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모멘토 모리와 핼러윈
지나는 잘 웃지 않는 혜리가 걱정스러웠다. 혜리는 음으로 표현하자면 기본 도보다 한 옥타브 높은 도 상태였다. 이제는 한 옥타브, 아니 두 옥타브 낮은 도 상태가 되었다. 혜리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나도 혜리의 환대와 챙김, 궁금하지 않은 정보까지 제공하는 친절함이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혜리는 갑자기 늙어버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와 비슷해 보였다. 지나는 혜리를 돕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 혜리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혜리는 한 발자국도 걸을 힘이 없다며 거절했다.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2주 뒤부터 영주는 카페의 영업을 재개했다. 애도 분위기로 인해 손님이 많지 않았다. 혜리는 몸이 아프다고 한 달정도 아르바이트를 쉬겠다고 했다. 영주의 원래 계획은 핼러윈 파티 이후에 한 주정도 쉬다가 연극 <빨간 머리 앤>의 앤 역할 오디션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이번 사고로 영주는 의욕이 꺾였다. 한나와 만난 이후 영주는 걸그룹으로 재기하겠다는 꿈을 접었다. 대신 연극하는 것에 더 몰두하고 싶어졌다. 혜리가 카페에 오지 않는 동안 영주는 최근 몇 년 동안 혜리가 얼마나 자신에게 에너지를 주었는지 깨달았다. 오뭉치가 방패처럼 영주의 외로움과 비참함을 막아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영주는 혼자 많이 울었다. 오뭉치는 보잘것없는 영주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다. 혜리와 민주에 비하면 자주는 아니지만 미성, 선희, 동현도 바쁜 와중에도 영주에게 와서 <소울메이트>의 전성기 시절을 추억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다.
오뭉치가 사라져 버렸다. 핼러윈 파티 날, 예기치 못한 사고로......영주는 혜리가 빨리 몸과 마음이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소울메이트>의 단체 카톡방에서 희재의 혜리에 대한 걱정이 점점 커졌다.
- 애들이 그러는데 혜리가 카페에서 잘 때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미성이와 선희 같대..
- 안 그래도 혜리 어머니가 전화하셨어. 우울함이 너무 오래간다고 정신과를 데리고 가고 싶은데 고집이 장난이 아니래. 원래도 네네 대답만 하고 말을 안 듣는 타입이라 키우기 힘들었대. 이제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대.
영주가 들은 대로 전했다.
- 그렇게 스위트한 애가 부모님 말은 잘 안 들었나 봐.
지나는 뜻밖이라 놀라는 피치 이모티콘을 보냈다.
- 다 그렇지 않아. 우리 엄마도 나 너무 힘들었대. 너무 까칠해서.
- 이제야 말할 수 있다네. 생명의 은인을 인정하네.
- 엄마가 동현이와 민주한테 대하는 거 보고 감명받았어. 민주가 연못 좋아하는 것 알고는 일부러 캠핑용 의자랑 테이블까지 연못가에 갖다 놨어. 일광욕을 피부 탄다고 엄청 싫어하거든. 길냥이를 위해서는 야외용 캣타워까지. 더 놀라운 건 자라면서 자기가 고생했다는 말은 언젠가 딱 한 번만 했어. 타고난 귀부인척 해. 배려가 많은데 비밀도 많아 보여.
- 희재야, 도대체 쓸데없는 의심은 뭐야? 잘해줘도 난리네.
본론으로 돌아가서 혜리 어떻게 해야 해?
- 지나야, 네가 병원 좀 데려가.
영주가 말했다.
- 혜리 어머니가 부탁하셨는데 네가 의사인 네 어머니 병원으로 자연스럽게 데리고 가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
- 알았어. 근데 꼭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 민주가 용준이 소개해줬을 때 엄마랑 뭔가 안 맞았다. 그래서 다른 의사 선생님을 추천해 줬어. 엄마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거는 알지? 그래도, 이야기 나누기가 편한 면이 있을 거야.
어쨌든 혜리를 잘 설득해 볼게.
진단은 필요한 것 같아.
- 지나야, 내가 그랬던 거 기억나지. 나도 돌아가신 엄마랑 꽤 오랫동안 밤에 놀았어. 나는 문제가 있었지. 우울증 약도 많이 먹고. 자살도 시도하고.
