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 식구들과 휴가를 왔다. 첫째 언니 예서의 제안이었다. 예서는 특유의 씀씀이로 6개월 전 부모님께 중고 골프채를 안겼다. 자기는 새 채를 사고, 지금까지 쓰던 헌 골프채 세트를 어머니한테 넘겼다.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가 쓰지 않고 보관하던 골프채를 아버지에게도 떠 안겼다.
예서는 두 분이 연습장을 등록하고 레슨도 받게 했다. 6개월 뒤 아난티 남해리조트에서 숙박과 2번의 골프라운딩하는 예약을 둘째인 해서한테 시켰다. 부모님을 머리 올려 준다는 구실로 그 비용을 해서가 다 내도록 했다.
진서는 골프를 안 쳤다. 그래서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이 첫 골프라운딩을 한다는 뜻인지도 이번에 알았다.
의사인 해서는 골드 미스였다. 언니인 예서가 두 번이나 이혼하는 과정을 지켜본 영향도 있는지, 결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진서는 해서와도 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막내였다.
진서의 아버지는 교수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는 한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예서가 첼로를 전공하고 예중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예서의 교육비를 감당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셨다.
그런 부모님을 위해 해서와 진서는 대학을 입학한 후에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다.
진서는 예서가 항상 위태롭게 보였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공허하고 외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진서는 예서를 되도록 멀리하고 대화를 하는 것도 피했다.
부모님들이 은퇴 후 받는 연금들도 거의 60퍼센트 이상을 예서가 가져다 썼다. 워낙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이라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한 부모님은 예서의 아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카가 성당 여름 캠프를 가서 같이 오지 않았다. 진서는 부모님의 노후가 걱정되었지만 참견할 수가 없었다.
예서는 특유의 애교스러움으로 부모님께 과일을 깎아주며 내일 새벽 라운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공이 안 뜬다고 억지로 다 치려고 하면 경기 흐름에 방해돼요. 안 뜨면 나와해서한테 맞춰서, 공 들고 와서 우리 곁에서 한 번 더 쳐요. 내가 캐디 언니한테도 팁을 미리 줄 거예요. 머리 올리는 날이니까 각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할게요. 첫날은 공이 맞고 안 맞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안전이 제일 중요해요. 내가 골프공 안 맞고 남 안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한 거죠."
예서가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부모님은 연달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그래. 네가 하도 우겨서 골프를 치긴 하는데... 다치면 안 되지.”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들리죠? 근데 까닥 잘못하면 공 맞거나 공 맞추는 일이 일어난다니까..."
예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진서는 예서의 몸짓이 과장되고, 말하는 내용이 공허하게 들렸다.
'연극성 인격 장애인가' 진서는 생각을 말할 뻔했다.
“모르니까 너네가 잘 알려줘. 어쨌든 새로운 운동을 하니까 재미있어.”
어머니도 예서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예서는 부모님의 돈을 쓰면서도 본인이 부모님을 끔찍하게 위하는 척하며 생색을 냈다. 부모님은 그런 예서를 항상 칭찬하고 고마워했다.
'그냥, 남편이랑 같이 있을 걸. 왜 이렇게 진오 씨가 보고 싶지?'
진서는 결혼 후 처음 온 친정 부모님과 자매들과의 여행이 하루도 안 되어서 감옥처럼 느껴졌다. 특히 예서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보살 같은 해서는 늘 그렇듯이 예서와 부모님께 아낌없이 베풀고 있었다. 진서는 그 모습을 이방인이 된 듯 바라보았다.
# 오늘도, 내일도 즐거운 라운딩 하세요.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가봐야 해요.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 연락할게요. 사랑해요, 우리 엄마, 아빠, 언니들
진서는 부모님이 언니들과 새벽에 골프 치러 간 후 간단한 메모를 써서 거울 앞에 붙였다. 진오가 매우 보고 싶었고 친정 가족들을 떠나고 싶었다. 모두가 예서에게 휘둘리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예서를 제외하고는 진서의 가족들은 지나치게 무던하고 무감각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진서도 예서의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예서도 사악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첼로 연주를 해서 명문대를 나왔다. 많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미국보다는 독일로 유학을 갔다. 나름대로 경제적인 면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독일에서 첼로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예서는 원하는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도 하고, 개인 레슨도 열심히 했다. 다만 아무리 벌어도 그 이상을 쓰는 게 문제였다.
