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참사
"미성 어머니, 저 민주예요. 미술학원 친구."
민주는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래, 민주야. 저녁에 웬일이니?"
"미성이가, 미성이가 연락이 안 돼서요. "
"미성이 이태원 갔어. 참, 너도 만나는 거 아니니? 오뭉치 친구들."
"어머니, 지금 사고가 났어요. 미성이가 이 길로 올라온다고 했는데.....
지금 거대한 사람더미가 있어요. 하나씩 하나씩 떼내서 들 것에 싣고 나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오셔야 될 것 같아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럽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들 때문인지, 정신이 혼미해서인지 전화 목소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민주는 자신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기를 쓰고 알렸다.
"해밀튼 호텔 서쪽 옆길이에요. 부모님이 오셔야 해요.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올라와야 하는데 지금은 막혀 있어요. 그냥 4번 출구로 나오셔서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거기 건널목 앞에서 만나요."
"알았다. 곧 가서 연락할 게."
미성의 엄마는 민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남편과 택시를 타고 이태원을 향해 출발했다.
혜리는 선희에게 전화를 계속했다. 받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민주처럼 선희 가족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혜리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거대한 사람들의 더미. 산더미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리들. 사람들이 엉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서 멈춘 채로 겹쳐있었다.
*
핼러윈 파티를 위해 오뭉치는 각자 할 일을 분담했다. 혜리는 친구들과 소울메이트 언니들의 스케줄을 대략 맞추려고 노력했다. 9월 16일에 만났을 때, 생각과 달리 희재 언니 외에는 소울메이트 언니들은 핼러윈 파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영주 언니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목이라며 10시까지 영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후 박쥐 마스크나 써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지나 언니도 해피 핼러윈 노래를 카페에서 크게 틀고, 잭 오 랜턴 가면을 쓰고 오렌지색과 검은색의 체커보드 옷을 입을까 고민 중이었다. 소울메이트 시절에 착용했던 의상이었다. 영주 언니의 핼러윈 3종 쿠키 홍보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복장이었다.
희재 언니만 핼러윈 파티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희재언니는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닐 때, 엄마가 난쟁이, 자기가 백설공주 옷을 입었다면서 추억에 잠겼다. 이제는 자기가 난쟁이 옷을 입을 거라고 했다. 오뭉치가 드레스를 입으면 다섯 공주와 난쟁이가 된다고 좋아했다. 그러면서 신박한 제안을 했다.
"동현의 옷을 백설공주 옷처럼 부풀린 스커트와 큰 목받침을 하면 어때?"
오뭉치 친구들은 희재 언니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짠했다. 동현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이제야 알려서 다들 마음 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부 치마로 만들고, 풍성하게 디자인할게요. 너무 길면 사람들이 몰릴 때 옷에 걸려 넘어질 수 있어서 위험해요."
"그렇네. 작년에도 사람들이 북적이긴 했어. 경찰들이 질서를 잘 잡아줘서 그렇지."
영주 언니가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올해는 용산구청에서 작년보다 홍보를 더 대대적으로 하고 있어. 관광객들이 훨씬 더 몰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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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이 멕시코]에서 소울메이트 언니들을 만났을 때, 미성은 언니들 옷까지 제작하겠다며 <죽음 마스크를 쓴 소녀> 그림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세 언니는 오뭉치끼리만 콘셉트를 같이 해서 의상을 만들라고 했다. 언니들은 각자 분장을 준비하기로 했다.
미성은 오뭉치 분장옷 제작을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업체에게 맡겼다. 재봉 솜씨가 좋은 사장님이 저렴한 가격으로 제작해 주기로 했다. 여러 모델하우스에서 쓰던 커튼들을 재활용하겠다고 사장님은 말했다.
