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도 지성도 없는 대중의 이름 ‘개돼지’

- 소설 <동물 농장>을 읽고

by 준 원 규 수

조지 오웰 저 / 박경서 역 / 열린책들 / 2006년


읽지 않았는데 너무 많이 들어서 읽은 것 같은 책이 있다. 예를 들면 <삼국지>. 읽었는데 안 읽은 책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내게는 오정희 작가의 소설들이 그렇다.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고, 너무 많이 들어서 대충은 아는 소설, 내게는 이 <동물 농장>이 그런 책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읽은 <동물 농장>.



1943년 쓰인 이 소설은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의 스탈린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당시에 출간이 힘들었다고 한다. 인간들에게 노동력과 수확물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신들이 낳은 새끼마저 마음대로 기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늙은 돼지 메이저 영감이 매너 농장의 동물들에게 평등한 상황에서 자유를 누리며 풍요를 공유하는 이상을 역설한다. 메이저 영감이 어린 시절에 불렀다는 한 곡의 노래와 함께 매너 농장의 모든 동물들은 혁명에 동의한다.

그러나 삼 일 후 메이저 영감은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그 뒤를 이은 영리한 돼지들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혁명을 주도한다. 농장을 이상적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모임을 조직하고 동물들을 교육하고 새로운 시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스노볼은 독재를 꿈꾸던 나폴레옹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동물들은 예전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며 그러므로 예전에는 없던 자유가 자신들에게 있는 지금은 전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는다.



공동의 적을 만들고, 그 적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일으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사실을 호도하고, 자신들이 내세운 원칙도 수시로 바꾸어 나간다.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어도 비윤리적인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이고 기사에서 많이 접하는 상황이라 새롭지는 않았다.


그들보다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그 농장의 동물들이었다. 글자를 알지도 못하고, 배워도 습득하지 못하며, 상대가 가진 이미지를 통해 그를 신뢰하며 자신의 기억과 생각보다 그의 거짓을 믿는 모습이 대중의 민낯 같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돼지’의 모습. 생각할 줄 모르고 판단할 줄 모르기에 상대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믿지 못하는 이 농장의 동물들이 바로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는 명대사의 밑바탕 같았다.



그렇다면 현재는 달라졌는가. 이 소설이 쓰였을 때보다 대중들의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정치영역이나 사회 영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그 방대한 정보들 속에서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을까. 특히 정치에 대한 관심을 죄악시하거나 편파적으로 가르는 사회 분위기에서 우리나라의 대중은 ‘개돼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나폴레옹의 독재 계획에 차근차근 정복되었던 것은 글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는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논리적인 스퀄러의 언변에 쉽게 설득당했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독재자들의 윽박에 맞설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나폴레옹이나 스퀄러보다 무식하다고 생각하니 자신들이 들은 것도, 본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학력이나 대상의 전문 지식에 무조건 설득당하는 대중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동물들보다는 글을 알지만 냉소적인 성격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벤저민의 모습이 지금 현재 대중들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폴레옹의 이미지에 현혹되어 절대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였던 복서의 모습 역시 정치인의 이미지만 따라가는 대중의 모습 같기도 했다. 거리에서 혐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구호로 외치고, 강한 모습이 좋아 자신이 지지한 정치인이 무슨 짓을 해도 고집스레 그는 옳다고 외치는 대중의 모습.

'동물은 모두 평등하다'던 혁명의 원칙이 '동물은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더 평등한 동물도 있다'로 바뀌어도 모든 의지도, 희망도 없어지고 '복종'만이 삶의 태도로 남아버린 동물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련의 잘못된 혁명과 독재로 흐르는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소설이지만 이제는 권력을 가진 집단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대중은 자신의 자유와 안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소설인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죄 없는 사람들이 단지 신조가 다르고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투옥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는 의식 있고 나름대로는 정확한 소식을 접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 재판에 대해 언론이 보도하는 공모, 반역, 사보타주와 같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략-
(영국의 민주적인)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은 포로수용소, 강제 추행, 재판 없는 투옥, 얼론 검열 등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소련과 같은 국가에 대해 대중이 읽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영국의 관점으로 해석되어 그들은 <전체주의> 선전의 거짓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인다. 1929년까지 대다수의 영국 사람들은 독일 나치 정권의 실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고 오늘날의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서도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환상에 사로 잡혀 있다.
- '우크라이나 판 작가 서문' 중에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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