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혁은 레스토랑에서 나와 거리를 서성였다. 참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집으로도, 작업실로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잡지 인터뷰 이후 부쩍 자주 만났던 유치원 동창인 정숙이 떠올랐다. 왠지 정숙에게는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와의 애증이 얽힌 사랑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재혁은 정숙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만나던 수제 맥주집에서 만나자고 부탁했다.
선우는 다시 결별을 통보했다. 정확히 말하면, 청혼을 거절했다.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를 다녀온 지 보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재혁과 선우는 12월 초 마이매미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 행사에 함께 참여했었다. 재혁은 선우와 아트 바젤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냈다. 재혁은 현우에게 빼앗겼던 선우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재혁은 크리스마스날, 선우와 점심 식사를 하며 청혼을 했다.
“이게 대체 뭐야?”
선우는 크고 반짝이는 눈을 3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고정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조명빛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을 난반사하고 있었다. 크기를 짐작할 수없을 만큼 커 보이는 보석이었다. 선우는 하늘색 박스에 담긴 반지를 한참 들여다본 뒤 재혁에게 물었다.
“우리 결혼하자. 네가 현우 같은 애송이한테 잠깐 정신 팔린 것은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아.”
선우는 고개를 흔든 후 손으로 날을 세운 양팔로 엑스표를 만들었다. 선우가 강한 부정을 표시하는 동작이었다.
“아니 아니, 나는 결혼 안 해. 그리고 아직 현우를 사랑해.”
선우에게 짐작도 못했던 말을 들은 재혁은 당황해서 손바닥을 보이며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우리가 같이 보냈던 밤들은 뭐야? 준비기간까지 일주일 내내 같이 지냈어. 관계할 때 빛나던 너의 사랑스러운 표정은 뭐지? “
재혁은 유치하다고 느끼면서도 기만당하고, 이용당한 것 같아 머리카락까지 곤두서서 따져 물었다.
“미안해. 좋은 일이 정말 많아서 기분이 들뜨고 너무 사랑을 하고 싶었어.
알잖아. 나, 조증 삽화일 때는 성적 욕구가 강해져 통제가 안된다는 거.
선미언니가 준 약들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가 없었어.”
재혁은 머리에 열이 차오르게 느껴져서 이마에 손을 얹을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선우를 두 번 잃고 싶지 않았다. 선우에게 청혼하기 위해 예전에 명품 TOO매장에 한정판을 주문했던 반지 상자를 식탁 위에 들었다 놓았다. 선우가 현우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보관하고 있던 반지였다.
”선우야, 나는 너를 다 이해해. 내 곁에서 너를 지켜 주고 싶어.
네가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계속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울게.”
선우는 눈썹을 추켜올리고 입을 꽉 다문 후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마에 가는 주름들이 잡혔다.
“지난번 현우랑 사귀기 시작할 때 분명히 거절했잖아. 우리는 이제 예술가 동료이자 그냥 친구야. 같이 자는 것과 사귀는 건 다른 문제야. “
재혁은 선우의 말을 듣고 테이블 위의 반지 상자를 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코트를 들고, 레스토랑을 나와 버렸다.
*
정숙은 재혁의 연락을 받자마자 집을 나섰다. 정숙은 이혼한 후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정숙과 재혁은 어릴 때 살던 집에 그대로 살아서 두 사람의 집은 가까웠다.
재혁은 수제 맥주집에서 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유치원 동창인 정숙이 나타나자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았다. 정숙이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재혁은 울면서 하소연했다.
"어쩔 줄 모르겠어. 마이애미에서는 그렇게 정열적으로 나를 원하더니....."
정숙은 재혁을 바라보며,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이 떠올라 눈물이 고였다. 정숙은 바람둥이였던 남편을 10년 이상 견디다가 헤어진 지 1년도 안되었다. 재혁의 고통이 같이 아파왔다.
