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결국 영원히 반복하고 싶을 만큼 좋은 것을 찾아내려 하는 과정이다
둘째 날 저녁 잘 준비를 다 하고 룸메이트인 한나, 셀리나, 은주와 방에 있다. 친구의 생일 선물로 앨범을 만든다며 사진 뒷면에 풀칠을 하고 있던 셀리나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Soooo~? 새미랑은 어때~?” 로맨스를 기대하는 눈치다. 상상치도 못한 질문에 깜짝 놀라며 폭소를 터트린다. 셀리나는 우리가 뭔가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고 나는 전혀 아니라고 부인하며 그 애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셀리나는 Oops sorry! 라며 웃었다. 오늘 하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나는 이 친구들에게 올해 어떤 목표가 있는지 물었다. 셀리나는 멈칫하더니 자기는 올해 목표를 써 놓은 목록이 있다면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전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곳에 오는 차에서 옆자리였던 셀리나는 아이에게 지어주고 싶은 이름이 있냐는 내 질문에 휴대폰 메모장에 있는 리스트를 찾았다. 본 중에 가장 긴 이름 리스트였고 그중 리즈(Lizz)라는 이름은 내 마음에도 들었다.
셀리나의 올해의 목표 목록은 이름 목록보다 간단했다. 개 산책 더 많이 시키기, 가족과의 시간 많이 보내기, 남자친구와 데이트 많이 하기, 책 더 많이 읽기, 과일 많이 먹기. 일상이 아닌 특별한 목표는 돌고래 보기가 전부였다. 놀라웠다. 내가 생각하던 신년 목표의 성격과 무언가 많이 달랐다. 이제 열아홉 살이 되는 친구에게 자연스럽게 기대한 것은 자기 확장 발전 성장 모험에 대한 욕구 따위였다. 그리고 셀리나가 이야기한 것은 건강하게 행복하게 소소한 일상을 반복하는 행위들이었다. 셀리나가 만들고 있는 앨범은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던 베프를 위한 거였다. 함께 찍은 사진들을 모아서 프린트하고 스크랩 북에 붙이고, 글씨로 꾸몄다. 맨 앞 장에는 긴 편지를 쓰고 맨 뒷장에는 함께 갈 페스티벌 티켓을 선물로 꽂아두었다. 이 친구의 엄마와 셀리나의 엄마가 친구인 것은 물론, 할머니들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본인의 나이가 곧 열아홉 살이 되는데 남자친구도 벌써 6년을 만나고 있는 걸 보면 벌써 소소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사랑하는 아이 같았다.
함께 있던 한나로 질문이 넘어갔다. 그는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좋아한 친구가 있어서 사귈뻔할 사람이 있었지만 딱 맞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 딱 맞는 사람이 무엇이냐 물으니 종교도 같아야 하고 자신의 가족 하고도 잘 어울리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스무 살인 한나도 첫 번째 연애부터 결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셀리나, 한나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내가 주로 친구들과 나누던 것과 결이 많이 달랐다. 나와 내 친구들은 대게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향했다. 모험을 하는 것, 헤매는 것이 흔한 선택지였다. 누군가는 교환학생을 하고, 누군가는 유학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거나 휴학을 하며 알바를 하고 인턴을 하는 친구들도 마음 한편에는 떠나고 싶은 곳이 있었다. 독일 친구들이 자주 말하듯 익숙한 친구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떠나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일을 해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고자 했다.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경험과 시선을 공유받고자 했다. 삶은 결국 영원히 반복하고 싶을 만큼 좋은 것을 찾아내려 하는 과정이다. 거창하게 떠나 낯선 길거리를 헤매며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나만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이다. 독일인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일단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미 정원이 있는 집이나 제철의 휴가같이 평생 반복해도 좋을 것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삶에 닿아보기 위해 현실에서 멀리 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흔히 보이는 도피성 워홀이라는 말도 이들에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이틀 지난 어떤 밤이었다. 이곳 Zeitz의 물가가 슈투트가르트에 비해 정말 싸다는 이야기를 하던 셀리나와 한나는 서쪽 애들은 돈을 아끼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들도 항상 싼 걸 사고 열심히 아낀다고 했다. 독일 서부 지역, 특히 슈투트가르트 지역은 저축 문화(saving culture)가 강해서정말 돈을 아끼고 모으려고 하는 게 강하다고 했다. 셀리나는 자기도 돈을 잘 안 쓰고 열심히 모으는 데 이건 우리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살 때 엄청 중요한 가치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이런 슬로건까지 있다고 했다. Save, Save, Save, Build a house. 돈을 모아서 집을 짓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일단 나는 한국에서도 흔한 목표인 ‘집 사기'가 아니라 이들은 ‘집짓기’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나한테 너도 집을 짓고 싶냐고 물으니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기 나이 때 직접 집을 지었지만, 지금은 집을 지을 땅도 별로 없고 집을 짓는데 필요한 인력 고용비가 더 비싸다고 했다. 자기가 직접 집을 지을 능력도 없으니 사고 싶다고 했다. 셀리나도 마찬가지였다.
후에 새미에게 너도 ‘Save, save, save bulild a house’ 인지 물었다. 새미는 자기는 Chill chill chill, build a house라고 했다. 새미는 진짜로 집을 직접 짓고 싶다며 주변에 기술자 친구들이 많아 그들이 지어줄 것을 믿는 눈치였다.
여행 마지막날, 그림을 잘 그리는 안나는 우리가 빙수를 만들기 위해 언 우유를 칼로 부수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안나는 내게 독일과 한국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음.. 한국에는 식기 세척기를 쓰는 집이 흔하지 않은데 독일은 거의 다 식기세척기를 쓰는 게 정말 다른 점이야!” 나는 간단히 답했고 이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에게 내가 정말 하고 있던 생각을 꺼내 보았다. “한국에서도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흔히 제시되는 루트가 있긴 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취직을 하고 돈을 열심히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것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는 걸 발견했고, 뭔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한국 밖으로 나가고 다양한 모험을 떠나는 느낌이 있어. 근데 여기 친구들은 이미 그 행복이 자기 안에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밖으로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어.” 안나는 답했다. “오.. 우리는 여기에서 살면서 할 일이 많고 바쁘니까 스트레스받고 그러는 데 네가 그렇게 다른 시점에서 보니까 beautiful하다.. 고마워.”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상치 못한, 어딘가 어색한 답변이었다. 우리는 이런데 너네는 이래, 그래서 너네가 더 좋은 상황이야. 이렇게 딱 떨어지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단지 시선의 문제일 뿐 저마다의 답답함을 가지고 저마다의 방황을 하며 살고 있겠지. 내가 안나에게 기대한 것은 그것을 일깨워주는 종류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단순히 ‘그렇다면 너네보다 우리가 낫네’에 그쳤다. 이런 대답에 나는 모험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내 존재를 낯선 곳으로 던지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지 소리 높여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