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살아갈 용기
전화 벨소리가 맞았다.
"민주 선생님"
민주는 깊은 잠에 빠졌었다. 그러다, 에드 쉬런의 ‘퍼펙트’ 음악이 들리며 꿈속에서 노래 가사의 장면이 펼쳐졌다. 잔디밭에서 또래 친구 같은 여자가 맨발로 춤추고 있었다. 헝클어진 풍성한 머리카락에 파란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완벽했다. 민주는 잔디밭에서 맨발로 춤추는 여자가 미성이처럼 보였다. 정말 완벽한 친구였다.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찾아가는 친구....미성이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멍들지 않은 하얗고 깨끗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팔다리도 멀쩡했다. 부러지지도, 부러진 뼈에 피부가 뚫리지 않았다. 길고 매끈한 팔, 다리, 키에 비해 유난히 하얗고 작은 발로 풀밭에서 춤추고 있었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없는데도 미성이는 빛났다. 미성이와 민주가 좋아했던 “퍼펙트‘ 노래에 맞춰 맨발로 풀밭에서 춤을 추었다. 음악이 반복되자 꿈을 꾸던 민주는 전화벨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눈을 뜨니 전화벨 음악이 전화기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네, 저예요."
민주는 잠결에 대답했다.
"민주선생님, 우리 용준이가 선생님을 찾아서요. 전화하고 싶대요 "
“내일 새벽 5시 30분 수업 때문에요? 무슨 일이 있나요?”
“네... 어제 용준이가 이태원에서 사고를 당했어요. ”
민주는 잠이 확 달아났다.
"아.... "
“선생님, 용준이가 선생님을 좋아했나 봐요. 죽을 뻔했고, 심하게 다치니까 선생님과 꼭 연락하고 싶어 하네요. 갑작스러운 전화 정말 죄송합니다. 바꿔 드릴게요.”
용준의 어머니는 어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주는 용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차콜 색깔이 떠올랐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선생님, 저 용준이에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살아있는 게 다행이에요. 머리 부분은 멀쩡한데 다른 데가 너무 아파요.”
“그래. 잘했어. 살아서 다행이야.”
민주는 떨며 대답했다.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
‘미성이와 선희도 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 선생님, 용준이가 사지를 전혀 쓸 수가 없어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힘내세요. 어머니."
'용준이가 많이 다쳤구나.'
용준이는 몇 달 전부터 단체 수업으로는 부족하다며 개인 레슨을 신청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을 시작해서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다. 남동생과 나이가 같아서 민주는 용준을 귀여워했었다. 민주는 용준이가 자기를 무척 따른다는 것은 알았다. 라포가 워낙 잘 형성되어 수업하기가 수월했고 성과도 좋았었다. 그래도, 죽기 직전에 자신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민주는 미성이와 선희가 죽어갈 때 누구를 떠올리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극심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선희는 어떻게 그렇게 다치지 않았을까? 민주는 어젯밤 서서 뭉쳐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서서 엉켜있었다. 앞사람들이 넘어져 층을 이루며 벽처럼 막아서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 시간들의 사고 현장이 다시 떠오르자 민주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을 감았다.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 다시 눈뜨기도 싫다. 보기에도 힘든데 그 현장을 온몸으로 겪었다니. '
민주는 사고 전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면 사고 현장을 보지 않았다면 덜 괴울 것 같았다.
민주는 핸드폰 시간을 보고 미술학원 간이침대에서 얼른 일어났다. 곧 민주가 담당한 학생들이 미술학원으로 올 시간이었다. 입시가 코 앞이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민주는 삶이 막막해졌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 달 낼 월세도 없었다. 지금 부모님과 민주는 고등학교 2학년인 남동생의 입시에 올인하고 있었다. 동생은 공부를 참 잘했다. 민주는 어려워진 형편에도 부모님께 사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민주도 남동생을 돕고 있었다. 남동생이 의과대학만 가면 온 가족에게 다시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부모님은 굳게 믿었다. 민주 자신도 좋은 대학에 합격한 덕분에 안정적으로 돈을 벌었다. 부모님의 생각이 옳았다.