이래서 동현이랑 민주가 자꾸 영주네 카페에서 자는구나. 넓고 편안한 침대 두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지나는 혜리가 자살을 시도할까 봐 무서워졌다. 희재의 카톡에 공감해서 서둘러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 대화가 끝나고 지나는 혜리에게 다음 날 만나자고 전화했다. 지나는 혜리에게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라고 했다. 혜리는 뜻밖에도 지나가 연습생 시절에 식사를 해결했었던 송리단길의 가정식 백반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
지나는 석촌호수 근처로 걸어가면서 <소울메이트> 연습생 시절이 떠올랐다. 연습생 시절 살았던 빌라를 지나칠 때 변하지 않은 모습에 놀라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주변에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며 몇 년 사이 [송리단길]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녀가 <소울메이트> 멤버가 된 것은 희재 덕분에 얻은 기회였다. 얼떨결에 시작해서 많은 것을 경험한 소중한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최근 들어 한나 부부는 월드 투어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K-엔터테인먼트와 갈등을 봉합하게 된 것이 굉장히 특이한 이유였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이 믿어서 유명해진 [헤븐 스텝스]라는 사이비 종교 교주의 손자가 <핑크 에인절>을 좋아해서 월드 투어를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보도가 잠깐 있었다. 그러다 금방 새로운 뉴스들로 덮였다. 지나와 희재는 검색을 통해서 [헤븐 게이트]와 [헤븐 스텝스]가 연관되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나의 사람을 홀리는 능력이 다시 증명되는 것 같았다. 비밀 속에 잘 숨어 다니는 것도 여전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지나와 희재, 영주는 혀를 내둘렀다. 거대한 사이비 종교들의 한복판에 한나부부가 있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점점 확장하고 있었다. 월드 투어에서 <핑크 에인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인기곡들이 빌보드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었다. 재민을 회사에서 제거하려고 했던 진혁은 협상을 택했다.
“저들만의 세상은 저들의 이치대로 돌아가는 거고..... 나는 나대로 살아야지.”
지나는 자신 앞에 있는 문제를 생각하며 <소울메이트>에 얽힌 상념을 접었다. 혜리를 도와야 했다. 유령들을 보고 혼잣말을 한다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 외에 행동들은 매우 상식적이었다. 오히려 차분해지고 자아가 더 단단해 보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지나 씨. 오뭉치 아가씨도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밥집 사장님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본 밥집 사장님의 인사말에 혜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살짝 미소만 지었다. 지나는 혜리가 먹고 싶은 것을 시키게 했다. 혜리는 [오늘의 집밥]을 시켰다. 지나도 같은 메뉴로 주문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깔끔한 쇠고기 미역국과 매운 꽈리고추찜, 진미채 무침, 오이 무침, 지리멸 견과 볶음, 그리고 특식으로 닭날개 튀김이 1인당 3개씩 나왔다. 가격 대비 괜찮은 조합이었다.
밥집 사장님이 오랜만에 왔다고 닭날개 튀김을 하나씩 더 주었다.
음식이 나오자 혜리는 반찬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선희가 정말 좋아했던 미역국이에요. 깔끔하고 맛있어서 매번 먹을 때마다 생일 같다고 말했었는데. 매운 꽈리고추찜도 엄마가 만들어준 맛이라고 엄청 좋아했어요.
오이 무침은 미성이가 정말 좋아했고요. 닭날개 튀김은 오뭉치 전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지나는 <소울 메이트>도 닭날개 튀김을 제일 좋아했다고 대답했다. 그 후 말없이 밥을 다 먹었다. 지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의 20대의 조각들을 다시 찾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20대를 여기서 꿈을 꾸며 보냈구나.
혜리야, 여기서 만나자고 해서 고마워."
"아니에요. 여기는 오뭉치의 성지이기도 했어요."
"성지? 그래. 아이돌이 우상이란 뜻이란 게 확 와닿는다."
지나는 한나가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지나는 혜리와 근처 조용한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도 아늑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혜리야, 뭐 마실래? 내가 사가지고 올 게"
"언니, 고마워요. 제가 해야 하는 데 힘이 없어서요."
"괜찮아.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아이스 카페 라테요."
혜리는 지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눈동자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생기가 느껴졌다. 지나도 같은 커피를 시켰다.
