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하고 당찬 친구를 지켜본 이야기
친구 네 명이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다. 나는 성산 일출봉의 일출을 보고 싶다. 하지만 함께 온 다른 세 명의 친구는 귀찮은 눈치다. 어차피 날이 흐려서 일출이 보이지 않을 거라며 말을 넘긴다. 귀찮다는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나도 그 일이 귀찮아진 기분이다. “아 그래? 다음에 보지 뭐”라고 말한다. 속으로 아쉬움을 느끼며 다음에 혼자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문득 은주를 떠올린다. 그녀라면 그냥 혼자 갔을 텐데. 은주는 친구들의 말에 “그래? 그럼 푹 자”라고 대꾸하고 혼자 다섯 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성산일출봉에 오를 것이다. 마침 구름이 걷히고 환한 일출이 나타났다면 멋진 사진을 몇 장 담아 올 것이고, 흐린 하늘뿐이었다면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그 앞에 있는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 마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조용한 아침을 즐기며 책을 읽고, 셀카를 몇 장 찍으면서.
이런 은주의 성격을 눈치챈 건 함께 교환학생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대화를 주도한다거나 어디에 가자고 의견을 내세우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늘 취향이 명확했고, 원하는 것을 혼자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띠가 웃긴다고 놀려도, 그 옷은 또 뭐냐고 타박해도 끄떡없었다. “흥, 이게 요즘 유행이거든!” 일 절의 타격도 받지 않고 새침하게 대꾸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립스틱이나 섀도가 번진 채 다니는 거나 구겨진 종이들이 가방에서 넘칠 듯 삐져나오는 것도 그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고집이 센 그녀에게 자주 툴툴거렸지만, 대체로는 많은 것의 기준이 자기 안에 있는 듯해서 그녀가 좋았다. 일 년 내내 커다란 텀블러에 아이스커피를 채워 다니는. 슬리퍼나 밑창이 딱딱한 롱부츠를 신고 긴 여행을 일삼는. 밤늦게까지 방의 조명을 켜두는. 그런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늘 궁금했으니까.
작고 딱 붙는 것을 즐겨 입던 은주가 검은색 롱코트와 런던 빈티지샵에서 온 사냥꾼 같은 커다란 털외투를 걸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열정적으로 슈투트가르트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서만 세 번이었다. 세 번을 본 것이 아니라 두 번의 실패 끝에 한 번의 공연을 본 것이다. 오직 십 유로에, 충분히 좋은 자리에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학생이라면 그곳에서 어떤 공연이든 십 유로에 남은 티켓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대감을 품었지만, 정말로 미리 가서 줄을 서고 선착순으로 주어지는 티켓을 얻은 건 은주가 처음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입성에 성공했던 날, 그녀는 꼭 공주님의 무도회에 온 것 같았다고 했다. 믿을 수 없이 저렴한 가격에 얻은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과 잘 차려입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그녀를 환기했다. 늦은 밤까지 과제를 하고, 잘하지 못하는 독일어 시험을 준비하고, 피할 수 없는 정치적인 뉴스에 지쳐있던 그녀를. 그곳에서는 무거운 코트를 맡겨두고 봄처럼 가벼운 차림새로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을 수 있었다. 2층 관객석의 난간에 기대어 찍은 사진에서 추위에 떨며 바깥에서 기다리던 시간은 전혀 티 나지 않았다. 오페라 하우스의 고상하고 화려한 온기는 심드렁한 독일의 겨울을 버틸 즐거움이자 찾아갈 수 있는 아름다움이 되었고, 그녀는 이곳에 최대한 많이 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나는 여전히 독일의 한 구석에 머물며 그녀가 들려주는 오페라 하우스를 그려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우아한 발레 공연으로 꽉 채워진 세 시간은 탐났지만, 밖에서 한참이나 줄을 서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걸 반복하기에 나의 열정은 연약했다. 세 번이나 시도를 한 그녀의 끈기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게 나와 은주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실패할 상황을 마땅한 결과로 상정하고 도전을 하는 반면, 은주는 그냥 될 것처럼 한다.)
방치하던 마늘을 전부 까는 것이나 세탁소에 겨울 옷을 한 번에 맡기는 것, 늘 한컨에 생각하던 누군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날이 오는 것처럼, 어느 날 나도 오페라 하우스에 줄을 서러 갔다. 십 유로로 공연을 볼 수 있다면 한 번은 도전이라도 해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까. 쌀쌀한 날씨였지만 반짝이는 미니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한국에서 가져와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었다. 하지만 마땅히 어울리는 옷이 없어 늘 입는 가죽 재킷과 늘 신는 워커를 신을 수밖에 없었고, 옷은 어정쩡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은주가 말하길 그곳은 공주님의 무도회 같은 분위기라고 하던데, 시작부터 주눅이 든다. 검은색 미니 스커트에 롱부츠, 잘 어울리는 검은 롱코트를 입은 은주가 푸시시 웃으며 등장한다. 역시나, 나는 그녀 옆에서 더 빛을 잃는 것 같다.