결혼생활 동안 정숙은 올무에 걸린 듯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졌었다. 몸부림칠수록 점점 커지는 통증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키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숙은 훌쩍거리며 제혁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한테 첫사랑이라 더 힘든 거야. 이 나이에 사춘기 소년처럼. 철 안 들고 뭐 한 거니?
그냥 포기해. 나는 죽을 것 같아서 아이들까지 포기했어."
재혁은 정숙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등을 쳐주자 속상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정말 큰 용기야. 나는 알아. 말할 수 있어."
정숙이 재혁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정숙 본인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재혁은 울다가 멈추었다. 정숙은 자신을 따라 눈물을 닦으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정숙이 결사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정숙이 힘들어 보이고 안쓰러웠다.
재혁은 정숙에게 빈 잔에 흑맥주를 따라 주었다. 자신의 빈 잔에도 흑맥주를 따르고 마셨다. 에일계 흑맥주라서 맛이 씁쓸하고 깊고 두터웠다.
"우리 이렇게 계속 슬플 때 같이 울까? 기쁠 때는 같이 웃고?
우리 둘 다 에일계 흑맥주를 좋아해. 그림을 좋아하고, 커피는 산미가 강한 것을 좋아하네.
이성 편력이 많은 사람을 질색으로 여기는 것도 같고."
재혁은 울음을 그쳤다. 오른뺨에 보조개가 파이는 장난기 있는 미소를 띠며 정숙에게 물었다.
정숙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가리고 위아래로 움직여 닦았다. 얼굴의 차갑고 척척한 느낌이 따뜻한 손바닥의 열로 사라졌다.
정숙은 고개를 끄덕여 재혁의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워낙 어린 시절부터 친해서 재혁이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걸로 들렸다.
"그럼 , 우리 결혼하는 거지? "
재혁은 질문으로 프러포즈했다. 정숙은 다시 머리를 끄덕이려다 멈추고 고개를 들어 재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재혁은 평화롭고 차분한 표정에 따뜻하고 착한 눈빛으로 정숙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정숙아, 나를 지옥 같은 삼각관계에서 구원해 줘.”
재혁은 현우에게 마이애미에서 일주일 밤을 선우와 보냈다고 전화한 것을 후회했다. 더 이상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었다. 재혁은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재혁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꼭 결혼할 아내에게 주고 싶었던 반지였다.
반지를 보자 정숙은 흠칫 놀라며 당황했다. 그리고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한참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차근차근 정리하는 중이었다. 맥주잔이 비자, 정숙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오른손으로 받치고 45도 기울인 채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정숙은 몸을 똑바로 세워 자세를 바로 잡은 후 눈을 지그시 뜨고 재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 같이 서로를 구원하자. 다만 , 저 끔찍한 반지는 좀 치워. 내가 전남편에게서 여러 번 받았던 종류의 반지야. 외도할 때, 상간녀를 집으로 데려와 밤을 보낸 후 그 여자와 같은 액세서리를 선물하고는 했어. 비싸고, TOO에서 한정판으로 나온 거라며. 너는 그와는 달라야 해."
재혁은 반지 상자를 닫아 얼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정숙은 재혁의 손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재혁의 몸도 떨고 있었다. 재혁은 정숙과 결혼을 약속하며 선우에게서 벗어났다.
*
현우는 재혁의 전화를 받았을 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은 마이애미에서 일주일 내내 선우와 밤을 보냈고, 선우에게 청혼할 거라고 말했다. 현우는 선우와의 연인 관계를 시작하자마자 후회했다. 선우는 항상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랑도 현우가 감당하기에 벅찰 만큼 뜨겁다가 어느 순간 냉기가 감돌아 온도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선우작가와의 불미스러운 연인관계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두 분을 다 좋아하고 존경했었는데.”