지나가 진동벨을 가져오자 혜리가 진동벨을 달라고 했다. 진동벨이 울리자 혜리가 주문한 커피를 받아왔다.
커피를 마시면서 지나는 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혜리야, 마음이 많이 아프니?"
"네. 제 탓이니까요. 모임을 제가 주도했었어요. 마침 제가 사는 곳이 <소울메이트> 성지들과 가까워서요. 어쩌다 보니 핼러윈 파티도 영주 언니가 이태원에 <쿠키카페>를 연 그 해부터 시작했고요. 제가 제안했어요. 거리에서 참여를 독려하는 홍보지들이 붙어 있었고 전단지들도 나눠줬거든요. 선희, 미성이가 엄청 좋아했어요. 민주는 처음에는 뭐 그런 걸 하냐고 서양 귀신 놀이를 굳이 해야겠냐고 시큰둥했어요. 동현이는 집이 좀 멀어서 자는 장소 때문에 고민을 했고요."
지나는 혜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밤새 클럽에서 놀아도 되고 거리를 돌아다니다, 영주 언니 카페에서 잠깐 쉬어도 되니까... 영주 언니가 카페를 제공해 줬거든요. 테이블 의자에 앉아 모닝커피와 쿠키 먹고 집으로 출발하면 되니까... 그냥 다 참여하게 됐어요. 우린 다수결로 결정을 하면 서로 잘 따랐거든요."
혜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냅킨으로 닦기 시작했다.
지나는 혜리에게 물었다.
"혜리야, 미성이와 선희를 영주카페에서 만나니? 밤에 잘 때?"
혜리는 고개를 숙인 채 끄떡였다.
"민주와 동현이에게는 안 보인대요."
지나는 마주 보는 자리에서 혜리의 옆자리로 옮긴 후 혜리의 손을 잡았다.
"혜리야 그럴 수 있어. 희재도 엄마 돌아가시고 한동안 그랬어. 내 생각에 병원은 가서 건강을 체크하는 건 필요할 것 같아."
"언니, 제가 미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치료약을 먹게 되면 미성이와 선희를 못 보게 될까 봐 두려워요."
혜리의 말을 듣는 순간 지나는 울컥했다. 눈물이 지나의 시야를 가렸다.
"혜리야, 언니가 도와줄게. 고생 많았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네 탓이 아니야."
"언니, 어떻게 제 탓이 아닐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절대 치료받지 않을 거예요. 일상생활은 잘해나가고 있고, 영주 언니 카페에서 잘 때만 미성이와 선희가 나타나요."
“혜리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의사도 있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어. 검진만 받아 보자. 우리 엄마가 정신과 의사인 건 민주한테 들어서 알지? 민주 제자가 이태원에서 다쳐서 정신과 상담을 해줬었어. 그런데 정신과 의사도 환자와 맞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일단 검진해 보고 네가 원하는 의사 성향을 말하면 우리 엄마가 다른 의사를 소개해 줄 수도 있어.”
혜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카페 라테만 조금씩 마셨다. 지나는 혜리 옆에 앉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언니, 여러 가지로 무섭고 부담되지만 의사 선생님을 만나 볼게요.”
"그래. 잘 결정했어."
지나는 혜리를 껴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다.
*
민주는 용준을 가르치는 데 보람을 느꼈다. 이제 잘 걸어 다녔고, 몸이 움직일 때도 아파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른손의 감각이 전과 같지 않았다. 그래서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더디었지만, 최근에 부쩍 실력이 늘었다. 용준은 가끔씩 죽은 친구 진우 이야기를 민주에게 했다. 민주는 용준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진우가 꿈에 나타나거나 밤에 나타나 말 걸고 그러지는 않아?"
"꿈에 나타난 적은 여러 번이에요. 진우가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을 꼭 보라고 말했어요. 대학 합격하고 같이 여행 가기로 약속했었거든요."
"그게 뭐야?"
"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들이 근위병으로 왕을 지키다 모두 죽었대요. 스위스는 산밖에 없어 엄청 가난해서 자손들이 용병을 못할까 봐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어요. 그 죽은 용병들을 기념하려고 절벽을 깎아 엄청 큰 조각을 만들었대요.
"와, 진우라는 친구, 엄청 유식했네."
"네, 책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고 싶어 했어요. 게임 개발자도 되고 싶어 했고요. 스토리가 탄탄해야 게임이 롱런하거든요. 진우가 인간은 현재만 살지 않는다고. 인간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어서 후손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했어요."
