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트럭의 전광판에 희생자들의 사진들이 차례로 떴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각자의 사연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연인이 같이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외국 유학 중 일시적으로 귀국했다 유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었다. 화려한 연주복 드레스를 입은 음악전공자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전광판에 환하게 웃는 미성이가 나타났다. 미성이가 등산복을 입고 등산스틱을 쥐고 산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미성이는 대학시절 학교산악부 동아리를 했었다. 힘든 산을 올라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울메이트> 공연을 본 후 오뭉치와 맥주를 마시며 떠드는 것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었다. 핼러윈 드레스를 제작한 후 택배를 보내면서도 혜리에게 세상 행복하다고 말했었다.
선희의 모습도 전광판에 떠올랐다. 대학 졸업식 때 꽃다발을 들고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민주는 미성이 어머니에게 선희의 부모님은 49재에는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진으로 참석을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선희 부모님이 춘천 교회에서 선희의 장례식을 조용하게 치렀다는 소식도 미성의 부모님을 통해 들었다. 선희의 동생들도 49재에는 오지 않았다.
혜리, 민주, 동현, 지나, 영주, 희재는 전광판에서 미성과 선희의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여섯 명 모두는 미성과 선희가 이름을 잃고, 얼굴도 가려진 채 156명 희생자의 한 명으로 불리는 게 싫었었다. 10월 29일 이태원 압사사고 이후 서울 곳곳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참사 희생자들의 개인정보 보호와 유족들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국화들로 제단을 만들고 국화를 헌화하거나 향을 분향하고 묵념하게 만든 공간들이었다.
동현은 참사 당일 광화문에 있었던 코로나 희생자를 위한 분향소가 생각났다. 그 분향소 안까지 들어가서 코로나 백신 부작용에 희생된 사람들의 영정 사진 앞에서 희재언니와 꽃을 헌화하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명복을 빌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진과 이름 사연을 보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난 사람들을 추모했다. 하지만 이태원 대규모 압사 사고 후 추모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제까지 상식으로 여겨졌던 영정 사진들과 위폐를 분향소에 놓는 것을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로 몰고 갔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것이 몰상식하고 무례한 행동인 것처럼 일부 언론들이 비난하기 시작했다. 정작 유가족들은 위폐도, 영정사진도 없는 이런 분향소를 본 적이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울면서 항의했다. 물론 슬픔에 잠겨 희생자들의 사진 공개를 원하지 않는 가족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만 유가족들의 뜻을 존중해서 비공개로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동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리, 민주의 생각도 같았다. 희재 언니도 동현에게 광화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동현아, 덕수궁 앞 분향소에 만약 영정 사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코로나 백신 부작용의 실체적 진실에 의문을 가졌을까? 국화들을 보고 뭐 느꼈을까? "
희재언니에 말에 동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느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쓰나미처럼 몰려왔던 상실감이 떠올랐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온갖 우여곡절이 있은 후 참사가 나고 47일 만인 12월 14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참사 현장 인근에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안치된 시민분향소가 처음 설치됐다. 그리고 이틀 뒤인 16일에 10.29 이태원참사 49재 시민추모제가 오후 6시 이태원역 앞 녹사평역 방향 도로에서 열렸다. 시민추모제의 주제는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였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 대표는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환생하기를 빈다. 우리 아이들을 잊지 말아 달라."라고 말했다. 이어 참사 당일 최초 신고 시간으로 알려진 오후 6시 34분이 되자 조명을 끄고 추모의 뜻을 담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추모제에서 여러 공연과 낭독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족들이 추모객들에게 부탁했다.
“우리 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은 죽어서 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같이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우리를 꼭 기억해 주세요.”
추모식이 끝나자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꽃다발과 편지, 엽서, 포스트잇 메모,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적힌 종이 플래카드로 덮였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과 비통해하며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혜리는 49재가 끝날 무렵 너무 울어서 탈진했다. 미성이와 선희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유족들이나 친구들이 죽은 희생자들에게 못다 한 말을 할 때, 이제는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을 때, 혜리는 늦더라도 꼭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자신의 오지랖이 저주스러웠다.