현우는 선우가 나르시스 연작 작업을 하다 갑자기 자신을 뒤에서 안고 사랑을 고백했을 때, 거절하지 못했던 자신이 통탄스러웠다. 순간적으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어서, 도덕이나 훗날의 인간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현우는 선우를 처음에는 이성으로 느끼지 않았다.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교수와 학생 관계였고, 나이차도 17살이나 났다. 선우는 워낙 촉망받고 있던 작가라 자기같이 어린 학생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재혁 작가와 작업을 하게 된 것이 선우의 추천 때문인 것을 알았을 때 현우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재혁은 인체와 자연을 결합시켜, 관능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습을 사진 작품에 담았다.
부질없는 청춘의 아름다움과 소멸,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환성이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재혁에게 자연의 순환성은 소멸과 반대되는 부활의 계념이었다.
청춘의 완벽한 몸을 가진 모델들은 완전하기에 쇠퇴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 자체였다.
현우는 재혁과 작업할 때 처음에는 누드로 작업해야 해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기초 드로잉 수업에서 남녀 누드모델들을 접하고 나서,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그 후부터는 거부감 없이 재혁의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현우는 [청춘] 전속 모델 심사도 통과했다.
작가 추천 전속 모델들은 일반인 추천 모델들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원하면 참여할 수 있었고 같은 규정을 적용받았다. 현우는 해마다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또래의 여자들과 쉽게 만났고, 첫 경험도 했다.
정말 들뜨고 재미있었다. 그야말로 현우는 자신이 젊음의 주인공이자 상징이 된 기분이었다.
*
현우는 선우의 작업실로 찾아가서 더 이상 그녀와 모델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아트 바젤에서 돌아온 재혁에게 전화를 받은 후 후였다. 재혁은 선우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연인 관계를 회복했다고 간략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이런 식으로 기만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선우는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전시했던 작품들이 전시 시작하기 전날, VIP Preview에서 다 팔렸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신나고 흥분돼서 육체적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어."
현우는 뉴스를 통해 선우의 성공을 알고 있었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스타 마리우스 그란트가 선우의 작품 4점을 한꺼번에 구매한 사실이 이미 미술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술계의 한류가 시작되었다며 한국 미술의 세계화의 두 주역으로 남재혁과 강선우는 각광받았다.
선우는 현우에게 헤어질 수 없다고 울면서 말했다. 다시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현우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주먹을 쥐고 벽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모멸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선우를 작업실에 두고 나와 버렸다.
선우는 항상 10퍼센트 이상 넘쳤다. 사과하는 태도도 뭔가 감정과잉이었다. 선우가 무릎을 꿇은 모습도 무대 위에서 연극하는 것 같아 현우는 더 화가 났다.
“정말 이런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됐는데.”
현우는 이 괴로운 상황에서 도망쳐야 했다. 재혁의 상실감을 헤아리지 못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현우는 선우와 사랑을 시작하자마자 후회했었다. 현우는 재혁이 자신에게 아끼던 카메라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재혁이 얼마나 선우를 사랑하는지 알았다. 정말 관계들을 돌이키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었다. 선우가 자신에게 홀딱 빠졌다며 집착하자 현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우는 현우에게 사랑을 시작할 때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유혹이었다.
재혁은 선우가 세계적인 작가인 자신을 버리고 현우와 연인관계를 알려왔을 때 엄청난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과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애송이 모델에게 연인을 뺏겼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선우와 현우를 이어주는 오작교 노릇까지 했다는 사실을 후회했다. 현우를 처음 재혁에게 소개해 준 것은 선우였지만, 재혁이 선우에게도 현우를 모델로 쓰라고 권했었다.
재혁은 현우에게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되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재혁은 선우에게는 조증삽화로 일시적으로 성적충동을 강하게 받아서 그런 거니,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선우는 단번에 거절을 했다.
*
마이애미에서 돌아와서 재혁은 현우에게 당한 수모를 그대로 현우에게 되돌려 주었다. 현우는 반사되어 돌아온 상처를 똑같이 받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현우는 더 이상 선우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신경 전달 물질의 변화에 따라 남자를 바꿔야 하는 환자로 보였다.
현우는 선우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군대에 갔다.
"말할 수 없이 죄송하고 죽을 때까지 미안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현우는 재혁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