민주는 마스크를 담당했다. 기성품에서 해골 마스크를 골라 주문하기로 했다. 열심히 쇼핑몰을 검색한 민주가 천으로 만든 해골 마스크를 발견했다. 그 마스크는 광택이 있는 두툼하고 매끄러운 천으로 만들어져서 뼈의 질감이 느껴졌다. 상처 같아 보이는 지퍼를 앞쪽, 옆쪽, 뒤쪽 등 각 제품마다 다르게 달아 쓰기 편하면서도 똑같지 않았다. 눈부분에 구멍이 크게 뚫려있어 시야도 잘 확보되었다. 구멍 테두리에 색깔 천이 덧대어 있어 분장한 상태에서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쉬웠다.
동현과 선희는 초등학교 교원 임용시험과 공기업 면접시험 때문에 이번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참석은 꼭 해야 한다는 혜리의 주문에 당연하다며 두 사람 모두 큰 소리로 대답했다.
*
지나는 약속시간 보다 좀 일찍 집에서 나왔다. 오후부터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촛불 집회가 주말마다 도모되고 있었다. 지나는 0.73퍼센트 차이의 패배에 대한 아쉬움은 이해했지만, 선거로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통령 퇴진 집회가 연달아 열리는 것에 피로감을 느꼈다.
지나가 이태리에서 도착한 후 한 주도 빠짐없이 토요일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광화문에 자리 잡은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지나의 가족들은 소음 때문에 고통받았다. 윤 대통령 퇴진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같은 도로를 나누어 퇴진반대집회도 열리고 있었다. 10월 29일 토요일인 그날도 유난히 경찰관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의견이 다른 두 집회 세력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들은 각각의 세력을 둘러싸는 바리케이드를 쳤다.
윤 대통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선 후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영부인이 관저 쇼핑을 한 후 한남동에 있는 외교부장관 관저를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윤 대통령이 국방부 청사를 집무실로 쓰게 되어 국방부도 이전했다. 정부의 관저와 집무실들이 도미노처럼 이전을 시작했고, 그 사실은 집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윤 대통령이 용산 시대를 열면 광화문에서 시위했던 사람들이 용산 쪽으로 몰려갔으면 좋겠다고 지나는 생각 했다. 집에서 조용한 주말을 보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었다. 광화문역에서 전철을 타려고 걸으며 지나는 성조기와 태극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지나는 세 국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전철역을 나서고 있었다. 외모로는 어느 쪽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라는 기치 아래 서로에게 루비콘 강을 건넜다며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 공덕역에서 환승하려고 내렸을 때 희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나랑 동현이는 광화문 쪽으로 가고 있어. 너랑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유치원 자리도 가보려고. 유치원은 이미 사라졌지만 재건축된 건물이 멋있고 구경거리가 많으니까. 너네 집 근처에서 놀다가 이태원에는 10시쯤 다시 갈게.
-참, 이태원이 많이 붐벼. 특히 해밀턴 호텔 옆 이마트 24 편의점 있는 데는 클럽에 줄 선 사람들까지 있어 걷기도 답답해. 그러니까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쭉 걸어서 씨유편의점 있는 넓은 길로 세계음식점 거리로 들어가. 아니면 중간중간에 다른 골목길도 두세 개 있으니까 그 길로 오던지.
-알았어. 이따 보자. 지나는 일곱 시 전에 올 거지?
영주가 무척 바쁜 모양이었다.
-응, 환승 중
지나는 희재와 동현이 [엔조이멕시코] 만남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 게 신기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해서 남을 돌본다는 건 1도 생각하지 않았던 희재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곧 열흘쯤 뒤에 임용고시를 봐야 하는 동현이 저렇게 자주 희재를 만나도 되나 걱정도 되었지만, 어차피 본인의 선택이었다. 동현은 차분하고 똑똑해 보였다. 혜리에게 일 년 이상을 엄마가 돌아가신 걸 말하지 않았다고는 들었다. 아버지와도 관계가 끊겼다니, 동현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또 있었다. 지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배웅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동현이의 아버지는 캐나다로 간 뒤 연락두절이라니 딱한 처지였다.
지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내려서 희재의 말대로 쭉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좁은 골목길이 평소와는 달리 너무 복잡해 보여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나는 골목 안이 어떤 상태인지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몇 발자국 골목 쪽으로 다가갔다.
