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잠시 후 샌드위치를 마저 먹으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현정은 현우의 시선을 느꼈지만, 점심을 먹는 데 집중했다. 강선우 작가를 경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오늘도 현정이 강 작가의 손목을 잡지 않았으면, 현우가 머리에 카메라를 맞았을 것이다. 아찔했던 상황이었다.
현우는 강선우 작가의 전 남자친구였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고 들었다. 강 작가는 워낙 남성 편력이 심해 자주 남자 친구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림 모델로는 8년째 현우만을 고집해서 주변 사람들이 난감해한다는 정보도 얻었다.
특히 2년 전 현우가 심한 사고를 당해 입원했을 때, 강 작가가 병원을 찾아가 난장판을 벌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다시 현우를 모델로 섭외하느라 <선우미 아트 에이전시 > 직원들이 현우에게 스토커처럼 매일 전화하다 안되어서 심지어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현정이 소속된 회사 과장이 현정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그 과장은 자기라면 절대 강 작가와 작업을 못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우가 보통 사람이 아니니, 현우한테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충고도 했다. 현정은 현우와 어떤 문제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현우는 수영장 썬베드에 앉아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현우는 일어나 반쯤 마신 커피컵을 한 손에 든 채로 현정에게 다가갔다. 현정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현우는 현정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질문을 했다.
"강 작가님 옆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현정은 쌍꺼풀이 없는 길고 큰 눈으로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앙다물었다 폈다 하다가 대답했다.
“선미 선생님께서 스튜디오 작업 전에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어요.
저보고 따로 연락 줄 때까지 대기하라고 하셨어요. 오늘로 조증 삽화가 열흘째라 한계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어쩌면 스튜디오 작업도 못할 수도 있대요. 전시회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너무 달리셔서 눈에 실핏줄까지 터지셨어요. 공격적인 태도도 보이시고.”
현우는 현정이 카메라일을 언급하자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워낙 익숙해요. 오늘 스튜디오 작업 취소되면, 잠깐 데이트할까요?”
현우는 농담처럼 툭 현정에게 물었다. 장난기 있는 표정이었다. 현정은 현우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지금 강 작가님의 이카루스 연작들을 보면서도 제가 데이트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태양 가까이 가서 추락하고 싶지 않아요.”
현정은 강 작가의 팬이기도 했다.
“설마 저를 태양으로 표현하신 거예요?”
현우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의 높은 콧대가 더 날렵해 보였다.
“뭐 예를 그렇게 든 셈이네요."
현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이번 전시회 작업들 다 끝난 다음에 서로 연락해요.”
현우는 현정에게 다시 한번 호감을 느끼며 미래의 데이트를 제안했다.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네”
현정도 싫지는 않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저는 일단 스튜디오에 가 있을게요. 변경 사항 있으면 연락 주세요."
현정은 뒤돌아 스튜디오로 향하는 현우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완벽한 비율의 체형을 가진 로맨스 만화의 주인공 같았다.
현우는 수영장에서 스튜디오를 가는 길에 바다와 소나무 숲들을 보았다. 하늘은 청량했고, 파도 소리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현우는 코로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신 후 맑은 공기로 폐를 팽창시켰다.
병원에서 현우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진서는 당황해서 얼어붙었다.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결국 진서는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다.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망설이는 현정의 모습을 보니, 진서의 마지막 모습이 겹쳤다. 현정이 경호원으로 처음 왔을 때부터 자신의 일에 열심이고 그 외에는 무심해 보이는 모습이 진서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호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진서는 바닷가에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여러 무리의 발가벗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한 호기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현우는 파티에 참여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다이아몬드 등급이었다. 운영진으로 비기너를 돕는 역할도 해야 해서 진서에게 먼저 다가갔다. 진서는 [청춘]의 다른 모델들과 달리 과시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아, 바닷가에서 자신의 팔로 자신의 몸을 안고 조각상처럼 멈춰 있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처음 참여하세요?"
현우는 진서의 다가가 옆에 선 후 말을 걸었다.
"네"
진서는 단답형으로 말하며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제가 버스 안에서 타원의 빛으로 둘러싸인 벌거벗은 여자를 봤어요. 저만 본 건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버스 안에서 하늘을 본 건 저뿐이었죠. [청춘]에서 보내온 초대장에 제가 본 이미지와 비슷한 사진이 있어서, 관련된 단체인 것 같아 초대에 응했어요."
