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해치지 않는 시간
24시간 독일어 속에 있자 들리는 것이 조금 더 익숙해졌다. Das ist krank! Mega! Krass! ‘쩐다, 미쳤는데?’와 같은 느낌의 감탄사들은 하도 많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나올랑 했다. 친구들과도 좀 더 편안해졌는지 지금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독일어로 말하기도 조금씩 시도하게 되었다. 특히 큐는 내가 무언가 말하기를 시도하면 칭찬을 해주며 해당 동사의 2인칭, 3인칭, 복수형까지 알려줬다. 큐는 참 잘 알려줬는데 큐한테 돈을 내고 독일어 과외를 해달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내가 적극적으로 일을 만들어야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는 걸 그때는 아직 잘 몰랐다. 저절로 생기는 일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새미는 내가 독일어를 하면 Your German is really good! 이라며 칭찬을 가득해주었다.
이 날은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는 옛 석탄 공장에 가서 잉크로 그림을 그리는 날이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여자아이들은 손수건을 머리에 두른 스타일이 많았는데 한국에서는 잘 없는 스타일이라 신기했다. 민소매를 입은 아이들의 어깨를 따라 햇빛이 흘러내렸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작은 전시 공간도 구경하고, 세미나룸에 모여 무언가 설명을 듣기도 했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을 멜리나에게 반한 날로 기억한다. 멜리나라는 여자 아이가 은주에게 말을 거는 걸었고 그제야 그 애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작업복 스타일의 주머니가 여러 개 있는 청바지와 검은색 나시를 입고 남색 힙색을 걸치고 있었다. 짙은 금발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다. 무엇보다 눈동자가 너무 예뻤다. 내가 지금까지 그 애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놀라웠다. 한순간에 그 애에게 매료된 듯 그 애를 자꾸만 쳐다보았고 뒤를 졸졸 따랐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공장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꽤 자연스럽게 나와 은주는 멜리나와 함께 잔디밭 한 부분에 앉았다. 나는 자연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 애는 축축한 숲, 단단한 땅 같은 분위기를 뿜어냈다. 은은한 웃음과 눈빛만으로 많은 것을 전하는 사람 같았다. 그 애는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고 자기가 한글을 배웠다는 말을 하더니 놀랍게도 우리가 한글로 적은 글씨를 읽어냈다. 예전에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었고, 유튜브로 하루 만에 한글 읽고 쓰기를 배웠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왜 이때까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수줍은 아이였나 보다. 3살 차이 여동생의 이름은 모아나라고 했고, 보도콜리 강아지 두 마리의 이름은 태이와 만두라고 했다. 무엇보다 멜리나가 많이 말하는 걸로 보아 그녀의 학교 밖 일상의 80%는 차지하는 것 같았다. 주머니가 많고 활동성이 좋은 바지가 많은 이유도 강아지들 산책을 시킬 때 입는 옷이기 때문이었다.