일을 해야 돈이 생겼다. 일을 하지 않으면 한 푼도 생기지 않는다. 민주는 매달 생활하는 것이 자전거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페달을 밟지 않는 순간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집으로 가려고 해도 방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 방, 그리고 거실은 3인용 소파도 놓을 수 없었다. 부엌과 연결된 좁은 공간이었다. 민주를 위한 공간은 집 어디에도 없었다. 충분히 슬퍼할래도 돈이 필요한 걸까? 민주는 침대에서 다시 누워 핸드폰 시계만 바라보았다. 도저히 일어나 학생들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렸다.
*
동현은 선희의 모습을 본 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상황도 떠올랐다. 어머니의 헐떡거리던 숨소리와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무력감이 동현을 얼어붙게 했다. 어릴 때 건강하고 자신만만했던 어머니와 그렇게 빨리 이별하게 될 줄 몰랐었다. 선희와의 이별은 불과 대여섯 시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 전화를 했어야 했다.'
사람과의 접촉을 유난히 싫어하는 희재 언니는 사고 난 골목이 복잡하다며 우회해서 가자고 했다. 희재언니가 지나 언니한테 카톡을 보내는 것을 보고 오뭉치 친구들에게도 카톡을 보냈었다. 카톡을 보내고 읽지 않아서 신경이 쓰이긴 했었다. 동현은 자괴감이 들었다. 전화할 시간도 충분했었다. 전철을 타야 했고, 전철 안에서 전화하는 게 실례인 것 같아 망설였다는 것은 핑계였다. 자신의 불찰로 선희와 미성이가 죽었다. 미성이의 모습까지 본다면 동현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빨리 뛰며 과호흡 증세가 나타났다. 희재언니는 동현을 보고 어머니를 불렀다.
동현은 희재 언니집에 도착하자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집과 비슷해 보였다. 여기서 잔다고 생각하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차마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지만, 이태원 터키빵집 앞에서 도로를 건너 봤던 광경과 선희의 모습 때문에 혼자 집에 갈 자신도,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너무 무섭고 괴롭고 허망했다.
희재 언니의 새어머니는 군대 간 아들방을 사용하라고 친절하고 편안하게 여러 번 말했다. 선의가 넘치는 분이었다.
현관에서 거실로 가는 복도벽에 희재언니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 언니, 어쩜 네 사람이 다 똑같이 생겼어요? ”
“ 그런 말 많이 들어. 내가 아빠를 닮았거든, 돌아가신 엄마와 아빠는 너무 다르게 생겨서 서로 끌렸대. 새엄마는 나랑 거의 똑같이 생겼고.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 태어난 남동생은 당연히 나와 비슷하겠지. “
"그러게요. 이렇게 닮은 가족은 처음 봐요."
“아버지는 나랑 새엄마가 닮아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말하는 데 내가 보기에는 본인이랑 닮아서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동현은 몇 시간 만에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 나만 이렇게 언니네 집에 와도 되나?’
선희와 미성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혜리와 민주보다 먼저 병원에서 빠져나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
희재는 동현이에게 헐렁한 긴 팔 티와 긴 잠옷 바지를 주었다. 이층 침대를 좋아했던 희준의 침대에서 1층과 2층 중 마음대로 선택해서 자라고 했다. 화진이 주문 제작해 매트리스가 더블 사이즈인 크고 튼튼한 2층 침대였다. 단독 주택이라 층고도 높아 키가 큰 희준이 2층 침대에서 일어서도 머리가 천정에 닿지 않았다. 동현은 1층에 자리 잡았다. 희준의 방에 있는 화장실과 분리된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쓰러진 듯 잠이 들었다. 희재는 살짝 문을 열어 동현이 잠든 것을 보았다.