"고등학생이 철학자 같아. "
"그러게요. 저도 진우를 기억하고, 진우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며 살려고요. 진우가 스토리를 쓰고 제가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이제 저 혼자 다 하게 생겼어요."
"그래. 그래도 너는 진우의 영혼을 보지는 않는구나."
"진우는 제 마음속에 있어요. 하지만 저는 영혼을 믿지는 않아요. 저는 무신론자예요."
"그래그래. 나도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
민주는 용준이 유령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한편으로는 혜리가 무척 걱정되었다. 영주언니카페에서 잘 때 한 번씩 미성과 선희와 대화하고 그 내용을 전해 주곤 했다. 대부분이 과거에 오뭉치 모임에서 나눴던 대화들이었다. 한 번은 동현에게 미성과 선희가 동현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동현이가 초등교사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날 동현은 펑펑 울다가 희재 언니 집으로 가서 자겠다며 카페를 떠났다. 카페를 떠나기 전, 동현은 혜리를 안으며 말했었다.
"혜리야 , 알겠어. 엄마 말 전해줘서 고맙다고 미성이와 선희 에게 전해 줘. 내일 아침부터 독서실 다니고 학원 알아볼 게."
민주는 혜리의 정신 건강이 걱정되었다. 혜리까지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래도 용준과 수업을 할 때면 큰 위로를 받았다. 용준은 부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민주는 인간이 현재만 사는 게 아니라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10.29 참사로 죽은 진우의 말에 감명받았다. 사람들은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되는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
지나의 어머니는 혜리의 증세가 장소가 국한되고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아 추적 관찰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치료를 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약물 치료를 시작하기로 혜리를 설득했다.
혜리는 일시적 조현병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 단기정신증적 장애로 진단되었다. 환각, 망상 등 조현병의 대표 증상이 나타나지만, 1개월 이내에 사라지고 재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혜리의 경우는 장소가 국한되긴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증상이 나타나고 있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혜리 씨, 의사인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요.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영혼이 존재하는 걸 볼 수도 있어요. 혜리 씨 마음속 존재들이 투영되어 실체를 가지고 나타났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영주 언니 카페 이외의 장소에서 친구들의 영혼이 나타나거나 말을 건다면 그때는 꼭 알려 줘야 해요."
"네, 그런데, 그런 적은 이제껏 없었어요."
"의사인 저는 핼러윈 축제가 있는 것도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죽으면 우리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잖아요. 실제로 영혼을 보거나 영혼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오늘 상담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다음 주에 또 만나요."
혜리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힘을 얻었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럴 수도 있다. 괜찮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동안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거짓말같이 들렸었다.
*
지나는 2022년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활동했던 소방관 두 명이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TV 뉴스와 유튜브 뉴스를 통해 접했다. 지나는 10.29 참사가 일어난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날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천 소방본부 소속 박모(30) 소방교는 이태원 참사 때 얻은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지난 8월 실종 열흘 만에 숨진 상태로 20일에 발견되었다. 고(故) 박 소방교는 이태원 참사 이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소방청의 '찾아가는 상담실'에서 심리상담을 받고 개인적 치료도 받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그 전달 29일에도 이태원 사고 현장에 출동했던 경남 고성소방서 소속 남모(44) 소방관이 공무상 요양 불승인 상태에서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고 남 소방관 역시 이태원 참사 구조 현장에 투입돼 트라우마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도 채 안 돼 2명의 소방관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참사 당시 소방관들이 얼마나 혼신을 다해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사망자들을 운송했는지 지나는 영주와 현장에서 직접 보았었다.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들에 비해 무력하게 구경만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카페 안으로 숨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구조에 참여했던 분들이 우울감과 죄책감을 느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는 너무 괴롭고 안타까웠다.
참사 직후 소방관들을 향한 악플 달리거나 비난이 쏟아진 것도 마치 악마들이 익명으로 천사들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부상자를 먼저 구해야 했는데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데만 주력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현장을 보지 않고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선 파출소에서 요청하는 기동대 파견을 거절한 고위 인사들은 빠져나가고 온몸을 던져 희생자들을 돕고 구한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을 비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에 더 이상의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보았던 참사 현장을 다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죽기 전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외치기로 마음먹었다.
■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 마지막 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