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터치를 하느라 다급해진 모두의 손길이 느껴졌다
드디어 영화에서만 보던 누드스케치를 처음 가는 날이다. 월요일 저녁 6시, 7.029 교실이었다. 은주와 함께 강의실로 향했는데 비교적 차분한 은주와 달리 나는 무척이나 긴장했다. 누드스케치라는 새로운 장르, 새로운 교실,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교수님. 어떤 시간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긴장은 매번 어디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떨게 했다. 은주는 그런 나를 달래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강의실 문 앞에 도착하자 어지럽기까지 했다. 얼굴이 벌게지고 호흡은 가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누군가의 나체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반 강의실과는 다르게 커다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여러 개의 이젤이 세워져 있고 싱크대와 물감들이 있는 공간이 있었고 그 너머로 칠판과 기다란 책상들이 있는 교실이 있었다. 학생들이 이미 많이 앉아 있었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학생은 6명이었다. 나에게 이 시간을 알려줬던 큐와 아나벨, 그리고 함께 수채화 수업을 듣는 그의 친구들 율리아와 베라가 있었고 놀이공원에서 만난 나를 박물관 수업에 데려가 준 소피, 박물관에서 말을 걸어준 릴리아가 있었다. 교수님은 작은 은색 링 피어싱을 여러 개 하고, 코에도 피어싱을 하고 계셨다. 팔이나 다리를 감싸듯 여러 개의 낙서 같은 문신도 눈에 띄었다. 그는 무언가 설명을 하다 중간중간 콜라를 들이켰다. 칠판에 분필을 문지르며 알 수 없는 그림을 만드셨다. 어찌나 세게 칠판을 후려치던지 쪼개진 분필이 나에게까지 날아올 것 같았다. 그는 어두운 색의 다 해진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세게 말하고 크게 웃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검은색 긴 머리를 얌전히 뒤로 하나로 묶고 있는 중년의 남성. 교수님은 나와 은주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고 환영한다고 해주었다. 대학에서 이런 느낌의 교수나 강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과감히 흥미로운 그를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긴장이가셨다. 누드 스케치에 대한 선생님의 팁을 잠시 책상에서 들은 학생들은 이젤이 있던 공간으로 이동했다. 모델을 위해 가운데 공간을 비우고 큰 동그라미 형태로 의자나 바닥에 자유롭게 앉았다. 학생들이 제각기 스케치북과 연필, 물감, 마카 등을 꺼냈다. 교수님은 많은 재료와 다양한 스타일을 이것저것 자유롭게 시도해 보라고 하셨다. 곧 바지를 입지 않고 큰 반팔티로 엉덩이까지 가린 모델이 나무 바닥을 밟으며 내 뒤에서 등장했다.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큐는 대부분 남자 모델이 온다고 했었는데. 그녀가 커다란 반팔티를 벗고 간단한 포즈를 취했다. 15분의 누드스케치가 시작되었다. 교수님이 틀어주신 음악만 강의실의 소리를 채웠다. 나는 이 수업을 위해 새로 샀던 녹색 겉면의 파버카스텔 연필로 살살 살살 선을 만들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몸의 곡선과 주름들. 살이 접히는 모습, 드러나는 뼈의 형태. 어둡고 밝은 부분들. 봉긋하게 솟은 곳과 깊숙이 안으로 들어간 곳. 15분이 끝을 향해 갈수록 모델의 몸은 이곳저곳이 미세하게 떨리고 땀방울이 송글 송글 올라왔다. 나체의 모델과 바쁘게 종이에서 그녀로, 그녀에서 종이로 시선을 옮기며 스케치를 하는 학생들. 포즈를 취하느라 움직일 수 없는 그녀의 고단함 이외에 다른 불편한 상황이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없었다.
교수님은 이리저리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피드백을 주셨다. 나에게도 한 마디하고 지나가셨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두 번째 그림을 그릴 때에는 교수님께 “I can’t understand German(독일어는 못 알아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Oh, sorry!라고 하며 영어로, 진한 부분을 더 확실하게 진하게 그려보라는 피드백과 손가락을 더 자세히 그려보라는 피드백을 주셨다. 교수님의 말투는 “you should”가 아니라 “I want to see how you draw fingers”였고 칭찬을 가득 섞어주셔서 인지 무척 다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5분씩 두 번의 스케치를 하고 5분씩 세 번을 그렸다. 시간을 체크하는 역할은 교수님이셨고 그가 경쾌하게 오, 사, 삼, 이,.. 일! 을 외칠 때에는 마지막 터치를 하느라 다급해진 모두의 손길이 느껴졌다. 한 포즈가 끝나면 모델은 바닥에 닿아 있어 빨개진 무릎을 감싸거나 다음 포즈를 위해 의자에 앉거나 스카프를 바닥에 깔고 눕기도 했다. 학생들은 포즈에 맞는 더 좋은 방향에서 그리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마지막 포즈에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색연필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색연필은 너무 굵어서 섬세한 드로잉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펜으로 선을 먼저 그렸다. 그 위에 하늘색을 입히고 빨간색도 넣고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그렸다. 이렇게 장난을 쳐도 되나 싶은 마음이었는데, 내 그림을 보신 교수님이 ‘I really like your painting. The color works here really well. Good choice!”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 입꼬리는 씰룩씰룩 올라갔고 작게 Thank you라고만 했다. 마지막 포즈까지 끝났을 때 우리는 모델에게 큰 박수를 보냈고 각자가 그린 그림들을 바닥에 펼쳐 두었다. 모델도 종이 위에 그려진 자신을 살펴보았다. 수채화 시간처럼 따로 피드백 시간을 갖진 않았다. 그저 그림을 공개하고 다른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제각기 아주 개성이 강한 그림들이었다. 얇은 선을 만드는 펜으로 그린 사람도 있었고 색연필을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채화나 색깔 마카, 목탄이나 잉크로 그린 사람도 있었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말을 듣고 똑같이 노트북에 받아 적던 지난 대학 생활과 달리 이곳에서는 같은 것을 앞에 두어도 각자의 다양한 시선과 다른 결과물이 당연하게 전재되고 있었다. 모두가 얼마나 자기 세계에 몰입해서 다녀왔는지 그 시간에 대한 잔재를 보는 것 같았다. 첫 시간부터 스스로 내 그림이 너무 예뻐 보이고 교수님께 칭찬도 받으니 기분이 엄청 좋았다. 방에 돌아와서는 나의 첫 누드스케치 그림을 자랑스럽게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냈고 일주일 내내 누드스케치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지루함을 느끼는 시간들 속에서 “아.. 스케치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