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한국에 돌아가면 예술을 공부할 거니?" 교수님이 물었다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온 후 아이들은 사진을 보며 어반스케칭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풍경을 그리는 일 말이다. 나는 커다란 책상에 내가 공장에서 그리던 큰 그림을 펼쳐놓고 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서 그리니 왠지 멋진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된 것 같았다.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내 그림을 슬쩍 보고는 한 마디씩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시간이 휘리릭 접히듯 2시간이 지났다. 검은 잉크가 군데군데 뭍은 손이 예술적으로 보였다. 커다란 종이와 붓을 가진 잉크 묻은 멋진 나, 그곳에 서서 땀이 날 만큼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
종이가 너무 커서 한참을 그려도 채우는 게 어려웠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교수님이 그리던 선을 중간에 끊으면 안 되고, 이 그림을 완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힘을 좀 빼고라도 끝까지 그려보았다. 새로 그린 부분은 왼쪽과 아래쪽이었는데 속도를 내기 위해 더 힘을 빼고 빠르게 그렸더니 흰 부분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스타일로 그려졌다. 그 그 빈 부분은 오히려 반짝반짝하게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주어 더 잘 그린 것 같이 보였다. 그 그림을 저녁 피드백 시간에 가지고 갔다. 예상치 못하게 엄청난 칭찬을 받았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내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입을 모아 감탄했다. 교수님은 한국에 돌아가서 예술 공부를 시작할 거냐고(Will you study art when you go back to Korea after one year?) 물었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 궁금해졌다. 아마 예술을 공부하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내가 뭐가 될까? 4학년으로 교환학생에 왔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면 졸업까지 추가학기 한 학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내년 하반기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독일에 가서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기에 일단 독일에 가서 그 꿈을 이루면, 그때서야 새로운 꿈도 나타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이곳 독일에서 미술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반 학기 하고도 한 학기가 남아 있으니, 이곳에서 아주 푹 빠져봐야지. 이 시간이 무엇을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더 다채로운 사람이 되겠지. 그것만으로 좋았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피드백 시간이 끝났다. 각자의 그림을 도로 품에 안고 계단을 내려올 때 멜리나는 웃으며 교수님의 질문을 뒤풀이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술을 공부할 거냐고,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엄청나게 집중한다고 말했다. let’s see! Sehe mal.
교수님께 받았던 영특하다는 눈빛, 친구들의 칭찬과 감탄에 힘입어 이 날부터 스케치북에 정말 많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혼자 수채화 물감도 꺼내놓고, 색연필도 꺼내놓고, 연필과 펜은 물론 목탄도 시도해 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 말고 식탁에 앉아 있는 여러 명의 친구들,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교수님들을 그려보았다. 그림이 입체성을 가졌다. 어떤 부분을 진하게 해야 하고 밝게 남겨두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충 선을 그려도 형태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공간감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배경에 들어가는 선들이 중요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사선으로 그려야 하는 선을 수평으로 그리고 있었다. 큐는 그것을 지적하며 그림이 그려지는 프레임 밖에 모든 선이 뻗어나가는 한 점이 있다고 말해줬다. 그 지적을 듣고 나니 이제는 내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림 위에서 어떤 꼴인지가 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위로 올라간 선인가? 내려간 선인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눈 한쪽을 살짝 감고 다시 살펴보기도 했다. 그날에서야 이곳에 미술 교육을 전공하는, 나보다 그림을 훨씬 잘 그리는 아이들이 널렸다는 사실이 좋은 미술 학원에 온 것처럼 기뻤다. 그림을 그리다 이 부분을 빈 공간으로 놔둬야 할지, 어둡게 만들어야 할지 등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용기 내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스케치북을 보여주고 조언을 구했다. 그 애들은 지금도 훌륭하니 그냥 두라고 확실한 답을 줬다. 다음 날은 호수에서 수채화 그림을 그렸다. 한참을 그리다 또 내 수준에서는 완성하고 싶은, 뭔가 부족한 것 같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순간이 왔다.
이번에는 저 멀리 나무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신 교수님께 다가가 내 그림을 내밀었다. 뭘 더 해야 할까요? (What should I do more?) 투박한 내 질문에 교수님은, 이 나무와 앉아 있는 사람을 이어보고 상대적으로 뒤에 있는 나무는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을 추가해 더 엷게 만들어봐라, 그리고 앞부분은 더 진하게 표현해 봐라 등의 조언을 주셨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내 그림을 가지고 내 자리로 뛰어왔다. 이제껏 한 번도 그림을 그리는 중에 내가 교수님께 찾아가 조언을 구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아이들을 보고 나도 한번 해본 것이었다. 교수님 말씀을 듣자 내 그림에서 뭐가 부족한지 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였고 그대로 그림을 수정했다. 어려웠지만 재미있었고 기분이 좋았다. 몰랐던 세상을 한 겹 더 알게 되었으니까! 세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가 하나 생긴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에 빠져 있을 때는 일상에서 보는 모든 것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 담겼을 때의 모습으로 상상하며 보아질 때가 있었다. 한참 글을 쓸 때는 보이는 모든 것을 글로 어떻게 묘사할지 문장을 떠올릴 때도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그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충의 면이나 선, 색깔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영을 강하게 주는 걸 강조하는 피드백을 받다 보니 어느 부분이 가장 어둡고 밝은지, 그리고 조금 더 어두운 것과 조금 더 밝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입체적인 선을 그릴 수 있게 되면 눈에 보이는 선이 묘하게 위를 향하고 있는지 아래를 향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문 아래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조차, 네모난 도화지 안에 옮겨진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