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반을 벗어나 세상에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됐을 때,
나는 아마 삼백 일 가까이 지낸 태반 안을 휘 둘러 보았을 거다.
그리고 산도를 따라 어느 정도 내려왔을 때,
아, 맞다!
내 기억력!
그랬을 거다.
건망증에는 메모가 좋을 것 같다고
초등학생 때부터 수첩을 여러 개 샀었다.
하지만 나는 늘 친구에게 숙제를 묻는 전화를 걸었고
방학이 되어 가방을 빨 때면 구석구석에서 대여섯개의 수첩들이 우루루 나왔다.
모두 첫 장에만 숙제나 준비물이 쓰여 있었다.
지금도 나중에야 메모장의 메모를 발견하고는 응? 언제 적었지? 하는 경우가 많다.
내 기억력은 특정 부분에서 좀 뛰어난 편인데 서사가 있는 것들은 잘 기억했다.
숙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칠판 어디에 숙제를 적었는지 기억났다.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표정이었고, 그 때 카페에서 나오던 노래는 뭐였는지
이런 걸 잘 기억한다.
여행갔던 도시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그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어떤 말들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고유명사를 잘 활용하고 숫자를 명확히 제시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므로
기억력이 나쁜 내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검증해봐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뭐 그런 거까지 기억해?’라며 나를 음침하거나 뒤끝이 있는, 무서운 사람이라 평하는 경우도 있다.
내 기억력에 탁월한 부분이 있음에도 그 능력을 ‘서브에만 강하다’고 스스로 폄하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겠다.
기억력이 나빠 학생 때는 공부하는 게 힘들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려운 책을 읽어도 잘난 척 하는 데 써먹지를 못한다.
내 자신을 제법 잘 아는 관계로 누군가와의 기억 차이에 끝까지 우기는 적도 별로 없고,
내 말 끝나기가 무섭게 검색으로 확인해 보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서운함도 그러려니 넘기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해 본다.
정말 내 기억력은 쓸모가 부족한가.
기억력이 부족해서 중요한 약속을 잊은 적도 없고, 누군가에 피해를 끼친 일도 없다.
관광지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곳에 불었던 바람이나 기온, 그곳의 분위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 이런 것들을 잊어버린다면 내게 더 효율적인 기억이 될까.
나를 돋보이게 하는 데에 부족함이 많은 기억력이겠지만
내 시간들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기억력이다.
그거면 된 거 같다.