‘희재의 말대로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네. 이래도 되나?’
경찰관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 좁은 오르막 골목길에 몇 발자국 접어들자마자 다시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전철역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뒤에서 계속 뒤따랐다. 밀려서 저절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지나는 이탈리아에서 바티칸 박물관의 <지도의 방>을 구경할 때 사람들에 떠밀려 걸어갔던 순간이 떠 올랐다. 그때는 한쪽 방향으로만 사람들이 걸었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관광객들이 계속 뒤따라 올 때 가이드는 귀에 거는 이어폰을 통해 계속 조심해야 한다고 외쳤었다.
“절대 멈추시면 안 돼요. 매우 위험합니다. 다 구경 못하시더라고 대충 보고 통과하세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지도의 방>에서 바삐 걸었던 기억이 났다. 이태원에는 안내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지나는 너무 소름이 끼쳤다. 올라가는 골목이 굉장히 좁은데 이태원역에서 내린 인구는 여기로 다 몰려서 세계음식거리에서 도로변으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섞였다. 길 옆에 있는 클럽에 줄 서 있는 사람들까지 더해져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지나는 길가 벽 쪽으로 붙으며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와 영주의 가게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6시 50분쯤 되었다. 100미터 정도 거리를 올라오는데 거의 20분이 더 걸렸다.
“영주야, 지금 지하철역 1번 출구에서 여기로 올라오는 길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 너무 빽빽해서 무서워."
“걱정 마. 경찰들이 통제할 거야.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게다가 길 건너 3번 출구 바로 옆이 경찰서야.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조치를 할 거야."
“그러게. 1번 출구에서 올라오는 길만 바리케이드 치고 다른 골목들로 분산시켜 올라오게 하면 될 텐데. 내려가게만 해도 복잡한 길일 텐데.”
지나는 불안감이 떨쳐지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쉬었다.
*
겨우 한숨을 돌린 지나에게 영주는 미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지나야, 이제 혜리랑 민주와 당번 좀 바꿔줘. 오늘 정말 바쁘네."
"응, 알았어."
지나는 지금이라도 119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하다 서둘러 움직였다. 얼른 준비해 온 핼러윈 복장으로 갈아입고 서빙을 시작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뚫고 오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힘을 써서인지 몸이 늘어지고 힘이 없어졌다. 온몸이 긴장해서 인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혜리와 민주는 미성이 택배로 부쳐준 핼러윈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해골 마스크를 손에 들고 세계음식점 거리로 나갈 채비를 했다.
"미성이랑 선희는?"
지나가 물었다.
“선희는 이번 주 목요일부터 신입사원 연수 갔어요. 오늘 연수가 12시쯤 끝나면, 춘천 쪽이라 엄마네 들려서 오후 10시쯤 오기로 했어요. 미성이는 어제 부산 출장 갔다, 일 마치고 평택에 들러서 회사 사람 결혼식에 참여하고 온대요. 두 사람의 핼러윈 의상은 언니 가게로 보냈어요. 저희는 클럽도 들려보고 좀 돌아다니다 10시에 맞춰 올게요. 우리 밤새고 놀 거예요. 영주 언니, 장소 제공해 주시고 택배 챙겨줘서 감사드려요. "
혜리가 언제나처럼 싹싹하게 미소를 띠며 친구들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
희재는 동현과 광화문 곳곳을 걸었다. 시위 때문에 시끄럽고 경찰들이 곳곳에서 거리를 통제했지만 핼러윈 분장을 해서 그런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동현도 희재 언니와 시내 한복판을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걷다 보니 두 사람은 덕수궁 앞에 도착했다. 덕수궁 대문 앞에는 하얀 천막이 크게 쳐 있었고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코로나 백신 희생자들이었다. 분향소에는 백 명이 넘는 사망자들의 사진과 이름, 나이, 그리고 간단한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코로나 백신을 맞고 하루, 이틀 뒤에 죽었지만,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아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희재와 동현은 분향하고, 하얀 국화를 영정사진 앞에 놓았다. 영정사진 아래 사망 나이를 보니 고등학교 2학년부터,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등 연령대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천막에서 나오자 희재는 동현에게 편지를 다 읽고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 동현이 외롭고 힘들 때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은 희재가 살아야 할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며 자신이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했던 사실을 고백했다. 동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희재에게 말했다.
