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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Sep 14. 2024

<크리스마스 파티>

6. 첫사랑

“선미 선생님, 바닷가 별장으로 가도 될까요?


현정은 선우가 화장실 간 사이에 얼른 전화를 했다.


“네, 어머니한테 안 가고 작업하러 간다니, 어쩔 수 없죠. 가세요. 내일 인터뷰는 시간 늦지 않도록 꼭 챙기세요.”


“네.”


현정은 화장실 문쪽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내가 저녁에 선우한테도 다시 알릴게요. 이번에도 지각하면 안 되니까.”


“네, 그럼 짐 챙겨서 30분 후에 떠나겠습니다.”


선우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현정은  선우에게 30분 후에 떠나서 오늘 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선우와 현정은 화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조증 삽화가 끝난 후 선우는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고 평정심을 잘 유지했다.

선미의 약처방이 선우에게 잘 맞았다. 다행이었다.

현정은 선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챙겼다. 선우가 식사를 안 하려고 해서 알람을 맞춰 놓고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했다. 현정은 선미의 지시를 충실히 지켰다. 식사뿐만 아니라 선우가 작업하는 동안 반드시 쉬도록 작업실로 안마 의자도 옮겨 놓았다. 선미와 현정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선우는  탈진해서 쓰러지지 않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선우는 정열적으로 작품을 완성해 갔다.


바닷가 별장으로 가는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별장 근처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선우의 차가 국도로 접어들어 달리다 별장으로 가는 샛길을 타기 전에 선우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정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야. 현우가 사고 난 지점. 왜 사고가 났을까? 크게 위험한 곳이 아닌데. 커브가 심한 곳도 아니고.

교통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여기는 우리 별장 들어가는 초입이라 현우가 익숙한 길인데,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게 신기하다니까. 내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현정은 '화가 났다'는 표현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정은 선우의 적절한 감정을 알고 싶어서 되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걱정이 된 것 아닐까요?"


"아니, 말 그대로 정말 화가 났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거야. 내 전시회가 두 달 전이라, 모델이 사고가 나면 곤란했거든. 내가 그 당시 꼭지가 돌아서 병원에 가서 고함지르고 난리 폈다가 잡혀서 나왔잖아. 언니가 앰뷸런스와 비상 구급요원을 불렀더라고."


현정은 선우의 감정이 지나치게 자기 본위라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선우의 작품들은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주제로 다양한 관객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선우의 극단적인 자기애에서 관객을 끄는 힘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직설적인 자기 응시라고 할까?

 죽은 나르시스가 지하세계에 가면서도 스틱스 강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는 신화가 떠올랐다.


 현정은 최근에 현우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던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작가님, 작가님께서는 많은 모델들 중 왜 현우 씨만 고집하세요? 현우 씨가 다쳤으면 다른 모델을 써도 되잖아요?"


현정은 운전을 하며 시선을 앞 도로에 두었다. 현우에 대한 호감이  드러나지 않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선우는 대답이 뻔한 질문이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리고 두 손을 손바닥을 위로해서 활짝 폈다. 현정은 선우의 동작이 커서 뭔가 부자연스럽고 연극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우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려 현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다른 모델을 썼지. 병원에 입원한 애를 무슨 수로 모델로 써. 현우는 날 다시 보면 사람 아니라고 했어. 전화까지 차단해서 내 분노 게이지가 최대치로 올라갔었지."


                                                                               *


차가 별장으로 들어섰다. 현정은 리모컨으로 주차장 셔터를 열었다. 선우는 현정에게 할 일들을 지시하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다 왔네. 트렁크에 있는 내 화구들 좀 옮겨줘. 작품 배경을 바꾸는 것 때문에 두 번 일을 하네.

나는 간단한 음료수라도 마셔야겠어"


선우는 최근 작업으로 없던 살이 더 빠져, 볼이 쑥 들어간 상태였다. 현정은 턱선이 날카로운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작업에 진심이었다. 현정은 가까이에서 선우를 보다 보면 어느 날 그녀가 공기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갈 것 같았다.

선우는 현정이 작업실로 화구들을 나르는 동안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각종 건강즙들이 보기 좋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선우는 호박즙을 하나 꺼냈다. 가위로 포장팩 끝을 조금 자른 후 빨대를 꽂아 빨아들였다.


선우는 자신이 현정에게 솔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선우는 자신이 놀랄 정도로 현우를 걱정했었다. 선우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현우의 사고 때 겪었던 강한 타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현우가 심하게 다쳐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선우는 자신이 무너지는 환영을 봤다. 하늘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때 느낄 것 같은 통증도 온몸을 관통했다. 선우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선우는 현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자신이 현우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선우가 현우를 처음 본 곳은 학교 앞 카페였다. 선우는 학교 정문을 들어서기 전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테 한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캐리어에 담아 교수 연구실로 가는 습관이 있었다.

학교 정문 앞 카페에서 파는 예가체프*의 과일향과 신맛이 그녀의 취향을 온전히 만족시켰다.


선우는 평소대로 가게 앞 도로에 주차하고 내렸다. 일상적인 일이지만 번거롭다고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 아프리칸> 카페 주인은 선우에게 평소처럼 날씨 이야기로 말을 걸며 인사했다. 그는 새 학기가 되자, 바빠져서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했다며 두 손으로 현우를 가리켰다.

풋풋하고, 해맑은 새내기 티가 나는 현우가 커피 머신 옆에 서 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을 보자마자 선우는 곧 사진작가인 남자 친구에게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우가 커피 캐리어를 들고 차에 타서 막 출발하려고 했다. 그 순간 카페에서 현우가 뛰어나왔다. 현우의 뛰는 모습을 보고, 선우는 그가 생각보다 더 완벽한 비율의 몸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객님, 카드 두고 가셨어요."