진서는 진오를 놀라게 하고 싶었다. 진서는 완전히 퍼져서 잠만 자고 있다고 진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짐을 싸서 아침 일찍 남해에서 출발했다. 진오가 묵는다고 말한 호텔까지 쉬지 않고 달리면 진오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진서는 강릉 호텔에 도착하면 먼저 방을 정하고 짐을 둘 생각이었다. 진오의 도착시간에 맞춰 로비에서 진오를 기다릴 계획을 짰다. 진오가 예약한 방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깜짝 방문을 하고 싶어서 알아보지 않았다.
출발 후 몇 시간 뒤, 진서는 진오에게 전화를 했다. 진오는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바닷가야?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해."
"응, 차 안, 곧 호텔로 들어갈 거야. 창문을 다 내려서 그래. 공기가 좋아서 즐기려고."
진오는 진서가 오토바이 타는 것을 눈치챌까 봐 얼른 둘러댔다.
"알았어. 엄마랑 아빠, 언니들이랑 라운딩 가셨어. 나는 이제 일어났고. 흐흐흐"
진오는 장난기 어린 진서의 웃음이 어색하다고 느껴졌지만, 밝은 웃음소리에 기분이 밝아졌다.
진오는 4시쯤 계획대로 호텔에 도착했다. 그가 주차장에 들어서서 오토바이를 세우고 1층 로비에 들어섰다. 진서는 호텔 로비에서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진서가 앉은 의자는 카운터 앞에 놓인 긴 소파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자리에 있었다. 진서는 진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카운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호텔의 로비 입구에는 커다란 곰인형이 배치되어 있었다. 진오는 곰인형을 보자 진서가 보고 싶었다. 진서는 곰인형을 정말 좋아했다. 진오는 호텔 떠날 때, 호텔의 시그너처 곰인형을 사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오는 의자의 높은 등받이 때문에 진서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진오는 진서의 소파를 지나고 카운터로 갔다.
진서는 검은 오토바이 재킷과 바지를 입은 진오가 헬멧을 들고 카메라 배낭을 멘 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진서는 진오의 예상치 못한 옷차림의 뒷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은 편이지만, 다부지고 힘차게 걷는 아이와 같은 모습이 진오가 분명했다.
진서는 놀라느라 전화를 할 시간을 놓쳐 버렸다. 그래서 얼른 일어나 진오에게 다가갔다. 진오의 등에 살짝 손을 대었다. 진오가 막 예약 화면을 찾으려고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먼저 방을 정했어."
진오는 누군가 등을 톡톡 치면서 말을 걸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돌아보니 진서였다. 순간 흠칫해서 진서도 같이 놀랐다.
"당황했어?"
진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갑자기 남해에 있다던 아내가 등 뒤에 있는데 어떻게 안 놀래?"
진서는 진오가 공격적이고 날카롭게 대답해서 다정했던 남편이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먼저 와서 방 잡고 놀라게 하려고 한 거야. 너무 화내지 마."
"화는 무슨. 많이 놀라서 그래."
진오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깐 생각을 하며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카운터 직원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이럴 때 어떻게 하죠? 제가 여기를 예약했는데, 아내가 먼저 와서 호텔방을 잡아서 이중계약처럼 됐어요. 저희는 한 방을 써야 하는데 곤란하네요."
진오는 호텔 카운터의 직원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잠깐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다가 카운터 뒤쪽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원이 돌아올 동안 진서와 진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나 의심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코와 인중, 입만 보았다.
진오는 복잡하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진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뒤 뭔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원래 당일 취소는 안되지만, 이 경우에는 특별히 아내분이 체크인하신 걸 남편분이 예약하신 걸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객실 인원이 안 차서 가능하지만, 다음에는 지금과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텔 안내 데스크 직원은 매우 이례적인 처리라는 것을 강조하며 진서와 진오의 이중계약을 해결해 줬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한 뒤 진오와 진서는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아침 문자에는 가족들이 골프라운딩 가고 혼자 남아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쉬고 있다고 했잖아."
