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과 그림자 Sep 10. 2024

<크리스마스 파티>

2. 결혼기념일 여행

"외국에 누드 해변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


진서는 저녁밥을 차리면서 소파에 앉아 있는 진오를 흘끗 보며 말을 걸었다. 진오는 트렁크만 입고 스마트 TV로 여행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는 진서가 말을 건네었을 때, TV 화면을 뚫어지게 보느라 진서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누드 해변 들어 봤냐고?"


진서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알면서 왜 물어. 내 친구 경수 부부는 너무 좋아해서 해마다 가기도 해. 처음에만 어색하지, 두 번째부터  정말 아무렇지도 않대. 탑플리스 스타일 여자들도 많다더라고."


진오는 진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밥은 언제 돼? 배고파. 여행 이야기는 저녁 먹고 하자."


진오는 식사로 화제를 바꿨다.


"오늘 메뉴는 뭐야?"


"돼지 고추장 불고기랑 콩나물국, 오이소박이. 오이소박이는 데일리쿡 반찬에서 샀어. 자기가 지난번에 하도 맛있다고 하길래. 얼른 와서 앉아."


 진오와 진서는 식탁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서는 덥다고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아름다운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 매우 우아해 보였다. 진오는 진서의 모습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느꼈다. <은하철도 999>의 여주인공인  메텔 같은 모습이었다. 긴 머리, 하얀 피부, 옆으로 긴 쌍꺼풀 없는 눈, 조그맣지만 오뚝한 코, 입술선이 분명한 도톰한 입을 볼 때마다 아름다웠던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진서는 동그랗고 큰 진오의 얼굴을 보면 느껴지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 신기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짓는 진오는 사랑받고 있다는 아늑함을 줬다. 볼 때마다 잘 생겼다고 느껴져서 한참을 바라봤던 현우 얼굴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이제진오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맛있어?"


"응, 우리 여신님은 음식도 맛있게 하네. 근데 왜 아까 갑자기 그런 걸 물었어?"

진오는 좀 긴장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서는 결혼 1주년 여행은 좀 특별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휴가도 내고 마음먹고 떠나는 여행인데 뭔가 인상적이어야지."


진오는 설마 누드비치로 여행을 갈 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에 침을 삼켰다.


"왜 안돼? 경수 씨 부부도 갔다며. 우리라고 못 갈게 뭐 있어. 자기도 남의 사진들만 현상하고, 인쇄하고, 판매할 게 아니라 같이 놀고 겪어 보자. 사실 좀 안타까워. 보기보다 자유롭지도 않고, 가깝게 느껴지지도 않아. 오히려 발가벗은 낯선 사람들 속에 둘이 있으면 서로가 더 가깝고, 더 소중하게 느껴져."


진서는 식사를 마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진오에게 강하게 주장했다.


"나, 설거지하면서 좀 생각해 볼게. 난 둘이 단출하고 편안하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는데, 자기 제안이 너무 뜻밖이라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진오는 식탁의 그릇들을 개수대에 담그고, 행주로 식탁을 닦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좀 이따 다시 말해보자."

진서가 소파에 앉아 유튜브로 여행지들을 검색하며 대답했다.


진오는 흐르는 물에 그릇들을 헹구며, 진서와의 결혼 과정을 떠올렸다. 5년 전, 진오는 근무하는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서를 만났다. 진오는 진서를 처음 본 순간 [청춘] 클럽의 모델로 적합하다고 알아차렸다. 진오의 사무실은 35층이었지만, 진서를 따라 29층에서 내렸다.

진서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엘리베이터의 오른쪽 복도 끝에 있었다. 진서는 환경 컨설팅 회사인 EM ECO에 근무했다.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사원증에 김 진서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진오는 진서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기 위해, 자신의 회사 사람들 중 혹시 EM ECO에 아는 사람들이 있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경리 직원 중 한 명이 EM ECO에 친한 친구가 있었다. 진오는 거의 한 달 가까이를 소요해서 진서의 전화번호와 집주소를 알 수 있었다. 진오는 개인 정보를 캐는 게 익숙하지도, 썩 내키지도 않았지만 마땅히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청춘]에서 모델을 섭외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일반인 모델을 모집할 때는 회사 관계자들의 추천을 받았다. 추천된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하지 않고 초대장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파티 2달 전 화려한 초대장으로 장소와 시간, 참여 방식 등을 공지하고, 연락 오는 사람들에 한해서 계약을 진행했다.


 진서는 마루 소파에 앉아 설거지를 하는 진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크지 않은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였다. 다만 다리가 짧고 머리가 커 몸의 비율이 어딘지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진서는 자신이 진오와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이 너무나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진서는 진오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줄을 몰랐다. 엘리베이터는 항상 붐볐다. 게다가 출퇴근, 식사 시간 외에 진서는 승강기를 탈 일이 별로 없었다.

진오와 둘이서 마주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남을 크게 신경 쓰거나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진서가 현우와 헤어진 지 1년쯤 되었을 때 진오가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리며 진서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층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는 것으로 보였다.


"혹시, 커피 한잔 같이 하실 수 있을까요?"

진오는 얼굴이  귀까지 빨개지며, 수줍게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아뇨, 시간 없어요."

 진서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거래처와 회의가 잡혀 있었고, 진오도 그녀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알겠습니다.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진오는 실망한 얼굴로 알겠다면서도, 그의 손에 쥔 명함을 얼른 진서에게 내밀었다.


"혹시, 시간 되실 때, 생각나면, 문자라도 주세요. 제 명함입니다."