희재는 2층 거실에 단출하게 놓인 러브 소파에 앉아 새벽의 어둑어둑한 정원을 내려 보았다. 연못가에 작은 고양이 집 2개가 보였다. 연두색이었다. 근처 정원등의 빛을 반사해서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엄마가 길냥이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 줬구나. 정원에서 기르기로 마음먹었나’
희재는 K- 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연못가 정원석에서 햇빛을 쬐며 늘어져 있었던 고양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절대 속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그때 엄마는 정말 화가 많이 났고 단호했다. 엄마의 의견을 듣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재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눈을 감고 살아 있는 듯이 보였던 선희의 모습은 얕은 물에서 쓰러져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던 엄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누구도 그렇게 얕은 물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에 엄마가 익사당했는지 몰랐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경찰서가 길 건너 이태원 3번 출구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런데 도로 하나 건너 이태원 1번 출구 앞 골목에서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다니. 희재는 일어 나서는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현과 경찰서를 갈 때만 해도 미성과 선희가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떴다. 햇빛을 받아 나뭇잎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희재는 거실 의자에 앉아 정원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9월 16일 [엔조이 멕시코]에서 처음 만났던 오뭉치 팬들, 동현의 편지를 읽고 감명받아 동현과 대화하느라 다른 친구들과는 대화를 많이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뭉치는 한나를 대할 때 큰 힘을 주었다. 오뭉치가 한나의 가스라이팅을 방패처럼 같이 막아준 기분이 들었었다.
한나는 지금 재민 대신 대표를 맡아 <핑크 에인절>과 월드투어 중이었다. 한나의 영화 제작사는 재민이 맡았다. 그래도, 한나는 부부동반으로 투어를 다니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옹으로 갈등을 덮은 것처럼 보였다. 어쭙잖게 재민부부와 K-엔터테인먼트 회장 사이의 갈등에 <소울메이트>가 끼어들었다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질 뻔했다.
고맙고 사랑스러웠던 오뭉치 중 미성과 선희가 사고를 당했다. 희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무언가 돕고 싶었다. 동현이를 시험 볼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희재는 마음먹었다.
*
"동현아, 몸은 좀 괜찮아? 혹시 민주한테 전화받았니?"
"아니, 무슨 일 있어? "
“응, 민주가 미술학원을 당분간 쉬어야겠대. 에너지가 바닥나서 수업을 못하겠대. 게다가, 가르치던 학생 중에 이태원에서 심하게 다친 애도 있나 봐. 그래서 혹시 돈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
“민주가 돈이야기를 해? ”
“응, 민주가 오피스텔 보증금 빼서 고시원으로 옮길 계획이래. 보증금 빠질 때까지 동생 학원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대. 달릴 만큼 달렸다고."
"완전히 지쳤나? 번아웃된 것 같네. 내가 전화해 볼게."
‘그래. 한번 해 봐. 내가 돈이 있으면 빌려 줄텐데.... 알다시피 나는 'from hand to mouth'잖아. 하루 벌어 하루 쓰기 급급해. 민주는 이백만 원이 필요한데 백만 원도 없어. 엄마가 내 이름으로 청약통장에 저축해 놓은 돈 빼서 주고 싶은데 도장이 없어. 통장 재발급받으며 싸인으로 바꿔 볼까도 생각했는데 엄마가 알면 쫓겨 날 것 같아."
혜리의 구구한 변명은 사실이었다.
동현은 말없이 들었다. 뜻밖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오뭉치끼리 돈거래를 한 적이 없었다.
동현이 서너 번 전화를 걸고 나서야 민주가 받았다.
"민주야, 혜리한테 이야기 들었어. 이제 사고 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좀 차분하게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
"동현아, 그게 안돼. 뉴스에 대한 댓글들을 보면 미친 듯이 화가 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말을 안 들었다", "시민의식이 실종됐다", "경찰에 협조하지 않았다", "본인들 탓이다", "무질서했다", "거길 왜 갔나" 등 억울하게 죽은 미성이와 선희를 탓해. "놀러 가서 죽었다."다며 유튜버들이 떠들어 댈 때 걔네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
정 안되면 나라도 죽으려고. 이태원 참사 후 일주일은 나한테 악몽이야.