"자기야 말로 어떻게 된 거야? 오토바이 재킷에 바지에 헬멧에.... 나한테 이렇게 숨겨도 되는 거야? 내가 오토바이라면 경기 일으키는 거 몰라? 사귀고 결혼한 세월이 2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래?"
진서는 엘리베이터를 탄 후 카드키를 대고, 12층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호텔 복도를 걸어가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방까지 걸어가는 동안, 진서는 진오가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오는 진서를 만나는 순간 아찔했다. 진서가 자신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아는 자체가 자신의 범행이 들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내려 복도를 걷는 순간,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침묵을 지켰다.
진서가 호텔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 강릉 앞바다의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진오와 진서는 초록색 소나무 숲과 파도가 밀려오는 넓은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 위로 청명한 하늘이 펼쳐졌다.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진파랑의 바다 위에서 밀려오는 하얀 파도를 보는 순간 서로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진오는 호텔에서 만난 후 처음으로 진서에게 웃으며 칭찬했다.
"이렇게 멋진 전망을 가진 방을 잘 잡았네. 나를 만나기 위해 남해에서 운전하고 온 것도 놀라워.
미국 출장 때문에 엄청 피곤했잖아."
진서는 진오의 뜻밖의 모습에 놀라 긴장했던 마음이 진오의 칭찬에 누그러졌다. 마음이 좀 편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너는 앉아서 들어. 나는 서서 말할게."
진오는 진지하게 말했다.
진서는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 서서 고백하는 진오를 바라봤다. 진오는 오토바이 복장을 입고 진서에게 자신이 오토바이를 타게 된 경위를 말하기 시작했다.
진서는 귀 기울여 들으며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진오의 고백을 다 듣고, 진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일어나 진오를 안았다. 진오가 우울증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취미를 아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비밀로 했다. 진서는 그 배려에 에 감동을 받았다.
"자기, 이제 내가 오토바이를 싫어할 이유가 없어. 전 남자 친구보다 내 남편이 더 좋아. 지나간 사람 때문에 자기가 나한테 비밀을 가졌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파. 그렇게 아픈 사춘기 시절 이야기도 못 듣고. 정원 씨, 짱이 이야기도. 이제야 듣다니."
진오는 진서에게서 처음으로 현우보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동안의 불안에서 벗어났다. 두 사람은 룸서비스를 불러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미안해요, 진오 씨, 내가 착한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다니.
현우는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진서는 분명하게 진오에게 말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존댓말까지 쓰며, 사과했다.
그날 밤 진서와 진오는 하나가 된 뒤 꼭 껴안고 잤다. 서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진오는 원래 그랬지만, 진서는 처음으로 진오에게 충만감을 느꼈다. 현우가 지녔던 빛이 진서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친정 식구들에게서 받은 이방인 같은 감정 때문에 진서는 진오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소중한 가족으로 여겨졌다. 자신의 상처를 충분히 배려해 준 진오가 고마웠다.
진서는 오토바이 교통사고 때문에 현우와는 헤어졌지만, 더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고 깨달았다.
다음 날, 진오는 진서의 차를 타고, 오토바이는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서 서울로 탁송했다. 둘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휴가는 같이 보내기로 약속했다.
진서는 진오에게 고양이 한 마리도 입양하자고 제안했지만, 진오는 싫다고 말했다.
진오는 '짱이'가 세상을 떠날 때 상상을 못 할 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이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진서는 진오의 내면에 깔린 상실감과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어졌다. 현우에게서 느꼈던 사랑과는 또 다른 색깔의 감정이었다.
진오가 잠들었을 때, 진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잠든 진오의 얼굴에 키스를 했다. 천진한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진서가 자신의 입과 뺨, 이마에 여러 번 키스를 했을 때, 진오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 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다. 행복해서 진오의 눈 끝에 눈물이 맺혔다.
진오는 현우의 사고에 대한 비밀을 절대적으로 지키고, 오토바이를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