손님이 출발할 거 같아, 현우는 날렵하게 움직였다. 선우는 연구실로 오는 동안 현우가 카드를 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선우는 교수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남자 친구인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방금 [청춘] 모델에 적합한 친구를 우리 학교 앞 카페 <아프리칸>에서 만났어. 지금 시간 되면 가봐.

오늘이 수요일이어서 딱히 일정이 없을 것 같아서 전화해."


재혁은 그녀의 추천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강 작가님이 사람을 다 추천하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서쪽 하늘이 먼저 밝아 오는 것 같았어. 동쪽으로 해가 질 것 같으니, 잘 봐야겠다."


선우는 빈정거림 반, 질투 반인 그의 반응이 싫지는 않았다.


"자기, 질투하지 말고. 지난번에 더 좋은 작품을 찍으려면, 영감을 주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했잖아.”


“그러긴 했지. 뭔가 새로운 분위기를 가진 모델이 필요해.”


재혁은 심드렁하게  선우의 말에 동의했다.


“보는 순간 자기가 원했던 모델감이어서 말하는 거야. 뭔가 나를 바라볼 때,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 같았어."


선우와 통화를 끝낸 재혁은 소파에 전화기를 툭 던져 놓았다. 찬 물을 뒤집어쓴 듯 기분이 싸했다.  선우가 이렇게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 친구인 자신의 일에 관심을 나타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기랑 닮았다는 뜻이야? 그 녀석이 반사판이야? 호수야?


재혁은 러닝과 트렁크를 입고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었다. 모처럼 집에서 보내는 휴식이었다.

그는 선우의 전화를 받고 나서, 확 긴장감을 느끼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혁은 갑자기 선우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을 자신에게 추천한 것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서둘러 운동복을 입었다. 운동복은 재혁의 근육질 몸매와 잘 어울렸다. 재혁의 몸은 사진작가로 작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평소에 체력을 단련한 결과, 재혁은 무거운 카메라를 3개 이상 들고 다녀도, 크게 피로함을 느끼지 않았다. 재혁은 여행을 무척 좋아했고 트레킹을 즐겼다. 평일에도 두 시간 이상을 운동에 할애할 만큼 운동광이기도 했다.


재혁에게 선우는 사귈수록 힘든 연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쉽게 가까워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깊어지지 않았다. 재혁은 선우를 독점할 수가 없었다. 재혁은 선우에게 서로만 바라보자고 제안했지만, 선우는 구속은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선우는 사랑을 시작할 때는 자신을 다 내어주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시간이 지날수록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선우는 아름답고 강렬하고 변덕스러웠다.


재혁은 선우가 카페를 방문한 지 1시간쯤 뒤에 <아프리칸>을 방문했다. 다행히 아르바이트생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현우를 보는 순간 재혁은 선우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현우는 그에게 필요한 모델이었다.


“라테 한 잔, 시나몬 롤 하나 주세요.”


재혁은 주문한 뒤 창가에 앉아 멀리서 보이는 현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현우는 넓은 어깨, 작은 얼굴, 오뚝한 코, 긴 팔다리, 호리호리한 허리, 재혁이 원하던 모든 신체 조건을 가졌다. 평범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재혁은 자신이 현우를 이런 데서 만났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현우가 커피와 빵을 테이블로 가져와 놓자, 재혁은 자신이 사진작가인데 모델이 되어줄 수 있냐며 명함을 건넸다.

현우는 명함을 받은 채 재혁의 곁에 잠시 서 있었다. 왼손 손가락들로 허벅지를 피아노 치듯 톡톡 쳤다.


"혹시  연예인이나 가수 스카우트 제의는 아니죠? 한 번씩 길에서 스카우트당하는데 저는 연예인 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요."


재혁은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했다.

자기와 작업하고, [청춘] 모임에 참여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청춘] 모임에사진작가들의 경우에 한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델을 추천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청춘]에서 추천받은 모델을 전속모델로 선정할 때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하지만, 재혁은 현우라면 심사를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전속 모델만 되면, 꽤 오랫동안 일상생활에 유지하며 부업으로 모델 활동을 할 수 있어요. 군대를 가는 경우에 그 기간 동안은 활동정지 기간이 되어 불이익도 받지 않고."

재혁은 현우가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현우는 며칠 생각해 보고 재혁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현우는 [청춘]이 매그넘*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진작가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았다. 작품집들도 몇 개 소개되어 있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현우는 재혁과 모델 계약을 맺었다. 재혁의 추천을 받아 [청춘] 모임의 심사도 통과했다.

재혁은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사진작가로 해외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재혁은 [청춘] 모임의 대표작가로 관능적이면서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습을 자연 속에서  다양한 콘셉트의 사진 작품에 담았다.


                                                                                           *


“작가님, 화구들 다 옮겼어요. 제가 출발하기 전에  치킨과 맥주 드시겠어요?”

현정은 창밖을 보며 멍하게 앉아 있는 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지금 하려는 거 완성하고 편하게 먹고 마실래. 호박즙 하나 먹었어.”


선우는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업을 하는 수밖에.


“3시간 정도 뒤에 같이 먹어요.”


선우는 작업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아픔을 같이 느꼈고, 헤어지기 싫어 매달렸던 사랑’을 떠올렸다.





* 매그넘: 1947년 창립한 국제 자유 보도사진작가 그룹

이들은 특정 언론사 등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전속 사진작가들과 달리, 매그넘에 소속되어 다큐멘터리 형식의 사진을 전문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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