우리 집 망하고 받은 수모가 얼마나 차갑고 무서웠는데..... 세상은 사악해. 그렇게 부지런하고 일이랑 공부만 하던 애들을 죽여 놓고 .....흑흑흑..."
민주는 마침내 울었다. 감정이 격앙되고 통제되지 않았다. 민주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동현은 처음 들었다. 동현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민주야, 지금 어디야? "
"한강이야. 산책하다 강가에 앉아 있어. 두서없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내가 지금 돈 이백만 원 빌려줄 테니까 삼성역으로 와. 너 술 못 마시지?"
"응, 커피만 아홉 잔 마셨어. 나 스트레스 심하면 커피 많이 마시잖아."
"그래. 삼성역 3번 출구에서 만나자. 지금이 오후 8시네. 9시까지 와. 내가 은행에서 현금 찾아서 줄게."
"이체해도 돼. "
"아니야. 만나서 차용증 받고 줘야지."
민주는 사실 죽으러 한강으로 갔었다. 생각해 보니 자기만 죽으면 엄마 아빠가 오피스텔 보증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다행히 빚은 없으니 이번 달 남동생 학원비만 한 달 연체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수업을 그만둔다고 말하자 학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올해 입시까지는 꼭 마무리하고 그만두라고 했다. 원장한테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민주를 이해하지 못했다.
원장은 용준이에 대해서만 안타깝고 속상해했다. 용준이가 학원에 냈던 수업료가 상당했다. 원장은 용준이가 부상이 나으면 자기 학원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민주에게 부탁했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면 민주 자신을 인정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에게 모든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세상은 무섭고 잔인하고 냉정했다.
민주는 동현에게 엄마의 은행계좌를 문자로 보내고 거기로 돈을 송금해 달라고 한 뒤 자신은 강에 뛰어들려고 했다. 엄마에게 보증금을 찾으면 동현이에게 이백 만원을 보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빚이 많아 죽은 딸 빚까지 갚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남동생이 과외라도 하려면 일 년 몇 개월은 버텨야 했다. 고아인 동현의 돈을 떼먹을 수는 없었다. 민주는 강가에서 걸어 나왔다. 꽤 먼 거리였다. 에너지가 바닥을 쳐 밥 먹을 힘이 없어 믹스커피만 마시는 민주였다. 자신이 죽으려고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썼다는 게 신기했다.
“강 민주, 아직 살아있네.” 민주는 중얼거렸다.
민주는 전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 객실 좌석이 비어 있었다. 민주는 철퍼덕 의자에 앉았다. 전철의 달리는 소리가 반가웠다. 마음도 차분해졌다.
민주는 동현을 만나자 돈봉투를 받았다. 동현은 민주의 손에 돈봉투 건넨 후 민주를
두 팔로 안았다.
“민주야, 일단 돈 입금해서 이체하고 희재언니네로 가자. 언니가 나 시험 볼 때까지 같이 있자고 한 거 알지?”
동현은 포옹을 풀고 민주와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응.”
“거기 연못도 있어. 신기하게도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집이랑 똑같아. 근데 지하실이 없어. 대신 2층 방에 엄청 크고 튼튼한 더블 사이즈 2층 침대가 있어.”
“그래? 그런 집에 지하실이 다 있는 게 아니네."
민주는 동현과 마주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돈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곧 수능철이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학생들 때문에 오피스텔도 잘 나갈 것 같았다.
“민주야, 우리 기생충 하자. 희재언니가 너도 데리고 오래”
“엥? 기생충?”
“맞아. 죽는 것보다는 기생충 하는 게 나아. 나도 지금 혼자 내 집에 못 들어가. 너도 그래 보여. 그냥 당분간 기생충 하자.”