 '그럼, 누구 명함이겠어.'

진서속으로 생각했다. 낯선 남자가 자신이 거절했는데도 명함을 주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진서는  바쁜데 대화가 더 길어질까 봐 그냥  명함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진서를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사무실로 향했다.


열흘쯤 지났을까? 진서는 항상 카드 지갑에 꽂아 두던 교통카드 겸용 직불카드가 보이지 않아, 그동안 입었던 겉옷들과 핸드백을 뒤졌다. 그녀는  재킷 주머니에 들어 있는  까맣게 잊어버린 명함을 보았다.


 김 진오 [ 청춘] 인쇄, 판매 대행

              [바른 회계 사무실] 업무 지원 부장


 [청춘]이 설마 그 청춘일까? 진서는 명함을 보는 순간 현우가 떠올랐다. 현우와의 만남과 헤어짐의 기억이 심장을 치고 지나갔다. 진서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고, 진오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


 진오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햇빛이 많이 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진오는 카페에 들어서는 진서를 보는 순간 멀리서 일어서서 절하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 청춘] 클럽 회원이세요?"

진서는 진오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아니요. 저는 진서님 팬입니다."


진서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당황했다.

 "팬이라니요?"


"[청춘] 클럽에서 매년 발행하는 사진첩, 포스터, 엽서 등 진서 씨가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샀습니다."

진오는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차가운 한기가 전기가 흐르듯 온몸을 관통했다.


"말도 안 돼요. [청춘] 클럽 모델들은 신상 비공개가 보장되고, 얼굴도 흐릿하게 처리해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제가 노출됐을까요?"


진서는 그동안 자신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초대받아서 누드 파티를 즐기며 찍었던 사진들이 생각나 아찔했다.

진오는 자신이 [청춘]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들을 발행하고, 판매를 대행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판매를 대행해 수익금을 책정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모델들의 실명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 그래서 제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진서 씨를 만났을 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진오는 차분하게 진서를 바라보며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실례였지만, 제게는 운명 같았어요."


진서는 오의 말들을 듣고 놀랐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관계자이니까 그럴 수 있겠네요. 세상 참 좁아요. 비밀도 없고. 부끄럽네요."


서는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하얀 손가락들로 빗처럼 쓸어내렸다.


 진오와 진서 부부는 서로가 만나게 된 것을 다르고 알고 있었다. 진오는 그 사실을 진서에게 절대 밝히지 않았다.

진오는 진서를 모델로 추천한 뒤 3년간 엄청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진오는 진서의 사진들을 보며 사랑에 빠졌다.  진오가 판단한 대로, 진서는 카메라로 찍었을 때  돋보이는 몸매를 가졌다. 신체 비율이  좋  사진으로 보았을 때 더 아름다웠다.

그녀는 작은 얼굴과 긴 목, 탄력 있는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과 엉덩이는 사진을 찍었을 때 잘 깎여진 대리석 조각 같았다. 진오의 눈에는 완벽한 여신처럼 느껴져서, 진오는 첫 화보를 인쇄하는 순간 진서를 추앙하게 되었다.

 진오에게 호주의 첫 파티에서 진서가 사귄 현우의 존재는 엄청난 괴로움이었다. 현우는 진서보다 2살 어렸지만 다이아몬드 회원이었다. 현우는 실무진들과 함께 화보와 여러 물품 제작 및 판매에 관계했다. 현우와 진오일 년에 서너 번 미팅에서  만나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진오에게 2년 전 현우가 교통사고를 당함으로써 기회가 왔다.


                                                        *


 설거지를 마친 후 진오는 소파에서 진서의 어깨를 감싸며 옆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진서는 유튜브 보는 것을 멈추고 창 밖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오는 진서와 둘만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특히 진서의 부드러운 피부에 자신이 몸이 닿을 때면, 자신이 그녀를 독점 헸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현우 같은 자식쯤이야'

마음속으로 자신이 잘했다는 확신이 다시 들었다.


"진서야, 우리 누드해변 말고,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풍욕림을 할 수 있는 수목원 같은 곳으로. 

 나, 사실 누드해변에 전혀 관심이 없어. 아까 가 말을 던졌을 때 너무 당황스러웠어."


진오는 진서의 어깨를 안은 상태에서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들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검지로 머리카락을 말기도 했다.


"풍욕림? 지금은 7월인데 정말 벌레가 우글우글할걸. 언젠가 수목원에 가서 평상에 잠깐 누워있다가 이름도 모를 벌레들한테 20군데 이상 물렸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어."

진서는 질색이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 계피로 만든 천연 방충제로 얼마든지 벌레를 쫓을 수 있어. 둘만이 즐길 수 있는 침엽수 자연림이 있는 숙소를 예약할게"

진오는 사정하 듯 두 손을 빌며 미소 띤 얼굴로 진서에게 부탁했다.


"싫어.  스트로브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누드가 허용된 바닷가로 가고 싶다고."

진서는 입술을 삐쭉거리다 고개를 흔든 후 진오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진오와 진서는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둘은 다음날 의논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진오는 진서가 현우와 여러 발가벗은 남녀들과 함께 스트로브 잣나무 숲을 하늘다람쥐처럼 나는 꿈을 꾸었다. 그들은 숲 속에서 겅중겅중 뛰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다 해변으로 가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겼다.

진오는 질투심에 온몸을 떨며 깨서, 옆에 누워 있는 진서를 한참 바라보다 다시 잠을 청했다.


"내가 진서를 [청춘] 클럽에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진오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진서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전 01화 <크리스마스 파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