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이별에 대한 상상
남자는
오늘 잡은 긴꼬리벵어돔에 대해 아내에게 좀 더 설명하고 싶었다.
물론 아내는 여느 때와 같이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풍랑은 괜찮았는지, 긴꼬리벵에돔은 얼마나 큰지, 다른 물고기 중 어떤 것들을 잡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남자는 아내와 영상통화를 걸어 바다를 보여주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아내 역시 우등생처럼 잘 듣고, 질문하고, 감탄하고 잡기 힘든 물고기를 낚은 것을 기뻐해줬다.
그러나 눈앞에서 출렁이는 바닷물이 갯바위에 부딪혀 올 때의 차가움을,
찌가 내려갈 때 묵직해지는 낚싯대의 감각을,
낚시대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들을 바라보다 멍멍해지는 순간의 평안을,
파도를 따라 출렁이는 배에 몸을 맡기듯 모든 생각과 마음들을 내려놓는 그 흔들리는 자유를
아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해 받는 사랑이 감사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은 사랑 밖에 있다.
여자는
독서모임에서 가까워진 민영 씨가 좋다.
가장 좋았던 문장이나 인상 깊었던 부분들이나 책에 대한 감상이 비슷했다.
어제는 민영 씨와 영화를 함께 봤다.
감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목이 말라서 시간을 봤더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주차장에서 서로 차를 발견하고 동시에 웃음을 떠트렸다.
차종도, 차의 색도 같았다. 국내에서 찾기 힘든 파란색.
소설이나 영화, 인문 관련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과 가질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낚시나 캠핑, 등산, 스키, 윈드 서핑처럼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낚시나 캠핑을 갔던 적이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계속 출렁거리는 바다는 불안했고, 모기 알레르기가 있는 여자에게 산은 불편했다.
어느 순간 남편은 혼자 여가 시간을 보냈고,
여자 역시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전시회를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틈틈이 통화하고,
주말 동안 한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남편은 열심히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함께 하기 어려운 취향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시간에 잠시 간격을 두는 사랑도 필요한 거라 생각했다.
그 간격이 외로움의 자리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은 채.
남자와 여자는
정략이라면 정략 결혼이었다.
출판사를 물려받을 여자에게 아버지가 남자를 소개했다.
제법 탄탄한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국내 내로라하는 문화재단 이사장의 막내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외모상으로도 제법 잘 어울렸고, 가풍도 비슷했다.
어머니들이 같은 대학의 동문이었으며 두 집안의 종교도 같았다.
경제적으로는 여자네가 살짝 기울었지만, 온라인에서 받는 악플 사례는 남자네가 더 많았다.
부모들은 소개까지만 상관했고, 그 후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잘 맞는 부분이 많았다.
식성이 비슷했고, 옷 입는 스타일도 비슷했다.
경제나 문화에 대한 시각이 비슷했고, 정치적 성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단정하게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좋았고, 여자는 남자의 식사 매너가 마음에 들었다.
둘 다 여행을 좋아했으므로 결혼 후 여유 시간에는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여행을 가서 전시회나 공연을 보고,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게 좋았다.
남자는 여행을 가서 요트를 타고, 산행을 하고, 패러글라이딩도 하며 활동하는 게 좋았다.
공통점이 많다보니 차이점이 도드라졌지만 취향을 벗어난 새로운 경험의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하기 위해 시도했던 여러 번의 기회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취향이 입에 맞지 않는 음식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와 여자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가 없다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공감했다.
서로에게 맞추기 위해 애쓰기보다 각자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안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들은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각자 보낸 시간 후에는 더 밀도있게 서로를 공유하려 했지만
한번 만들어진 간격은 더 깊은 외로움의 틈이 되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그 간격을 좀더 넓혀 보기로 했다.
-다음 달에 낚시 크루들이랑 캐나다 간다면서요?
여자는 잘 다녀오라고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는 집들이 해. 당신 좋다던 그림, 보내주라고 했으니까 이삿날 비서실에 연락하고.
남자가 여자의 차문을 닫아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미진씨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그래.
남자는 멀어지는 여자의 차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랑도, 외로움도 닮은 우리여서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