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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Sep 20. 2024

<크리스마스 파티>

11. 교통사고와 이별통보

진오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정원의 도움'을 떠올렸다. 정원은 진오에게 형제처럼 느껴지는 소중한 친구였다. 정원은 강릉에서 낚시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진오가 현우의 교통사고를 계획했을 때, 정원은 주도로의 cctv에 찍히지 않도록  탑차로 별장 근처 도로변에 진오의 오토바이를 실어다 주었다.

 정원은  현우의 교통사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진오가 치밀하게 준비하기도 했지만,  <선우미 예술기획사> 불필요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 이유도 있었다. 선우가 워낙 자주 스캔들에 휩싸이기 때문에 선미는 쓸데없는 억측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였다. 선우의  별장 앞 남자 모델의 교통사고는 조용히 수습되었다. 좁은 강릉시였지만 그 사고는 방송에서 뉴스로  보도되지 않았다.


 사고가 있기 전날, 진오는 정원의 낚시터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정원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청춘] 촬영지 섭외 문제로 어딘가 들려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진오의 지시를 받은 직원이 시간맞춰  스케줄 확인 전화를 했다.. 진오는 동선이 복잡해져서 고민하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정원에게 자신이 지정한 위치에 오토바이를 갖다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봇대 근처 풀 숲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으면, 진오가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면 진오가 오토바이를 타고 바닷가 도로로 연결된 샛길을 통해, 동호회 사람들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진오는  정원에게 오토바이와 키를 맡기고, 회사차를 타고  낙시터를 떠났다. 오토바이를 갖다 놓을 위치는 전봇대 번호로 특정하였다.


                                         *


 진오는  태백시와 동해시 주변을 오토바이를 타려고 서울을 떠나기 전 동해시의 관광호텔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진오는 영월을 지나 태백의 매봉산 바람의 언덕을 달렸다. 정상을 오르니 태백의 산들이 굽이굽이 펼쳐지며 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거대한 풍력발전 단지, 산 아래부터 정상 근처까지 자리 잡은 40만여 평의 고랭지 채소밭이 어울려 장관이었다.

삼척에서 태백 건의령으로 달리는 동안, 쾌청한 파란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 오른 하얀 구름들, 짙은 초록색의 산들이  펼치는 풍경들이  인상적이고 아름다워서  자주  바이크를 세우고 사진들을 찍었다.

태백에서 임계 방향으로 동해시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날이 맑아서 멀리 동해 바다가 조금 보였다.

 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속도감을 느끼며 멋진 풍경들을 계속 만나는 최고의 바이크 길이었다.


진오는 달리는 동안 자신의 무모했지만, 치밀하게 준비해서 성공했던 무용담을 떠올렸다.

사실 범죄행위였다. 이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완벽하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달려서 진오는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진오는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진서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지? 별일 없고?"


“뭐, 그냥 그래. 큰 언니를 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싫은지.

가족이랑 안 맞으면 답이 없는 것 같아. 직장이면 관둘 수나 있지.”


“하하, 나는 외동이라 너같이 불평할 자매들이 있다는 게 부럽던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독한 외로움을 겪었던 진오는 진심을 실어 말했다.

진오의 말에 진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푹 쉬어. 남의 떡이 커 보이나 봐.”


진서는 저녁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


진오는 동해에서 하루 밤을 잔 후 강릉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진오는 티맵으로 여정을 다시 확인했다.

강릉에 도착하면 바닷가 호텔에서 이틀쯤 머물며, 정원도 만날 계획이었다.


진오는 바닷가 도로를 달리며 해방감을 느꼈지만,  이 행복이 깨어질까 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두려운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알리가 만무하잖아. 벌써 2년이 지났고. 현우도 사고 당시 의식을 잃어서인지 기억이 명료하지 않아.

진서도 이제 나를 사랑해. 현우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진서는 현우를 버리지 않았어."


진오는 얼마 전 꿨던 꿈이 생각나자 얼굴을 찡그렸다.


 진오는 동해에서 강릉으로 달리는 동안, 많은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한 번쯤은 현우의 사고 현장을 달리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진오는 자신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 그래도. 감정적으로는 사고 현장을 다시 달리고 싶었다.

진오는 혹시 현우를 사고 장소에서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 진오의 오토바이를 보면, 현우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마주할까 봐 주저하게 되었다. 사고 당시에는 현우의 스케줄을 알 수 있는 조력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조력자도 현우도 [청춘]을 떠났다. 소문을 통해  강선우작가와 현우의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다.

 정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준오야. 너랑 만나기로 한 약속 옮겨야 할 것 같아.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서 와서 낚시터를 지켜야 해.