민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현의 말에 설득되었다.
*
지나는 뉴스를 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대통령이 매일 조문을 하고 있었다. 국화들로 장식된 분향소에 섰다. 대통령이 산더미 같은 국화들 앞에서 서서 머리를 숙인다. 위폐도 없고, 영정 사진도 없다. 158명이 죽었다는데.....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향소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지나는 황당해서 대통령이 조문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문을 저렇게 여러 번하나? 조문을 저렇게 매일 꽃무덤에 하나?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분명히 이름이 있었다. 남궁 미성과 배 선희. 예쁘고 착하고 성실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청년들의 이름이 지워졌다. 얼굴도 지워졌다. 그 자리를 하얀 국화들이 지킨다. 저기에 하얀 장미들을 꽂았다면 결혼식장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나는 정부의 참사에 대응하는 태도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의 인파가 예전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아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파악한다”며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고 밝혔다. 장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었다. 작년에 비해 턱없이 줄어든 질서유지 경찰 숫자들이 여러 언론을 통해 지적되고 있었다.
행정안전부장관은 전혀 책임을 질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광화문에서 있었던 시민들만을 탓했다. “많은 시민이 도심에 모일 것으로 예상해 경찰 병력 상당수가 광화문 쪽으로 배치됐다”며 “서울 시내 곳곳에 소요와 시위가 있어 경찰 병력이 분산됐던 측면이 있었다”라고 해명했다.
광화문의 상황을 보고 이태원을 갔던 지나는 알량한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된 장관의 뻔뻔함에 경악했다. 지나는 참사 후 자신이 덫에 걸려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다 점점 상처를 입는 산짐승처럼 느껴졌다. 아프고 답답하고 슬펐다. 희생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싶었다.
지나는 한동안 쉬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세이로 썼지만 고위직 책임자들을 처단하는 액션이 들어가며 점점 소설이 되어갔다. 어떤 때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영화에서 썼던 닭모이 기계에 고위직 책임자를 집어넣는 설정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민주는 희재의 집에 당분간 동현과 살게 되었다. 살던 오피스텔 보증금 이천 만원으로 매달 남동생의 사교육비를 송금하며 당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했다. 동현도 희재 언니와의 약속 때문에 시험을 보러 갔다. 공부도 하는 척만 했다.
민주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용준에게 병문안을 갔다. 용준의 다리들과 왼팔, 왼손은 다행히 감각이 돌아왔다. 다만 오른손의 기능이 아직 살아나지 않았다. 의사는 이 정도인 게 천만다행이라며 재활을 꾸준히 하면 정상을 회복할 거라는 희망적인 진단을 내렸다. 용준은 민주에게 꼭 다시 선생님께 배울 거라고 약속했다. 민주는 수업을 쉬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민주는 용준이처럼 몸을 다치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다. 민주 자신도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회복해. 내가 가르쳐 줄 게.”
용준은 민주의 말을 듣고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저는 이제 글도 써야 해요. 이태원에 같이 갔다 죽은 진우 몫까지 살 거예요. 진우가 쓰고 싶어 했던 게임스토리도 짤 거고요. 저는 작가가 되어서 이번 대참사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만들 거예요.”
글 쓰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민주였지만 용준을 응원했다.
용준은 두 명의 친구와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 참석했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진우가 유명을 달리했다. 한 친구는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운명의 여신은 장님이라더니.'
민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 걷는 데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모퉁이 돌면 곧 크리스마스였다. 이제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민주가 희재 언니 집 현관에 들어서자 외출하는 화진과 마주쳤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화진은 빙긋 웃으면 말했다.
“너네 잘 뭉친다. 그래서 뭉치라고 지었구나. 좋아 좋아. 샌드위치는 냉장고에 자주 만들어 놓을 테니까 배고플 때 꺼내 먹어. 내 역할은 여기까지.”
민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사합니다.”
민주는 민폐를 끼칠 용기를 내었다.
■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