 대표가 어제 기자 회견해서 그런가 봐. 영주가 있어야 의논하지. 모레 만나자. 내일이 마지막 공연 이랬어.
-그래. 안 그래도 내일도 쿠키 구워 달래. 너도 시간 되면 카페로 나와.
-아니, 나는 내일 오늘 전화 온 사람 만나러 K-엔터테인먼트로 가보기로 했어. 믿을 수가 없어서.
-너 혼자?
-아니, 새엄마가 같이 가재. 무섭다고. 보이스 피싱일 수도 있다고.
-헬리콥터 맘이 따로 없네.


지나는 집에서 눈도 마주치지 는 모녀가 밖에서 어떻게 다니는지 궁금했다. 매우 긴 하루였다. 희재에게 재민과 한나의 엄청난 비밀을 들은 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팬과 쿠키 굽기, K-엔터테인먼트의 느닷없는 제안 등 하루에 있었던 일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지나는 광화문 집으로 가기 위해 환승해야 했다. 지하철 노선을 확인하고, 공덕역에서 내렸다.


*


희재는 새엄마의 차를 타고 올림픽 공원 근처에 있는 K-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새엄마 화진은 운전을 하면서 정면을 응시하고 말했다.


희재 음악성에 미모면 언제 다시 활동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근데 요즘 아이돌들 나이가 점점 어려지던데, 서른이 넘은 그룹이 있기는 한 거야? 그것도 걸그룹이.”


뒷좌석 오른쪽 의자에 앉은 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일까? 이용하려는 건 분명해. 어쨌든 기회는 기회니까 가보는 거지.’


“기회는 기회니까 가보는 거지. 정신 바짝 차리자.”


희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는 생각만 했는데....’


희재는 운전석에 앉은 화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엄마, 고마워요. 생명의 은인. 이제 저는 방황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


영주는 마지막 공연이라 지쳤고, 아쉬웠다. 럭키역은 에너지가 많이 들고, 동작들도 쉽지 않았다. 특히, 모자를 쓰고 쉴 새 없이 떠드는 부분이 어려웠다. 두서없는 내용들을 외워서 틀리지 않고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이 들거나, 유명해진 배우들이 선호하지 않는 역이었다. 그래서 영주의 부모님은 자주 맡았었다. 2주 이상을 고생했지만, 제대로 럭키역을 해냈다는 뿌듯함만은 가득했다. 영주가 배우로서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작정 <소울메이트>의 재결성만 기다리고 살아왔지만, 그건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어제 지나와 희재의 카톡대화를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꿈속에서까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영주는 분장실에서 거울을 볼 때, 분장 시작 전 조명에 비친 맨얼굴의 주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려 두 손을 교차해서 얹어 꾸욱 눌렀다. 우선은 최선을 다해 럭키역을 마칠 것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네 발로 걸으며, 구르고, 모자를 쓰고 떠들고, 귀머거리 연기를 하며.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넘어지며.

영주는 거울을 보며 분장을 시작했다. 분장 보조자가 럭키 옷을 옷장에서 가져다주었다.

희재가 정찰병으로 K-엔터테인먼트에 관계자를 만나러 갔다. 오늘 상황을 알려주면, 내일 셋이서 카페에 모여 의논한 뒤 결정할 것이다.


K-엔터테인먼트와 재민의 전쟁 덕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영주는 틈새의 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


혜리는 오뭉치 카톡방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 바쁠 때 도와준 것이 매우 고마워서, 영주 언니가 오뭉치 친구들을 카페 근처 멕시코 음식점으로 초대한다고 했다. 세계 음식거리에는 라틴 음식점들이 몇 개 있었다. 영주언니는 과카몰리를 기가 막히게 맛있게 만드는 곳이 있다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민주와 혜리가 정기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줘서,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이 이렇게까지 호평을 받은 거라고 꼭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 했다.


-언니가 9월 중순쯤 반일 휴가를 내겠대. 나보고 오뭉치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보래

-와, 식사초대라고? 대박인데.

동현이 대답했다.

-나는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해. 시간대비 임금이 내 수업료의 5분의 1도 안 됐으니. 혜리가 안 되는 날 이틀만 메꿨지만 손해는 손해였어. 영주언니를 제대로 만난 것도 아니고.
민주가 대답했다.
-그래도 핼러윈 쿠키 특판 포스터 가격은 언니가 제대로 쳐주지 않았어?
혜리의 질문에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해골 이모티콘과 함께 대답했다.
-ㅋㅋㅋ 그건 그래. 언니가 예쁘고 세련됐다고 엄청 좋아하며 후하게 쳐줬지. 예술작품이니까.

-나까지 가도 돼?

미성이 물었다.