선희는 고향인 춘천에서 명문 여고를 나왔다.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경쟁이 치열한 고등학교였지만, 항상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고 들었다. 혜리는 명석하고 공부를 잘하는 선희를 부러워했다. 혜리는 공부를 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최고 명문대를 나온 변호사인 아버지와 선생님인 어머니에게 무시를 당하며 자랐다. 혜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희를 ‘잘한다. 최고다.'라고 인정해 주는 가족들이 내심 부러웠다.
혜리는 선희를 부러워했던 것이 정말 미안했다. 다 미안했다. 카톡으로 오는 시간을 확인한 것도, 만나는 장소를 공지하고 바빠도 되도록 시간을 맞추자고 재촉한 것도. 모두 후회되었다. 미성이와 선희를 좁은 골목길로 죽도록 몰아넣은 것도 혜리 자신의 탓이었다. 혜리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가슴을 너무 세게 쳐서 곁에 있던 민주와 동현이 혜리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아파. 그만해.”
민주가 소리쳤다. 지나가는 추모객들은 혜리를 보며 참사 유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와 동현은 혜리의 갑작스러운 자책에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동현과 민주는 미성과 선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결합해서 비참하고 우울했다. 그래서 둘은 연대해서 죽기 살기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희재 언니도 도와주었다.
혜리가 이렇게까지 고통받고 있는지 몰랐다. 영주 언니가 울다 기진맥진한 혜리를 껴안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 내가 이태원에 카페만 안 차렸어도, 네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미안해, 미안해.”
지나가 모두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 아직 추모객들도 많아서 길을 막고 있으면 위험해. 우리 영주 카페로 가자.”
지나가 앞장섰다. 희재가 영주의 팔짱을 꼈다. 동현이 혜리를 부축하고 민주는 두 사람의 뒤를 엄호했다. 여섯 사람은 참사가 일어났던 골목을 지나 영주카페에 다다랐다.
영주의 카페에 다다르자 지나는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연 후 재빠르게 움직였다. 의자와 테이블을 한쪽벽으로 밀었다. 그리고 참사 당일에 깔았던 두툼한 방수용 돗자리를 깔고 부엌 싱크대 하단 서랍장에서 구즈다운 침낭을 두 개 꺼냈다.
동현과 민주는 혜리를 돗자리 위에 뉘었다. 혜리는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누운 혜리를 둘러싸고 다섯 명이 앉았다.
“누구의 탓도 아니야. 이런 사고가 생길 줄 누가 예측했겠어. 내가 신고만 했어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수없이 자책했었어. 하지만 아까 49재에서 최초 신고 시간에 조명을 끄고 묵념했을 때, 내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위로를 받았어. 잘 생각해 봐. 논리의 비약이 많아. 영주나 혜리야. 너네 탓은 하나도 없어. 그냥 우리 잊지 말고 기억해 주자. 미성이와 선희가 우리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아 소멸하지 않도록.”
모두 고개를 숙이고 슬픔에 잠겨 지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
민주는 햇빛을 쬐며 정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 근처에 작은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을 화진이 펼쳐 놓았다. 접이식이었다. 화진이 한 번씩 정원에 있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도 주고 놀아주려고 갖다 놓았다. 야외용 캣타워도 가져다 놓았다. 노란 연두색 고양이 집 곁에 짙은 초록색 우산이 접혀 있는 캣타워가 세워졌다. 고양이들은 전 길냥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정원에 있는 쥐들이 다 사라져서 정말 좋아.”
화진이 야기할 때 민주 속으로 연못 속 잉어나 금붕어, 그리고 작은 거북이 세 마리도 걱정되었다. 고양이들은 한 번씩 비둘기나 찍박구리, 참새, 박새도 공격했다. 어느 날 민주가 부리가 날카롭게 달리고 눈동자가 반짝이는 비둘기 머리를 연못가 돌 위에서 발견한 적도 있었다. 까치는 호전적이어서 한 번은 흑백고양이인 얼룩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까치는 물러설 기질이 아니었다. 결국 얼룩이가 도망갔다. 집 안까지 따라 들어가려는 까치를 민주가 마당 쓰는 빗자루로 쫓아 주었다. 밝은 베이지색 고양이는 민주가 크리미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연못과 그 주변도 삶의 치열한 현장이었다.