진서는 처음 보는 현우에게 담담하고 자세하게 참여 경위를 말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듯이 편안한 신뢰가 있었다.
현우는 그런 진서에게 당황했다. 보통 말을 걸기보다는 웃으면서 팔짱을 끼거나 안는 경우는 많이 당했었다. 이렇게 특이한 광경을 보고 지원했다고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그렇군요."
현우는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질문을 던졌다.
"들뜨지 않으세요? 모두 식사할 때 제공된 알코올 때문인지, 여행지의 낯설고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몸이 달아 올라 뛰고 서로 부둥켜안고도 있는데, 너무 차분하시네요."
짧은 시간이지만 현우와 진서의 눈이 마주쳤다. 현우는 진서가 언젠가 만화에서 본 여자 주인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누구인지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진서는 물끄러미 현우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안아도 되나요?"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서는 그를 안았다. 그렇게 현우와 진서는 연인이 되었고, 3년 가까이를 사귀었다. 그들 사이에 밀고 당김은 없었다. 보고 싶을 때는 매일 만났다. 어느 날 누군가 만남에 지루함을 느끼면, 가감 없이 좀 지겨워서 한 달 뒤에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상대방은 그 말을 존중하고 그대로 수용했다. 면밀히 말하면, 현우가 원하는 대로 진서가 가능한 따랐다. 진서는 바쁜 일정에도 현우가 보고 싶어서, 그가 원하면 어디든 달려가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어 했다.
언제인가는 전철을 타고 와, 잠실 전철역 지하 분수대 앞에서 현우를 10분 동안 포옹하고 키스한 뒤, 바라보다 돌아간 적도 있었다. 현우가 피곤하긴 한데, 여행 다녀오면서 산 과자와 초콜릿을 진서에게 빨리 전해 주고 싶다고 말했을 때였다.
진서는 현우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마치 자신의 이상형이 일기장을 찢고 나와 서 있는 인상을 받았다. '첫눈에 반한다'란 의미를 깨달았다. 진서는 만난 지 1주년 기념 파티를 할 때 현우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다.
첫 바닷가 촬영 당시 모델 경험이 많은 현우는 진서가 최대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동작들을 다양하게 알려주었다. 진서는 자신의 몸에서 생각지도 못한 멋진 포즈가 나오는 것에 감동했었다. 현우는 진서의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몸으로 내면의 안정된 정서까지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서가 그렇게 빛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다. 현우는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
스튜디오에 도착한 현우는 창가에 있는 3인용 소파에 누웠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서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왔다. 4시 전에 좀 자야 했다. 자기 전에 현우는 작업실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담요가 개어 있는 것이 보였다. 스튜디오 공기의 온도는 바깥보다 훨씬 낮았다. 현우는 담요를 덮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났다.
강 작가가 하고 있는 작업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탄스러운 작품들이었다. 강 작가는 현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르시스 연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현우와 사귀기 시작할 때 본인의 작업 동기를 수줍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현우가 군대 가기 전의 일이었다.
현우는 강 작가와 애증이 얽힌 관계를 떠올리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가 쳤다. 강 작가는 현우의 상처에서 날개 자국을 발견했다며, 이번에는 그의 상처에서 이카루스 연작을 창조하고 있었다. 현우는 이번이 정말 강 작가와 마지막 작업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강 작가는 이카루스 같았다. 욕망이 넘쳤다. 미로로 떨어지는 새 깃털들을 모아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높이 날기를 원했다.
'그녀의 날개가 등에서 돋아난 튼튼한 날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
현우는 안타까웠다. 현우는 강 작가의 그림들이 워낙 비싸게 팔리는 덕분에 많은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미래는 알 수 없었다. [청춘]에서 배제된 것처럼 뜻밖의 이유로 힘들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강작가의 병이 눈에 띄게 진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현우는 자신은 높게 날기를 원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편하게 걷기를 원했다.
현우는 3인용 소파로 돌아와 눕고 담요를 덮었다. 그는 휴대폰 알람의 음량을 최대로 설정한 후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