"언니, 엄마가 돌아가신 건 언니 탓이 아니에요. 정말 많이 힘드셨네요."
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현아, 우리 앞으로도 자주 만나고, 재밌게 지내자. 그래도, 일단 시험은 봐야 하니까 내일부터 공부 열심히 하고,”
“네, 언니,”
희재와 동현은 9시 30분쯤 되자 영주네 가게로 향하였다.
-얘들아, 평택에서 서울 올라오는데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렸어. 고속터미널 도착. 이태원역에 10시쯤 도착할 것 같아. 이따 만나자.
미성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나도, 그때쯤 도착할 듯. 잘하면 지하철역에서 만나겠다. 이따 봐.
동현은 희재언니에게 지나언니에게 보냈던 카톡 내용을 공유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뭉치 카톡방에 희재언니의 카톡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게 분명했다.
-참, 이태원이 많이 붐벼. 특히 해밀턴 호텔 옆 이마트 편의점 있는 데는 클럽에 줄 선 사람들까지 있어 걷기도 답답해. 그러니까 1번 출구에서 나오면 쭉 걸어서 씨유 편의점이 있는 넓은 길로 세계음식 거리로 들어가. 아니면 중간중간에 다른 골목길도 두세 개 있으니까 그 길로 오던지.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 말풍선 옆에 숫자 4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영주와 지나는 카페를 정리하고 희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경찰들이 나타나 매장에 있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며 돌아다녔다. 영주는 주방에 설치된 태블릿 크기의 작은 티브이를 틀었다.
속보가 떴다. 오후 10시부터 10시 30분 사이에 이태원역 인근의 한 내리막 골목에서 갑자기 몰린 인파에 도미노처럼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현재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아니야. 갑자기가 아니야. 6시 30분. 세 시간 반전부터, 아니, 희재가 그전부터 붐빈다고 했었어. 내가 신고했어야 했나?”
지나는 자책감이 들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얼굴이 마찰열로 화끈거렸다.
“애들은. 오뭉치는?”
“민주랑 혜리는 전화를 안 받아. 희재와 동현이는 혜리 연락받고 경찰서로 가볼 거래. 미성이랑 선희가 10시쯤 사고 난 길을 통과하기로 되어 있었대.”
영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다음 의자에 철퍽 주저앉았다. TV 속보 소리만 가득 찬 카페 밖으로 구급차 소리와 경찰차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 고함소리들이 들렸다. 클럽들이 문을 열어 놓았는지 비트가 강한 경쾌한 댄스곡들 소리까지 합쳐져서 카페 유리문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
혜리와 민주는 이태원역 4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있는 건널목 신호등 옆에서 미성의 부모님을 만났다. 그들은 앞으로 쭉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골목길 맞은편 터키 빵집 앞에서 멈췄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골목길이 쓰러져 포개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미성의 부모님은 돌같이 굳어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우리 미성이가 저기에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우리 딸 미성이가...."
미성의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비틀거리다 미성 아버지에게 기댔다.
혜리와 민주는 가만히 있었다.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금 미성이와 선희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희재와 동현이 이태원역 3번 출구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를 들려 혜리와 민주에게로 왔다.
“지금 순천향 병원으로 사상자들이 이송되기 시작했대. 거기로 같이 가보자. 곧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모아놓은 공간도 마련 중이니, 일단 병원을 다녀온 뒤 거기도 가보자.”
혜리와 민주, 동현과 희재, 미성의 부모님은 택시를 잡으려다 포기하고 걷기 시작했다. 지하철도 이태원역을 무정차 통과하고,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도로는 승용차들과 119 구급차들, 경찰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여드는 구급차들을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큰일이 일어났음이 짐작되었다. 모두 천근만근 같은 다리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