민주는 아버지가 사업에 망했을 무렵 학교를 가려고 대문을 나섰을 때 채권자 아주머니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민주는 그 아주머니의 말을 잊을 수 없다. 그 아주머니는 민주가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큰 결심을 한 듯 민주의 왼손을 꼭 잡았다. 민주는 놀라서 얼어 버렸었다.
"소리 내지 말고 따라와. 내가 이렇게라도 해야지 너무 분해서 안 되겠어."
집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 편의점 파라솔이 있는 야외 테이블 앞 의자에 민주를 앉혀 놓았었다. 머리가 뽀글거리고 얼굴이 화가 나서 발갛게 달아 오른 아주머니였다. 민주에게 도망치면 엄마 아빠집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민주 앞에 보름달 빵과 딸기 우유를 놓아주고 자기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너 돈이 생명보다 소중한 거 알지? 돈 없으면 굶어 죽어. 이제는 우리 나비랑 바둑이 사료 살 돈도 없어. 너네 아빠가 건너 건너 내 돈을 해쳐먹었어.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 신발 다 내 돈에서 나온 거야."
아주머니는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는 눈치였다. 핸드폰과 민주를 번갈아 보았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 아주머니는 민주의 신발, 가방, 점퍼를 가지고 커피를 다 마신 후 가버렸다. 그날 민주가 계속 야외 테이블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는 걸 본 편의점 직원이 어머니에게 전화해 주었다. 민주는 학교에 결석했다.
이제 민주는 그 아주머니가 이해가 갔다. 돈을 벌기는 어려웠고 번 돈을 모으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돈을 벌려면 자존심과 취향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다. 멸시는 간혹 당하고 가벼운 무시는 수시로 당해야 했다. 그래서 죽은 미성이와 민주는 에드 쉬런의 ' 퍼펙트' 노래를 전화 벨소리로 설정했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면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완벽해요. 저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에요.' 가사를 들을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순수한 사람의 태도 때문에 미성이와 민주는 눈물이 날 만큼 좋아했다.
민주는 왜 자신이 한강으로 죽으러 갔는지 생각해 보았다. 미성이와 선희가 부정당하고 무시당했기 때문이었다. 민주 자신도 많은 마음의 상처가 떠올라서였다. 민주는 굳게 마음먹었다.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해 주기로, 미성이와 선희를 제대로 알리고 욕보이는 사람들에게 반격하기로.. '
까치처럼 그들보다 작지만 기개를 가지고 죽고 살기로 덤비기로 마음먹었다.
*
49재 이후 혜리는 가출을 결심했다. 부모님이 혜리의 감정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다. 평소에 냉랭한 관계였던 오빠만 퇴근하며 혜리가 집에 있는지 확인했다. 혜리가 밤늦게 귀가할 때면 거실에서 기다리다 얼굴을 보고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특히 혜리가 웃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했다. 억지로 양손으로 볼을 잡아당겨 웃는 얼굴로 만들 기세였다. 혜리는 엄마에게 특히 배신감을 느꼈다. 10.29 참사 전에는 혜리에게 웃을 상황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얼굴이 밝냐고 조증 같다고 말했었다. 지금은 우울증이 아니냐며 정신과를 가보자고 자꾸 채근했다. 혜리의 인내심이 바닥을 칠 무렵 엄마는 민주에게 돈도 못 빌려주게 했다.
49재날 밤에 혜리는 영주 언니 카페에서 잤다. 울다 쓰러졌던 혜리는 영주언니와 함께 잠을 자고 다음날 집에 갔다. 혜리는 영주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카페에서 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에서 지내는 것이 못 견디게 힘들다며 진심으로 영주에게 사정했다.