-그럼, 다 같이 오래. 우리들이 그동안 정말 힘이 되었다고 영주언니가 웬만하면, 지나, 희재 언니도 부를 거래. 핼러윈 파티 전에 소울메이트와 오뭉치 서로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힐 겸.

-최고의 팬미팅이네. 혜리, 민주 고마워. 덕분에 언니들이랑 밥까지 먹게 됐네.

선희까지 마지막으로 읽고 대답했다.

-그럼 9월 16일 토요일 어때? 6시쯤? 장소는 따로 공지할 게. 언니가 어딘지 아직 안 알려줬어

동현, 민주, 미성, 선희 모두가 대답했다.

-좋아. -그래. -Ok -응


*


희재는 K-엔터테인먼트 사옥이 한눈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자연친화적인 건물로 큐브모양에 중앙을 비워 정원으로 꾸몄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채광이 잘되고 널찍한 개방감 때문에 야외에 있는 것 같았다. 내부 정원에서 위를 보면 유리 천장이 보여 온실 같았다. 정원을 중심으로 넓은 복도들 뒤에 사무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희재와 화진은 건물 10층 1004호에서 홍보섭외팀 김진호 팀장을 만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투명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보니 식물원처럼 꾸며진 내부 정원이 더 아름다웠다.


김진호 팀장은 희재와 화진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누가 봐도 모녀사이인지 알겠다며 놀랍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무실 안에 있는 회의용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 뒤 메뉴판을 주었다.

“갑작스럽게 전화드려서 놀라셨죠? 일단, 여기 준비된 음료들이 있으니 선택해 주세요. 간단한 디저트류도 선택 가능합니다. 마카롱, 에클레르가 특히 맛있어요.”


거절하려다 희재와 화진은 친절하고 미소 띤 팀장의 얼굴을 보고 아이스커피를 두 잔 시켰다. 비서가 아이스커피 세 잔을 쟁반에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희재는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팀장이 소통과 협상에 능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희재는 아이스커피를 두세 모금 마셨다. 화진도 커피를 마시며 김진호 팀장이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어떠신가요? 다른 멤버들과 의논해 보셨나요?”

“네. 일단 제가 어떤 상황인지 더 알아보기로 했어요. 말씀하신 내용은 다 전달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재민대표 때문에 <소울메이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해체되기 아까운 그룹이었어요. 특히, 희재 씨는 후속곡을 발표할 쇼케이스까지 예정했었는데 취소하셨더군요.”

"아니에요. 단지 저만을 위한 쇼케이스가 아니었어요. 팀에서 저만 작사 작곡하는 것도 아니고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재민대표의 배신으로 망가진 기회를 되찾아드리고 싶다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요?”

“네”

희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희재를 사로잡았다.

" 뭐 더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제가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뇨, 딱히 없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멤버들이 모였을 때 오늘 들은 내용까지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 잡겠습니다.”

“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희재와 화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상황은 명확했다.


*


지나는 혜리와 쿠키를 굽고 있었다. 혜리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나는 마지막 쿠키를 굽고, 테이블 의자에 앉아 혜리와 식은 쿠키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혜리는 지나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부탁했다.

“지나언니, 이번에 영주 언니가 제 친구들에게 저녁을 사주신대요. 저희가 만나게 된 이유는 <솔메이트>때문이에요. <오뭉치>라고 다섯 명이예요. 언니, 언니도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나는 혜리의 간절하고 진지한 표정을 보았다. 크고 맑은 눈동자에 애정이 듬북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영주한테 들었어. 영주한테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네 부탁 들으니까 꼭 갈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해 주니. 네가 준 손편지들 읽고 정말 고마웠어. 끈 떨어진 가수에게 에너지를 팍팍 주는 글이었어.”


“언니, 제 친구들 다 저처럼 그동안 썼던 손편지들을 언니들에게 드리고 싶어 해요. 특히, 초등학교 교사 되려는 동현이란 친구가 있는데..... 아, 어쩌나. 희재언니도 꼭 와야 하는데.”

지나는 혜리의 말에 크게 웃었다.


“너, 꾼이네. 꾼. 은근히 설득되네. 희재는 원래 올 애가 아닌데, 내가 꼭 끌고 올게. 나도 끌려다녔으니까. 희재도 와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지나의 말에 혜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혜리는 작은 비닐봉지에 쿠키를 넣고 덮개 쪽에 있는 양면테이프 종이를 떼고, 다른 쪽을 덮어 밀봉했다.


그날 하루분의 작업을 마치자, 지나와 혜리는 같이 카페를 정리하고 나왔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검푸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더운 여름이 지나서인지 도심에서도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가로수에 붙어 울던 매미들은 사라졌다.

지나는 두 번밖에 안 만났지만, 벌써 혜리가 오랜 친구 같았다. 지나와 혜리가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지나가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야 한다고 말했다. 혜리는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지나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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