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삼가 전하께 아뢰옵나니>를 읽고
소제목 '상소로 보는 조선의 역사' /홍서여 씀/ 창조사 / 2005년
삼가……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뜻의, 요즘은 조문할 때에 많이 쓰이는 말을 앞에 붙인, 조선 시대의 상소문들에 대한 책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상소 자체가 건의, 청원, 진정 등 임금의 치세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삼가’라는 말이 상소의 내용을 직설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우회하는 표현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양반네들의 글 자체가 직접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기는 하다.
예전에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내용의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그 우회적이고 우아한 표현들이 너무 질리기도 했다. 미슐랭 인증 스타셰프가 만들어주는 건강식만 계속 먹다 보니 자극적인 맵고 짠 음식들이 눈에 아른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달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앞에 상소, 그 뒤에 상소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상소는 태조부터 고종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서대로 싣고 있었다. 상소의 지루함을 참고 읽으면 그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배경 설명이 나와 읽는 재미가 다시 살아났다.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역사적 내용들도 있었지만, ‘진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싶은 내용들도 있었다.
<상과 벌이 어긋나 나라가 망하게 되었어도 구할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라는 조헌의 상소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이들에 대한 상벌이 조작(?)되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선조와 그를 위시했던 벼슬아치들의 비상식적인 행위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배경 설명을 통해 이기심이 극에 달한 인간은 정말 추악하구나, 싶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용궁현감 우복룡의 군사가 같은 조선군을 죽이고 옷을 다 벗겨 왜군으로 속여 승전을 조작한 일, 자신의 정치적 보복을 위해 의군을 이끌었던 신각을 명령불복종으로 몰아 참수시킨 일 등등 백성들이 처참한 상황에 고통받고 나라의 존폐가 달린 위기 상황에서 ‘나만 살면 돼’를 외쳤던 그 DNA들이 거듭 살아남아 오늘날에도 국익과 국민을 입에 달면서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된 것이겠구나... 화가 나면서도 참 씁쓸했다. 의와 예를 숭상했던 조선에서 경전을 읽는 사대부로 태어나 그 어렵다는 의와 예의 지적 탐구의 깊이를 묻는 과거에 급제해 양반, 벼슬아치가 된 자들 중에도 이런 민낯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니. 교육을 통한 교화는 사회화가 한계일 뿐, 인간의 선천적 기질을 바꾸지는 못하는 걸까.
가장 재미있었던 상소로는 용천 기생 초월의 <있는 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없는 자는 더욱 가난해지니 이는 전하의 탓이옵니다>였다. 유복녀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마저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결국 관기가 되어 15세에 양반의 첩으로 들어갔던 초월. 고려 때부터 아버지와 남편의 지위에 따라 외명부의 품계를 받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게 첩에게까지 주어지는 것인 줄은 몰랐다. 현종 때의 보잘것없는 왕권을 생각하면 중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 수도.
하지만 이 외명부 품계에 따른 첩지를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다며, 그 품계를 거두어달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초월의 상소는 이어 자기 남편의 무능함, 왕의 잘못된 정치, 벼슬아치들의 환곡이나 군정 비리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괴로움 등 총 20여 가지를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었다. 우와! 이런 게 정말 걸크러쉬!
이 상소에 대한 배경설명을 통해 각 지역마다 진사나 생원의 합격자 수가 정해져 있었고, 그에 대한 대과 합격자 수도 지역별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양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경기나 경상도, 다음이 충청과 전라, 맨 마지막이 함경도와 평안도를 포함한 관북부 지역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역 갈등 이야기 나올 때마다 고려의 훈요십조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배역의 지세이므로 등용을 금하라’, 조선의 이방원이 뭐라 했다더라 하는 내용들이 들춰졌던 기억이 났다. 이런 인원수 제한을 두고 단편적인 해석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 초월의 상소가 과연 임금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을까. 글쓴이 역시 이 상소를 읽은 현종의 얼굴 표정, 자신을 무능하다 평가한 첩의 상소 내용을 알게 된 그 남편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상소 역시 원래는 사간원,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올라가고, 특히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는 임금이 직접 답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만여 명 유생들의 연대서명이 포함된 만인소는 바로 임금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생의 상소들도 영조 대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아 걸러내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하니(만인소는 이때도 프리패스) 현종 때에도 상소는 걸러지지 않았을까? 하여 초월의 상소 역시 이런 상소가 올라왔다 기록만 남고 현종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남편에게 말은 들어가지 않았을까? 과연 그 남편은 초월을 첩으로 계속 두었을까? 상상이 계속되며 한 편의 드라마가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저자는 초월의 글이 과장되고 거친 표현들이 자주 보인다고 했는데, 한글로 풀어진 글로 읽어서일까, 아니면 나 역시 거친 생각과 거친 표현들에 익숙한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잖은 양반네들의 답답한 우아함보다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초월의 감정적인 호소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끝으로...
익숙한 역사적 배경들이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 설정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글의 내용과 비교하는 나를 발견했다.
와이띠! 나름 픽션과 사실적 역사를 구분하며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부했는데 나 역시 미디어의 이미지들에 점령당하고 있었구나!!! 미디어의 이미지들이 사실적 정보와 뒤섞이는 시대... 늘 사실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활동을 느슨하게 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오늘도 한 권 털었으~~~~!!! 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