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전집 <산문>을 ‘반’만 읽고
김수영 저 / 민음사 / 2011년
교과서에도 실리고, 모의고사에도 나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시인 ‘김수영’.
그의 작품들을 모아서 <시>와 <산문> 두 권의 전집으로 구성된 이 책은 표지가 무척 깔끔하고 예뻐서 책장에서 제법 존재감이 있었더랬다. 시집을 펼쳤다 열 편의 시를 채 읽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유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책을 살 당시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몇 년 동안 VIP등급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작가의 이름과 출판사만 보고 책을 주문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리보기 기능도 없었다. 한자를 찾아가며 책을 읽기에는 제법 바쁜 일상을 살고 있을 때라 나중에 한가할 때 보자, 하고 책장에 곱게 꽂아놓은 채로 시간이 지나버렸다.
브런치 덕에 읽어보자, 생각하며 시보다는 수월하게 접근하기 좋은 산문집을 꺼냈는데, 음…… 재미가 없다. 산문치고는 문장도 뻣뻣하고 날카롭고 예민한 작가의 시선과 신경이 그대로 전달되어서일까. 읽는 내내 편하지가 않달까, 눈앞의 활자들에 눈치가 보였달까.
하지만 김수영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총 636페이지의 이 책을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상과 현실, 창작과 사회의 자유, 시론과 문학론, 시작 노트·편지·일기초, 시 월평, 장편소설 ‘의용군’, 번역작품 목록의 순으로 구분되어 있다. 나는 330쪽 즈음, 3부의 시론과 문학론을 삼분의 이 정도까지 읽은 셈이다.
김수영 시인에 대해 우리는 현실참여시인이라 말하지만 이 산문을 읽으면 그가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현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문학, 그 문학을 위해 자유가 필요했고, 생각이 그 무엇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자신이 어제 쓴 표현에 만족해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되고, 어제와는 다른 관점, 다른 차원의 생각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김수영의 생각이었다.
그가 시 ‘폭포’에서 말했던 ‘나타와 안정’은 글을 쓸 때에도 경계해야 할 구태였던 거다. 저번에 쓴 표현이 좋았으니 이번에는 좀 편안하게 쓰자, 이런 마음으로 안주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모독이며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기 위해서는 문학이 가려야 할 금지된 구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독재 상황에서, 분단이라는 현실을 무기로 여기까지만, 이라고 선을 그어놓은 자유가 문학을 옵죄게 되리라, 김수영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정도의 자유면 글을 쓰기에 충분하다고 말하는 평론가나 작가들에게 어김없이 날 선 비판을 던지는 글들이 여러 편이었고, 생활을 위해 자신이 쓰고 싶지 않은 글의 청탁을 받고, 출판사에서 정해준 주제에 맞추려고 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가며 글을 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탄과 혐오(?)의 감정도 드러났다.
매해마다 새로이 내려 사람들에게 설렘과 감탄을 자아내는 첫눈처럼,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자신의 주제의식을 자기 역량 안에서 최대한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었던 것 같았다. 김수영이 현재까지 살아 문단의 원로로서 지금의 문학을 봤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시를 ‘현실참여시’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수업하는 교실의 상황에 대해서는 무어라 했을까. 왠지 자신의 시를 한 관점에 가두어놓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정 짓는다 화를 냈을 것만 같았다.
그의 일상 역시 녹록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일상을 꾸려나가기 위해, 생계를 일궈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고뇌하던가. 제대로 원고료가 나오지 않는 시 대신 하고 싶지 않은 번역을 꾸역꾸역 해나가면서도 그는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원서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과 원고료라는 현실에서 적당히 타협해 버리고 또 그렇게 타협한 자신을 넌지시 나무라는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며 뇌까릴 것만 같은 김수영의 모습은 참 진솔하다. 또, 닭을 키우는 이야기도, 작은 손익에 하찮아지는 자신에 대한 자조도 진심으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마저 참 열정적이었다.
김수영의 사진을 보면 삐쩍 마른 얼굴에 큰 눈이 참 형형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살이 몸에 붙어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이 무한정 새로움을 향해 자신을 몰아세우고, 눈이 형형하게 빛날 만큼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론에서 한치의 타협 없이 현실을 살아내고자 하는 그 노력이 살아 있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이 순수하다면, 김수영의 ‘부끄러움’은 눈물겹게 느껴졌다.
아내를 늘 여편네라 부르고, 아이들을 늘 자식놈이라 칭하는,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가져온 1부의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오늘날에도 김수영 같은 가장이 있다면 손가락질을 받지 않겠는가, 싶기도 했다. 아내와 막내 아이와 함께 즐겁게 영화 감상을 하러 갔다, 영화 내용에 감동을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감동을 바탕으로 자아성찰에 들어간 김수영은 기분이 나빠진다. 그 영화의 감동에 못 미치는 자신의 노력이,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망과 실천이 부끄러워져 그는 기분이 나빠지고, (아마도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외출할 때 좋았던 분위기를 살려) 유명 가수의 흉내를 내며 재롱을 부리는 막내아이에게 화를 내고 만다. 문학에 대한 그의 순수한 의지는 작가로서는 대단한 것이겠으나 언제 기분이 나빠지고, 날카로워질지 모르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그 아버지라는 존재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몇몇 시인들의 자녀들 인터뷰를 보면 아버지에 대해 해탈한 듯, 별다른 애정이나 애틋함이 보이지 않았던 게 생각나기도 했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사람이 성장하면 결혼하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 먹는 것만큼이나 당연했을 일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김수영의 산문을 읽다 보니, 정지(整地), 촌초(寸秒)처럼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들도 많고 낯설게 느껴지는 어미 활용도 보였다. 또 사회 모습도 달라져 문장을 구성하거나 이어가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60년 때 쓰인 글들인데 백 년도 되지 않아 사용하는 말의 방식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좀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문예지에 발표하는 글을 통해 다른 작가나 평론가들과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매체가 달라져 댓글이나 영상을 통해 SNS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비교가 되기도 했다. 글을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더 정제해서, 더 이론적 근거를 탄탄하게 세워갔던 예전의 방식이 어쩌면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남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도, 그 글을 적어가는 자신의 마음 자세에까지도 살펴보았던 시인. 비록 그 매서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해 중간에 책을 덮지만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어서 좋았다.
특히 4.19 혁명 직후의 사회 상황에 대한 글들이 탄핵 이후 개혁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해 주었고, 진정한 ‘글’이란 무엇인가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어떤 내용의 글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쉬지 않고 끊임없이 해야 하는 고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