멜리나는 우리의 것까지 잉크를 가져왔고 물통이 없다며 같이 쓰자고 말했다. 처음으로 잉크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잉크를 적신 대나무 필촉을 흰 종이에 내렸다. 진한 검은색이 크게 퍼져 나왔다. 펜의 면과 잉크의 양으로 넓은 면과 두꺼운 면을 조절하고, 또 물로 농도를 조절하며 한 가지 잉크로만 그림을 그렸다. 내 앞에 보이는 나무를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선글라스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안나를 그렸다. 또 내 뒤에 있는 커다란 벽돌 기둥과 그 앞에 간이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릴리아를 그렸다. 쨍한 햇빛에 잉크는 금방 말랐다. 빠르게 그린 내 그림이 흡족해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그리다가 자리를 이동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아주 큰 크기의 도화지를 들고 멜리나와 함께 두 번째 그림을 그릴 장소를 찾았다. 우리는 오래전 작동을 멈춘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 하나에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으로만 햇빛이 들어와 나머지는 어둑어둑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녹이 슬어있는 구리 커다란 빛의 물체들이 우뚝 서 있었다. 멜리나와 물통을 사이에 두고 차가운 공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이 그릴 것에 집중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 햇빛을 받은 먼지들이 말없이 유영하고 있었다. 나의 종이에는 짙은 어둠을 감싼 문과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 쌓여 있는 정체 모를 물건들, 전류가 흐르지 않는 전선들이 담겼다. 여전히 대나무를 깎아 만든 펜 한 자루와 검은 잉크와 물 조금으로만 그리는 그림이었다. 한참을 그렸는데도 종이는 3분의 1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한 멜리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나는 한참 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함께이든 혼자이든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을 재생했다. 휴대폰의 작은 볼륨으로도 텅 빈 그 공간이 잔잔하게 채워졌다. 서늘하고 고요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느끼는 긴장이 사라지고 그릴 것에 대한 관찰과 순간에 대한 집중만 남는다. 이런 시간은 내 영혼을 해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정리할 시간이 되어 멈춰둔 시간을 다시 흘려보냈다. 밖으로 나가니 넓은 부지의 공장이나 잔디밭 여기저기 아이들이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교수님 두 분도 멀찍이 자리를 잡아 열심히 각자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두 분의 교수님은 늘 학생들이 그림을 그릴 때 자신도 그림을 그리셨고, 피드백을 할 때 자신의 그림도 꺼내두고 보여주셨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그림을 하나 기증하고 단체 입장료를 할인받기로 했다면서 이 장소의 마지막 작업으로 기증을 위한 그림 작업을 교수님과 학생들이 모두 모여 시작했다. 단단한 받침대를 여러 명이서 들고 학생들이나 교수님이 돌아가면서 그림을 이어 그렸다. 빠르게 선을 겹쳐 그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아주 신나 보였다. 마지막에는 교수님이 물이 가득 차 있는 파란색 양동이를 들더니 그림을 바닥에 비스듬히 세우고, 그림 위에 물을 부었다. 느닷없이 흠뻑 샤워를 한 잉크 그림은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마무리 됐다. 정말이지 신기했다. 곁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나와 은주에게 교수님이 한글로 학교 이름을 써보자고 했다. 은주의 양보로 내가 펜을 잡았다. 학교 이름을 약간 갈겨쓴 느낌으로 적어보았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내 손만 보며 격한 환호를 보냈다. 낯선 한글이 괜히 멋져 보였나 보다. 구경꾼에서 참여자가 될 수 있었던 순간이라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했다.
숙소인 국수 공장에 돌아와서 쉬는 시간에도 여러 아이들은 계속 그림을 그렸다. 교수님도 나무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시길래 나는 그런 교수님을 그리기 위해 쨍한 햇볕 아래에 앉았다. 수채화 물감을 들었지만 빛을 반사하는 종이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 눈을 잔뜩 찡그렸다. 그때 마리가 내가 앉은자리 앞에 앉더니 “Can I draw you?”라고 물었다. 너를 그려도 돼? 이 낭만적인 질문을 이곳 아이들은 서슴없이 한다. 질문 없이도 마치 굴러가는 챗바퀴처럼 서로가 서로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교수도 학생도 쉬는 시간과 수업 시간의 경계 없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이 일상이 무척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벌써 아쉬워져 스케치북에 그림이라도 아주 많이 채워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림 그리는 것에 익숙해졌어도, 집에 가면 이런 시간을 갖기는 정말 어려울 거라는 게 자명했다.
오후 시간, 큐의 조의 발표가 또 하나 이어졌다. 큐는 적어도 마지막에 함께 할 활동을 소개하는 부분만큼은 나와 은주를 배려해 영어로 해줬다. 짝지어서 서로의 얼굴을 그리는 활동이었다. 멜리나는 나와 은주에게 너희를 그려도 되냐고 물었고, 우리는 함께 햇빛 쨍한 야외로 나갔다. 멜리나의 눈을 보며 그녀를 그렸다. 섬세하게 그녀의 얼굴을 잉크로 터치하며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 훑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제한 시간 안에 그녀의 조각이라도 담고 싶어 하느라 손이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