“그래?그러면 다시 연락하자. 수고해.


진오는 전화를 끊고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금방 잠들었다.


                                        *


현우는 서울에서 원주로 내려온 후 한 달에 한 번씩 시간 날 때 강릉 바닷가 사고 현장을 가봤다.

현우는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별장 근처에서 자신이 봤던 검은 오토바이를 또 볼 수 있기를 막연한 바랬다. 현우는 이카루스 연작 모델을 끝으로 선우와의 일을 그만두었다.

현우는 교통사고 후 실의에 빠졌었다. 선우와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선우미 예술 기획사>가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걸었다.

일을 쉬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던 현우는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다시 선우의 작업에 참여하기로 어렵게 결정했다. 현우는  군대를 다녀와서  선우가 모델을 부탁했을 때처럼 불가항력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현우는 한 번씩 자신이 선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우의 제안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현우는 선우와의 작업과정에서 현정을 만나서 매우 행복했다. 선우와 다시 작업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다. 어린 시절 잠깐 사랑하기도 했던 선우에 대해서는 이제는 감사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남았다. 어떤 때는 선우의 무책임했던 행동에 모멸감도 느꼈지만, 선우는 아픈 사람이었다.

선우는 이카루스 연작들 이후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기나긴 잠수기에 들어갔다.

 현우는 선우가 작가 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멀리서 마음으로나마  응원했다.

현우는 살아갈 궁리를 하느라 바빴다. 원주 시내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입시강사도 하고, 대학원에서 조교 생활도 하며, 미래를 도모했다. 

바쁜 중에도 현우는 좋아하는 커피도 사고, 재충전도 하기 위해   강릉을 방문했다. 강릉을 방문할 때마다   사건 현장에 가서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자라났다.

 현우는 자동차를 다시 샀다. 중형차를 중고로 살까 고민하다 신형 소형차를 할부로 구입했다.

새차의 프렌치 그레이색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사고 당시는 빨간색 차였다.


 현우는 사건 현장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범인만 사건 현장에 오는 것은 아니야. 피해자도 살아 있고 움직일 수만 있으면 사건 현장에 온다.

특히 범인을 못 잡았을 경우에는 사건 현장을 맴돈다.'


 현우는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혼잣말로 했다.


 "피해자가 오지 못하는 것은 죽거나 심하게 다쳐서 현장에 올 수 없는 처지겠지."


 현우는 막연한 피해 의식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차 앞으로 오토바이가 너무 바짝 달려와서 충돌할까 봐 핸들을 꺾었던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하게 떠올랐다.


선우의 별장 가는 길에 심겨 있던 자작나무들은  현우의 차와 부딪혀서 꺾였었다.

누군가가 부러진 나무들을 땅바닥에서 20센티 정도의 그루터기로 잘랐다.

세월이 지나  잘린 그루터기들은 이끼와 작은 관목들, 풀에 둘러싸여 눈에 잘 띠지도 않았다.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게 너무 아쉽다.”


 현우는 바닷가 카페로 가서 예가체프 200그램 팩을 2개 산 후 창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라테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카페는 커피 한 팩을 살 때마다 무료 음료를 한 잔씩 제공했다.


파도의 하얀 포말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현우는 사고 당시 강릉에 있는 현대 아산병원에서 응급처치만 받고 송파구에 있는 본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현우가 진서에게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한 날, 레지던트는 옆 침대의 현우 또래의 청년의 차트를 현우에게 설명했다.

성과 나이는 같고, 이름은 달랐다.

옆 침대의 청년은 오토바이를 타다, 차와 충돌해서 공중에 붕 뜬 뒤 떨어졌다.

척추 신경들을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레지던트는 현우에게 척추 신경을 되살릴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평생 휠체어를 탈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현우는 진서가 똑똑하고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진서는 굉장히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도저히 계속 연인 관계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현우는 레지던트의 말을 듣고 진서에게 헤어지지고 말했다. 

진서는 거절했지만, 현우는 관계를 돌이킬 마음이 없었다.


다음 날 현우를 수술한 교수가 현우에게 재활을 하면 곧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레지던트는 교수가 다른 병실로 나갔을 때, 현우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환자를 착각했어요.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잠깐이라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겠어요.”


현우는 자존심이 사랑보다 우선이라 실수를 정정하지 않았다.

현정을 사랑하는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현우는 라테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테이크아웃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손에 들었다.

원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현우는 이런 생각도 했다.


'범인은 “범인은 현장에 나타난다”는 말 때문에 결코 범행 장소에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정말 치밀하고 지킬 것이 있는 놈이라면 범행 현장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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