돈도 없고 살 곳이 없던 혜리에게는 마지막 보루였다. 부모님 때문에 자기는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영주언니는 4일 아르바이트 주급 하루치를 숙박비로 받겠다고 했다. 혜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영주의 카페에는 여분의 공간이 적어 많은 짐은 가져올 수 없다. 그래서 혜리는 집, 학교, 카페를 왔다 갔다 하며 생활했다. 혜리의 부모님은 혜리를 거의 만날 수 없게 되어 당황했다. 두 분 다 직장을 다녀서 혜리와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혜리 부모님은 혜리를 만나려면 영주의 카페를 들려야 했다.
혜리는 아르바이트를 안 할 때는 희재의 집에 가있기도 했다. 동현과 민주는 이층침대에서 자고 영주는 마루 바닥에 새로 산 구즈다운 침낭에서 잤다. 동현과 민주는 희준이 휴가 나올 때는 영주의 카페에서 자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현과 민주도 영주 카페에서 자는 날이 늘어났다. 혜리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여 걱정이 되어서였다. 혜리가 혼자 카페에서 자는 것이 위험하게도 느껴서도 그랬지만, 동현과 민주도 이상하게 폭신폭신한 캠핑용 방수 돗자리와 포근포근한 구즈다운 침낭이 편했다. 안전하게 노숙자나 방랑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던 어느 봄날, 비가 오고 바람 소리가 심하던 날, 혼자 자고 있던 혜리에게 행복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미성이와 선희가 핼러윈 파티 때 입기로 했던 파란색,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혜리를 찾아왔다. 어느 날은 파란 드레스를 입은 미성이가, 또 다른 날은 노란 드레스를 입은 선희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처음 나타난 날처럼 함께 오는 날도 있었다. 와서 압사당했던 날 상황을 말해주기도 하고 혜리의 하소연이나 혜리가 하루를 보냈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잠깐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긴 대화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화진은 희재에게 2층 침대 옆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는 혜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 마디 했다.
“혜리 삼년상 치르니? 카페 바닥에서 자질 않나. 뭔가 속죄하는 행동 아니야? 영주 카페도 미성이 선희 사고당한 데서 엄청 가깝잖아. 옛날 사람들이 무덤가에서 움막 짓고 사는 거랑 비슷해 보여.”
“그러고 보니 그렇게도 보이네요, 혜리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걱정했는데......”
희재는 대답했다.
*
혜리는 대학졸업 후 영주의 카페를 인수했다. 청약 예금을 깨서 계약금을 지급했고 나머지 금액은 매달 이자와 분납하기로 했다. 영주가 전업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는 극단 [삶과 죽음]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을 하기로 2년 계약을 맺었다. 혜리는 희준이 군대에서 돌아오면서 희재집에서 나온 동현, 민주와 살고 있었다. 동현은 올해 임용고시를 볼 계획이었다. 민주는 일 년 만에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온 용준을 OOOO 미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민주는 일상을 회복했다. 남동생은 재수 학원을 다니지만, 살면서 그 정도 역경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혜리는 아직도 아르바이트하는 날에는 영주의 카페 바닥에서 잠을 잤다. 혜리는 두 번째 핼러윈을 카페에서 보냈다. 미성이가 디자인해 준 옷을 입고 동현, 민주와 잭 오 랜턴을 켜며 <소울메이트> 언니들과 맥주와 치킨을 먹고 떠들었다. 그리고, 오후 10시가 넘어서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골목길을 여러 번 함께 오르내렸다. 군중유체화 현상으로 물과 액체처럼 떠다니다 깔려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기렸다.
오뭉치와 소울메이트에게 핼러윈은 미성과 선희를 기억하고, 그들의 영혼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혜리는 자기 전 빈 카페에서 미성과 선희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혜리에게 핼러윈은 자주 찾아오는 날이 되었다. 하지만 혜리는 신중하고 침착해져서 그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도 공기 중에 떠다닌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혜리 자신도 자신을 믿지 못했다. 혹시 자신이 미쳐서 죽은 친구들이 보이나 걱정도 했다. 하지만 미성이와 선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혜리는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