비행기 탑승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듯, 공연 세 시간 전에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했다. 그곳은 거대한 원형 기둥과 일곱 개의 철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넓은 인공 호수, 그리고 공원을 마주하고 있어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거위가 사람보다 더 많은 듯하다. 은주에 따르면 7개의 거대한 철문 중, 매일 다른 곳에서 문 하나가 열린다. “오늘은 어디일까. 왠지 여기일 것 같기도 하고. 너는 저기 세 번째 문에 서. 나는 여기 다섯 번째 문에 서 볼게. 혹시 네 쪽에서 문이 열리면 나한테 전화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막 뛰어. 거기 전봇대 같은 게 있어. 거기에 줄을 서야 해. 사람들이 우르르 가니까 어딘 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로 배운 이곳의 질서를 전수한다.
나는 은주의 말대로 세 번째 문에 서서 휴대폰을 꼭 쥔다. 대단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만 같다. 흥미진진하기보다는 잔뜩 긴장이 되어 마음이 꼬깃꼬깃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첫 번째 문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생긴다. 결국 우리도 그 줄에 합류하는 것을 택했지만 이미 한참 뒤쪽이다. 그 사이 날은 어둑어둑 해지고 이미 표를 끊은 사람들은 열린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간다. “지난번에는 앞에 있는 다섯 명 들어갔다며. 오늘은 남은 표가 몇 개일까? 한 장도 없을 수도 있지?” 우리 앞에 한없이 늘어진 줄을 보며 나는 그만 집에 가자고 하지만, 그녀는 꾹 다문 입으로 주변을 살핀다.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니 제발 이 성경 모독적인 극을 보지 말라고, 입장하는 관객들의 등에 처절히 외치는 수녀님과 그런 현장을 촬영하는 기자들이 있다. 공원 너머 광장에서 열리는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의 소리도 들린다. 많은 젊은이들이 목도리와 코트로 몸을 감싼 채 남은 티켓을 기다린다. 오페라하우스 문과 가까운 계단에는 두 세명 정도의 사람들이 박스나 종이를 들고 서 있다. 표를 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은주가 말한다. “저기 아까부터 계시던 할머니 들어가셨어. 표 구하셨나 봐.”
곧장 가방을 뒤적이는 그녀를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라본다. 은주는 커다란 공책과 립스틱을 꺼내든다. 얇은 펜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빨간 립스틱을 과감하게 뭉게 뜨려 SUCHEN TICKET(티켓 구함)이라고 적는다. 줄에서 이탈한 그녀는 어느새 오페라하우스의 문을 등지고 섰다. 몇 분 전 할머니가 있던 그 자리에. 건물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빛이 그녀의 코트 끝자락에 닿는다.
나는 ‘Suche’가 아니라 ‘Suchen’이라는 동사원형으로 쓴 그녀의 문법이 틀렸다는 걸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녀처럼 그곳에 설 자신은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찍이 서 그녀를 지켜본다. 이렇게 대담하고 용감한데 알파벳 하나 틀린 것에 창피해할 이유가 있을까. 사람들이 긴 줄을 점점 떠나가고 앞쪽의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추위가 심해지고 완전히 깜깜한 저녁이 될 때까지, 수녀님도 기자님도 시위대도 퇴근할 때까지 은주는 계단 위에 서 있다. 어깨를 움츠리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동안 몇 사람이 은주를 다녀갔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오지 못했다는 아저씨도, 친구에게 바람맞은 한 아주머니도. 한 번은 현금만 받아서, 한 번은 너무 비싸서 그녀는 티켓을 사지 않았다.
티켓을 구한다고 소리 한번 내지 않았지만, 극장을 등지고 꼿꼿이 서 있는 그녀의 끈질김이 통했나, 차가워진 손으로 들고 있던 공책의 간절함에 동했나. 공연 시작 오 분 전쯤 되었을 때, 줄을 관리하던 여자 직원이 은주에게 다가와 귓속말한다. 그리고 그녀를 티켓 부스 앞으로 데려간다. 한 장 남은 티켓을 살 수 있는 기회였다. 가격은 92유로. 그녀가 아껴 입고 아껴 먹은 것이 이처럼 꼭 보고 싶은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 은주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민다. 그녀는 허겁지겁 내게 손을 흔들더니 공연장 안으로 분주히 사라졌다.
애써 꾸민 모습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비록 오페라하우스는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대단한 공연 한 편을 보고 가는 듯했다. 주인공은 은주였다. 끝까지 줄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은 끈기 있었지만 너무 평범했던 것일까, 나도 그들도 은주 앞에서 조연으로 전락했다. “어차피 아무도 나 모르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다한 마음이 그녀를 주인공의 자리에 두었다. 그녀에게는 내가 갖고 싶은 깡이 있었다.
그날의 장면이 여전히 생생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없을 때 나는 그녀를 찾는다. 메아리처럼 묻는다. 언니는 부끄러움이 없어? 언니는 스스로가 못나 보일 때 없어? 언니, 언니, 언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